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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7화 (287/470)

제287화

287화

아진은 낙관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말을 한다는 것은 지금 린린에게 그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아서 그런 거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진이 그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린린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나도 가고 싶어.”

“그러면 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출발하자.”

“잠깐만. 그래도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지.”

그대로 그곳에 계속 있으면 아진이 무슨 말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린린은 급히 옷을 갈아입으러 달려갔다.

아진은 린린을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아가 자기들이 십만대산에 다녀올 거라는 얘기를 해 주었고 린린의 표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리고 있던 두 사람도 잘된 것 같다며 조심히 다녀오라고 말해 주었다.

린린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기분을 알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모두 걱정하면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린린을 다시 만났을 때 그녀는 혼례식에 참석할 때보다 더 근사하게 입고 있었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어쩌면 자신보다 더 속이 상한 채로 있을 옛 부하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것 같아 아진은 슬그머니 자신의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나도 갈아입고 올까?”

“됐어. 오라버니를 볼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고 그 옷도 괜찮아.”

린린이 먼저 바닥을 펼치고 천상제를 전개했다.

어제의 린린과 오늘의 린린이 크게 변하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완전히 같은 사람은 아닌 것처럼 그녀의 천상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매일 매일 조금씩 달라졌고 지금의 천상제는 그동안 아진이 봤던 어떤 것보다도 유려했다.

발밑으로 숲이 지나고 성이 뒤로 밀려 나가는 동안 아진은 그 곁을 지켰다.

해가 뜨고 다시 지며 시간이 흐르는 동안 린린의 곁에는 아진이 내내 함께 있었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이 일이 장차 어떤 식으로 흐르게 될지, 거기에 대한 생각이 분주하게 흘렀다.

지금 상황에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자료가 너무 빈약했던 것이다.

누가 그런 짓을 저지르고 있는 건지에 대해서도 정보가 부족했고 지금 단계에서는 추측이라기보다 상상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터였다.

향화문이 모든 인력을 총동원해서 정보 수집에 나서고 있고 다른 곳에서도 유사한 일이 일어난 적이 있었는지 알아내고 있지만 들어오는 소식 중에 그런 것은 없었다.

십만대산에 이르는 동안 결코 적은 시간이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곳에 가는 동안 생각을 오롯이 집중한 탓에 언제 도착했는지 몰랐을 정도였다.

“아직 너는 신교의 진을 그냥 해진하고 들어갈 수 있는 거야?”

아진의 질문에 린린은 따로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십만대산의 안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고 어떤 거부도 당하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봤냐는 듯이, 내가 이런 사람이라는 듯이 안으로 들어가며 아진을 바라보는 린린을 보면서 아진은 그녀가 익숙한 모습으로 돌아온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 후에는 거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역천마의가 있을 교주전으로 향하는 동안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변한 게 별로 없네.’

외부의 모습을 보면서 그렇게 생각하던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함부로 할 게 아닌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유지.

변함없이 그 모습을 계속 지키는 것.

그것을 위해서 역천마의가 얼마나 애를 써오고 있었던 건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주전의 주위에는 수많은 신교의 무인들이 지켜서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이 있었던 직후라 더더욱 경비가 강화된 것 같은 모습이었다.

린린은 역천마의의 처소가 있는 방향으로 가서 그곳의 창문을 직접 노리고 그곳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역천마의는 뒤돌아 서 있는 상태였지만 그들이 바닥에 내려앉았을 때 돌아본 얼굴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들이 온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역천마의.”

린린은 교주라고 부르는 대신 다시 그녀를 평소처럼 불렀다.

“지존.”

역천마의 역시 린린을 그렇게 부르고 속이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진과 린린은 자기들이 생각했던 것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들었나 보구나.”

“저는 마의입니다. 지존. 저는 교주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 말을 다른 누구에게 할 수 있었을까.

앞에 있는 사람이 린린이 아니라면.

린린은 안타까움을 느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가가서 역천마의의 팔을 어루만져 주었다.

“애썼다는 걸 알고 있다.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도 알고 있어.”

“지존…….”

그녀가 알던 패월악은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패월악을 존경했고 그리워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의 지존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

린린을 두고 패월악을 그리워하게 되지는 않았다.

린린을, 지금의 그 모습을 보게 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역천마의는 알고 있었다.

“너에게 너무 큰 짐을 지웠다. 그래서 역천마의의 재능을 발휘하지도 못하게 된 거야.”

“돌아오시겠습니까. 지존?”

역천마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간절한 바람을 담아 조급하게 물었다.

그렇게 서두르려고 한 것은 아닌데 어느덧 그 말이 먼저 나와 버린 것 같은 형국이었다.

“지존…….”

그녀는 아마도 애가 타는 심정으로 린린의 대답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아진은 린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추측하고 있었다.

린린의 곁에 있을 때 역천마의는 가장 훌륭하게, 어떤 부족함도 없이 자신의 기량을 전부 뽐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동안 역천마의가 만들어 냈던 대법만 보더라도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일어난 일도, 만약 역천마의가 여유를 가질 수만 있었다면 차근차근 생각을 풀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떤 이들이 어떤 마공을 만든 건지.

그런 술법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한지.

그걸 만들기 위해서 꼭 필요한 재료 같은 것은 없는지.

그런 것을 막으려면 어떤 부분을 공략하면 되는지.

그러나 평소에 자신이 있었던 자리가 아닌 교주라는 어색한 자리에 서서 다른 역할을 부여받고 낯선 곳에서 문제를 파악하려고 하다 보니 그런 것들에 어려움을 느낀 것일지도 몰랐다.

자신은 마의라는 말이 그 많은 것들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지존…….”

역천마의는 다시 한번 애원하는 듯이 말했다.

자기가 지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역천마의는 큰 짐을 내려놓고 있는 듯했다.

“…….”

린린은 그때까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진은 린린이 역천마의의 말을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생각한 것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린린이 그럴 거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린린에게서 나온 말은 아진의 생각을 벗어났다.

“교주가 되겠다.”

“지존……!”

역천마의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당황한 것은 아진도 마찬가지였다.

“…….”

저도 모르게 손이 꽉 쥐어졌다.

처음에 린린이 물었을 때.

자기가 산본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냐고 했을 때 아진은 린린에게 결정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얼마나 겁이 없었던가.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지만 서 있는 위치와 방향 때문에 린린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교주가 되겠다니.

깊은 실망감.

원망.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서운하다고 하고 끝낼 수 있는 문제라면 실컷 서운해하겠지만 그냥 그렇게 끝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역천마의가 그러는 것처럼, 그리고 신교도들이 그러는 것처럼 산본의가에도 린린이 필요했다.

그리고 자기에게도.

아진은 만두가 늘 옆에 있었으면 했다.

그래도 일단 린린이 뭐라고 말을 하는지 들어는 보고 자기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을 하면 설득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전무후무한 천마 납치사건이 십만대산 한복판에서 벌어질지도 몰랐다.

“지존…….”

역천마의는 감격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린린은 먼저 확실하게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나는 교주가 될 것이다. 그리고 교주의 자격으로 모든 것을 결정할 거야. 내가 어디에 머물지도 말이다.”

“혹시…… 설마 산본의가에 계속 머무시겠다는…….”

아아. 그런 거였어?

아진은 그때까지 불안했던 마음이 일거에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린린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은 뒤로 다 마련을 해 두고 있었던 것이다.

린린은 역천마의가 제대로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본좌가 어디에 머물 건 그게 문제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자 역천마의의 얼굴도 점차 환해졌다.

“그거야 당연한 일입니다. 패월악 교주이셨을 때도 그러셨지 않습니까.”

린린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부터는 느긋하게 얘기를 해 보자는 듯이 의자에 앉았다.

“사람들을 불러오겠습니다. 지존.”

린린은 역천마의가 그렇게 급하게 불러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린린의 앞에서 역천마의를 주군이라 불러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로 인해 린린이 상처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속을 끓이고 있을 불쌍한 마두들.

“그래. 기다리지.”

서로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통하고 있었다.

역천마의가 나가자 아진도 린린의 맞은 편에 앉았다.

“그 생각은 언제부터 했어?”

“여기에 온 후에.”

“이 방에 들어온 후에?”

“응.”

“그래도 이 오라버니 옆은 못 떠나겠던가 보지?”

아진이 린린을 놀리려는 것처럼 말하자 린린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라버니 옆에 있는 게 제일 편하고 안전한데 내가 왜 굳이 다른 곳에 가서 고생을 하겠어. 오라버니 옆에 있으면 죽는 것도 겁낼 필요가 없잖아. 내가 죽으면 오라버니가 살려 줄 테니까.”

겨우 그런 이유라고?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편하게 살려고 내 옆에 있겠다는 말이냐?

따지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불만은 없었다.

스승의 혼례식에서 역천마의 일행을 만난 후 한동안 펴지지 않던 얼굴이 이제는 완전히 아무 근심도 없이 펴져 있었다.

아진은 그저 린린이 아무 걱정 없이 무사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와…….”

“왜?”

아진이 저도 모르게 육성을 터뜨리자 린린이 곧바로 물었다.

“아니. 방금 무슨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서.”

“그게 뭐였는데?”

“네가 그냥 무사하기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바람직하네. 그런데 그게 왜?”

“야. 린린. 그동안 네가 얼마나 사고만 치고 다녔으면 너한테 기대하는 게 그렇게 소박해졌겠냐. 그러는 동안 이 오라버니가 얼마나 고생을 했겠냐고. 오라버니가 불쌍하지도 않냐?”

“그건 모르겠는데?”

뻔뻔하게 구는 린린을 보면서 아진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랐고 린린은 드디어 한 방 먹였다는 듯이 즐거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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