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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6화 (286/470)
  • 제286화

    286화

    “확실하게 그 교지가 잘못된 것이라는 증거가 없이 이런저런 뜬소문만을 가지고 사람들의 경계심을 희미해지게 만든다는 것은 아주 중차대한 일이오. 그렇게 했다가 나중에 실제로 그로 인한 문제가 생긴다면 조금 전에 그런 발언을 한 분들은 그 일에 책임을 질 것입니까?”

    “우, 우리가 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이오! 우리는 다만…… 그런 이야기도 있으니 신중하게 생각할 문제라고 말한 것뿐이오.”

    “이럴 때 신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이야기에 귀를 열어놓는 것이오. 그렇지 않습니까? 서로 간에 불신이 조장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해서 위험을 벗어나는 것이 옳은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나는 그것이 당연한 것 같은데 어째 이상하게 생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장 문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요. 그러면 장 문주는 혹시 맹주님이 다른 의도라도 가지고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거요?”

    발끈하고 나선 이는 진주언가의 가주였다.

    존재감이 없다가 정의맹에서 탈퇴한 후 맹주의 측근으로 활동을 하는 이였다.

    “내 생각은 그렇소. 맹주님이라면 이럴 때 구성원에게 작금의 상황을 잘 설명해서 인식시키고 과도한 불안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하오. 그리고 서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큰 규모의 모임은 자제하도록 하고 깊이 있는 교류를 오랫동안 해 온 문파 중심의 모임을 해 나가도록 해야 할 것이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맹의 입장에서 장려할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지금은 다른 때보다 그나마 단합이 잘되는 편인데 장태산의 말대로 한다면 그동안 기울여왔던 크고 작은 노력이 수포가 될 수 있어서였다.

    “장 문주는 말을 삼가도록 하시오. 그리고 맹주님에 대한 예를 갖춰야 할 것이오!”

    진주언가의 가주가 다시 한번 크게 호통을 치듯 말하자 장태산이 가소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맹의 입장에서는 이럴 때 맹을 중심으로 단결하기를 바랄 거요. 조직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오. 하지만 그건 맹의 입장이오. 이럴 때 우리는 각자도생을 해야 하고 말이오. 가만 보니 여기에 있는 분들은 넋 놓고 앉아 있다가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에 넘어갈 것 같아 이 얘기를 하는 겁니다. 하긴. 그랬으니 무림맹에 남아 있는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장 문주!!”

    무림맹이 노호성을 발했지만 장태산은 굴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무림맹에 속해서 누리는 이점도 별것이 없었다.

    장태산은 이런 집단생활을 하는 것도 거의 처음이었고 자기가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정의맹에 들어갔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찍히느니, 기왕 말아먹을 것 별로 기대하는 것 없는 사람들 앞에서 실수를 경험하고 정의맹에는 새 마음으로 들어가자고 생각하며 무림맹에 들어왔던 것이다.

    “일단 얘기를 했으니 마치기는 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일단 교지의 내용을 믿어야 합니다. 관과 무림이 불가침이니 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뭘 노리고 그런 말을 하는 건지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조직의 수장입니다. 수하들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더는 그 자리에 남아 있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장태산에게 대노했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 않아도 속으로 의문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장태산의 말을 들으면서 그 말이 맞겠다고 생각했다.

    문파와 가문을 생각하는 마음이 큰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랬다.

    “그럼 오늘은 자리를 이만 파하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이것은 맹의 차원에서 대응할 문제가 아니라 각자 돌아가서 해결해야 할 일인 것 같으니 말입니다.”

    그때까지 소극적인 태도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만 하던 이들이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며 슬금슬금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 맹주는 눈살을 찌푸렸다.

    생각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 같더니 갑자기 틀어져 버려서였다.

    ‘멍청한 인간들. 멍청한 작자들 같으니!!’

    맹주는 이것이 자신에게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울분을 감추지 못했다.

    쉽게 선동되던 이들은 장태산의 말에도 크게 흔들렸고, 어느덧 그 자리에는 빈자리가 듬성듬성 생겨나기 시작했다.

    * * *

    혼례의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너무 쉽게 가라앉았다.

    사실 그 분위기는 혼례가 끝나기도 전에 끝났다고 봐야 했다.

    서둘러서 산본에 돌아온 사람들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했다.

    제선문주는 역천마의가 만들었던 추살접이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면서 추살접과 비슷한 기능을 가진 추적향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그걸 사람들에게 묻혀두면 나중에 실종이 된다고 해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제선문주의 말에 위도가 가장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도에게 그 말은 앞으로 새로 만들어야 할 약제가 있다는 의미로 들렸고 자기는 준비가 됐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본가를 노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저는 누군가 뒤바뀌었다고 해도 바로 알아볼 수 있을 것 같거든요.”

    도종의 말에 다른 사람들도 수긍하는 빛을 띠었다.

    아무리 술법으로 그 사람을 대체한 다른 이를 만든다고 해도 한 사람을 이루는 모든 것을 완벽하게 복제해 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럴 만도 한 건 본가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관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것이 몸에 배 있지요. 그런 본가 사람들에게 그런 일을 시도한다는 것은 자기들이 바보라고 증명하는 거나 다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의원 하명준의 말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고 보니 정말 그렇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산본의가 사람들은 객잔에만 가도 객잔 안에 있는 이들을 열심히 살피면서 저 사람은 어디에 문제가 있네,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것 같네 하는 얘기를 끝도 없이 해대곤 했다.

    그런 산본의가에 찾아와 그들 중 누군가를 납치하고 그 자리에 다른 이를 채워 넣는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무모한 짓이었다.

    “그래도 일단 우리가 예방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예방을 해야겠지요. 특히나 표국이 조심을 해야 할 겁니다. 표국은 특별히 표행이 있지 않은 한 유동적이고 서로 다른 곳에 있다가 다시 모이는 일이 다반사이니까요. 새로 쓰게 되는 쟁자수들은 각별히 유의해서 뽑도록 하고 당분간은 너무 큰 표행은 받지 말고 미루도록 하세요. 안전이 가장 중요합니다.”

    가모가 국주에게 말하자 국주는 그 말을 명심했다.

    “철방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철방의 야장들은 바뀌면 당장 표가 날 것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놈들이 일 못 하는 야장들을 데려가고 일 잘 하는 놈으로 바꿔치기해 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노려보고 있다가 목에 족쇄를 채우고 가둬 놓고서 계속 망치질만 하게 할 겁니다.”

    “저희 전장이야 뭐…….”

    각 사업장을 맡은 수장들은 그런 말을 하면서도 대비책 마련에 몰두했다.

    그래도 조만간 제선문주가 추적향을 만들어 낼 거라는 생각에 어느 정도 안심을 하는 분위기였다.

    자리가 파하고 사람들이 흩어지자 아진이 소청을 불렀다.

    “소청아. 당분간 랑랑을 잘 지켜 주어라.”

    “예. 스승님.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랑랑은 나쁜 사람들의 목표가 되기 쉬우니까요. 어리고 약하면서 본가의 모든 사람이 좋아하잖아요.”

    “그래. 그렇지.”

    랑랑이 두 팔을 벌리고 누군가를 향해 달려간다면 그 아이를 향해 마주 팔을 벌리지 않을 사람이 없었다.

    악한 마음을 품은 사람들에게는 그것처럼 좋은 먹잇감이 없을 것이다.

    소청은 대답하고 곧장 랑랑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평소에도 서로가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왔으니 갑자기 생활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소청이 랑랑이 머무는 내원으로 가는 걸 보고 아진이 린린에게 갔다.

    린린은 마두들을 만나고 온 이후에 기운이 빠진 것처럼 자주 의기소침해져 있었다.

    아진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서 린린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야. 만두. 힘 좀 내. 그러고 있으니까 퉁퉁 불어 버린 만두 같잖아.”

    그런데도 린린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네가 이해해. 린린. 그 사람들. 너보다 더 힘들게 버티고 있는 것 같더라.”

    그 말에 린린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았어?”

    “당연하지. 내 눈에는 보이던데 너는 몰랐어? 강자존의 법칙이라는 거. 그게 사람들을 참 힘들게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말이야.”

    린린도 그때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천마의도, 경비 무사들도, 그리고 섬마대도.

    그들이 린린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을 하는 것도 어색했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거라는 것을 린린도 모르지 않았다.

    린린에게 의지한다면 역천마의의 권위가 흔들릴 수밖에 없고 신교는 그런 사람을 교주로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신교의 교주는 누구보다 강해야 했고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교주는 다른 이에게 자리를 뺏기는 것을 감내해야 했다.

    “역천마의가 그 자리를 지키려는 건 개인의 명예 때문이 아닐 거야. 나는 표정만 봐도 알겠던데. 그 사람들은 네 옆에 있을 때 가장 빛나고 활기가 넘쳤어. 원하는 대로 할 수만 있다면 교주니 뭐니 하는 건 다 때려치우고 네 곁으로 돌아오고 싶을걸?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신교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참는 것 같았어.”

    “그래. 그 말이 맞을 거야. 아는데…… 알긴 아는데…….”

    “그래. 나도 네가 무슨 마음인지 알아.”

    아진이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역천마의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교주가 되면 당장 본가가 목표가 될 거야. 그 사람은 신교도들 앞에서 자기가 너를 뛰어넘는다는 걸 보이고 싶을 테고 그걸 증명하려면 본가를 공격하는 게 가장 쉽겠지.”

    “그래. 역천마의도 그걸 걱정해서 그 자리를 자기 몸으로 막아서려고 버티는 걸 거야.”

    “그래. 그러니까 실망하거나 우울해하지 마. 그 사람들한테는 영원히 네가 지존일 거야. 너를 지존이라고 부르지 못해도. 너를 주군이라고 부르지 못해도.”

    린린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라버니도 아는 걸 나는 잊고 있었나 보네.”

    “야.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오라버니니까 안 거야. 네가 모른 건 당연한 거고. 지금까지도 항상 그래왔잖아. 안 그래?”

    “아닌 것 같은데?”

    아진은 억울해하는 것 같으면서도 린린의 표정이 다시 밝아진 것을 다행스러워했다.

    “린린. 마음이 불편하면 십만대산에 가 볼까? 내 생각에 그 사람들은 지금 너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안 좋을 것 같거든. 네 표정만 봐도 네가 어떤 기분인지 알았을 거야. 그리고 네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기분이 좋지 않을 거고.”

    “정말 그럴 수 있어. 오라버니? 지금 중요한 시기잖아. 이제 스승님도 안 계시고.”

    “그래. 맞아. 스승님이 안 계신 것도 맞고 중요한 시기인 것도 맞지. 그런데 소청이도 있고 위도 형님도 계셔. 산본 무관에는 무시무시한 무인들이 있고 표국에는 표사들이 있고. 걱정하지 마. 때가 되면 다들 맡은 자리에서 자기 소임을 다 할 거야. 모든 걸 걱정하면서는 아무것도 못 해.”

    아진이 말하자 린린이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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