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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5화 (285/470)
  • 제285화

    285화

    가능성은 있지만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

    말을 꺼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가 되어 버리는 것 같은 이야기를 황제가 너무 과감하게 해 버려서였다.

    “그렇지 않겠는가. 조장 두 명으로 무력대 하나를 괴멸했다. 그러면 그들은 크게 고무될 만도 하지 않은가. 나라면 다른 사람들도 계속 납치를 해서 난다 긴다 하는 조직들을 지워 버릴 것 같은데. 당분간은 신교가 목표가 될 수도 있기는 하겠지. 신교를 장악한 후에 일을 도모하면 여러모로 편리해질 테니까. 신교도들을 이용할 수도 있을 테고 그 자금력을 앞세우면 많은 일을 동시에 진행할 수도 있고.”

    역천마의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그들도 이미 그런 생각을 한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데 확실히 우리도 두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것 같고…… 하월. 어쩌면 좋을 것 같으냐.”

    “……!”

    하월은 그 자리에서 갑자기 자기 이름이 불린 것에 깜짝 놀랐다.

    그냥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 게 목표였는데 황상에 의해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냥 있으면 저절로 다른 이야기가 이어질 분위기가 아니라 반드시 대답을 듣고 다음으로 넘어갈 것 같았다.

    “……그건. 다른 사람의 모습을 한 사람이 그 사람과 얼마나 동일성을 갖추고 있는가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습니다. 폐하. 세세한 기억까지 전부 다 공유를 한다면 확인하는 게 어렵겠지만 그렇게까지 하는 건 고도의 술법이 필요할 거고 그렇게까지 복제를 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서…… 그런 경우에는 간단한 확인을 수시로 하기만 해도 어느 정도는 거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군. 어떻게 생각하나.”

    황제의 질문은 역천마의를 향했다.

    “이번에는 너무 늦게 그 일이 일어난 걸 알아차려서 알아낼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습니다. 폐하.”

    “린린, 너의 생각은 어떠냐? 그런 마공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나? 그 정도의 술법을 펼치려면 어느 정도의 무위에 이르러야 하지? 그걸 알 수 있으면 그걸 할 수 있는 사람이 압축되지 않나?”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알려지지 않은 무공이 훨씬 많고 지금도 어딘가의 은둔 고수가 전에는 없던 새로운 무공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조직을 갖추고 있다면 빠르게 전파를 할 수도 있어서 그런 마공이 얼마나 있는지, 어느 정도 무위가 필요한지 속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폐하.”

    “안심하고 싶었는데 그런 대답은 안 나올 것 같군.”

    북리의천은 점점 심각해졌다.

    그러나 하필 혼례식에서 그런 말을 들어 난감하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야기가 나와서, 그리고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그런 이야기가 오가서 더 다행이었던 것이다.

    “일단 그 이야기를 널리 전파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하월 공자의 말대로 그런 확인만 거쳐도 비극을 미리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북리의천이 말을 하다가 아진을 바라보았다.

    “무림맹에도 알려 줘야겠지?”

    “그래야 할 겁니다. 스승님.”

    “우리가 하는 말을 순순히 들으려고 하지는 않을 거야. 내부에 분열을 일으키려고 낸 소문이라고 할지도 모르지. 더군다나 그게.”

    북리의천은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게 마교에서 나온 소문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이 적절치 않아서 그런 거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북리의천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건지 대충 짐작을 했다.

    “다른 곳에서는 대비한다고 해도 무림맹에서는 그 말을 듣지 않으면 무림맹이야말로 취약해지겠습니다. 오히려 신교보다 무림맹의 피해가 더 크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진은 말을 해 놓고 그 결과를 상상했다.

    생각해 보니 그리 나쁠 것 같지도 않았다.

    늘 속만 썩이던 무림맹이 이참에 그런 식으로 해서 자멸해 버리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안다면 비난을 할 것 같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니 딱히 그럴 사람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심지어 린린은 자기가 생각했던 말을 그대로 육성으로 내뱉기도 했다.

    “기회가 좋네. 손 안 대고 코 푸는 거잖아. 사사건건 문제만 일으키는 무림맹이 이참에 그렇게 해서 전부 사라져 버리면 나쁠 게 전혀 없는데? 간만에 혈교에서 한 건 크게 하는 거잖아. 맞지?”

    심지어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는 것 같은 분위기라서 아진은 어색하게 웃고 린린의 입을 막았다.

    이 폭탄은 하여간 언제 터질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너무 낙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저는 하월 공자의 말이 맞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 작전을 수행하고 동시에 여러 사람을 납치해서 그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탈바꿈하려면 그 사람이 가진 기억 전부를 주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공과 근골까지 전부 바꾸는 건 거의 불가능할 거라는 겁니다.”

    “아아…….”

    여기저기에서 실마리가 보인다는 듯 작은 탄성이 나왔다.

    “정말 그렇겠습니다. 내공까지 전부 똑같이 복제한다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만약에 그걸 성공했다면 일을 이런 식으로 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강한 사람을 찾아서 그 사람을 복제하면 되겠지요.”

    내내 침묵하고 있던 뇌혈검이 말하자 역천마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두 손을 마주 잡은 채 말했다.

    “이 내용을 각자 선포하면 되는 거군. 방을 붙여서 모두가 알게 할까? 백만 황군을 동원해서 그렇게 한다면 무림맹에서도 반발을 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러면 무림맹을 자멸하게 할 기회가 사라질 텐데요. 폐하?”

    린린은 소신 있게 말했고 그 자리에는 일제히 침묵이 감돌았다.

    “구분 지어서 공고를 내리는 것이 더 복잡하다. 그러니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해라. 린린.”

    황제가 말을 하고 모두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냐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다른 의견은 없었다.

    기회가 좋았는데 아깝게 됐다는 얼굴을 한 린린을 빼고는.

    “가 봐야 하면 먼저 일어나도 좋다. 교주.”

    황제가 미리 알고 말을 해 주자 역천마의가 포권을 취했고 그 자리에 있던 마두들이 일제히 자리를 떠났다.

    “분위기가. 상당히 이상하기는 하군. 이제 새로운 교주가 생겼으니 그럴 수밖에 없기는 하겠지만.”

    황제의 말에 모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신교의 마두들에게 이제 더 이상 린린이 지존이 아니라는 사실이 왠지 아쉽고 허탈하게까지 느껴졌던 것이다.

    “그럼 이제 우리도 서두르자. 선 부정. 하월. 검신, 진심으로 혼인을 축하하네. 앞으로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해.”

    황제도 떠날 준비를 하면서 자리는 금방 줄어들었다.

    오랜만에 다시 피가 끓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진이는 기대가 되는 모양이구나.”

    북리의천의 말에 아진이 웃음을 지었다.

    “저는 이럴 때 살아 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 같습니다. 스승님.”

    “그래. 살아 있다고 느끼는 건 좋은 거지.”

    부부의 연을 맺은 첫날, 엄청난 임무를 떠안은 북리의천과 독고소영 역시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그들에게는 처음부터 비슷한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 * *

    무림맹의 구성은 그동안 여러 번의 변화를 겪었다.

    정의맹에 가면 뱀의 머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곳으로 갔다가 머리는커녕 중간도 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다시 무림맹으로 돌아온 문파도 적지 않았다.

    특히나 사파의 위세가 급격히 꺾이면서 정파가 세력을 유지하기가 비교적 쉬워져 정파를 표방하는 무가와 문파들이 전체적으로 늘어 있었다.

    새로 생겨난 곳들이 소속을 정하면서 무림맹으로 들어온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물이 너무 맑으면 물고기가 살기 어렵다는 것처럼 정의맹을 탈퇴하고 무림맹으로 돌아간 곳도 있었다.

    무림맹에서는 정당한 사업으로 이해되는 것도 정의맹에서는 비난을 받는 일이 일어나면서 거기에 반발한 이들이 특히 많았다.

    정의맹의 탈퇴 행렬은 산본의가에 도찰원이 생길 때 가속화 했는데 산본의가 사업장에 적용된 잣대가 곧 정의맹에도 적용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퍼지면서였다.

    “여러 문주님과 가주님들을 이렇게 청한 것은 이번에 내려온 황실 교지 때문입니다.”

    무림맹주 무적검은 좌중에 모인 사람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 교지가 사실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웬 환관이 만들어 퍼뜨린 거라는 말도 있고 말입니다.”

    그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던 말이었다.

    무림맹주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미리 정해진 대로 각자가 자기들이 맡은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기로 했는데, 거기에 맞춰 말이 빠르게 오갔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에 점차 선동되었다.

    “그러면 이 일을 어찌해야 하는 겁니까? 그래도 확인을 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 같은데요.”

    “나쁠 것이 없기는 왜 없습니까. 진짜인지 확인하겠다면서 이것저것 물어대면 나중에는 감정이 상할 수도 있는 것 아닙니까? 조직 내부에서 분열이 생기도록 일부러 조장하는 거라는 얘기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저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주의가 필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독자적으로 사고할 줄 아는 사람도 있었다.

    일인 문파로 내려오다가 몇 년 전부터 문도의 수를 늘리면서 무림맹에 들어온 독무문의 문주 패혈독 장태산이 그랬다.

    “위험 요소가 있는 일을 정치적인 음모로만 몰아가는 것은 아주 위험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조직의 수장으로서 맹주님은 마땅히 구성원의 안전을 책임지셔야 합니다. 지금처럼 위협적인 분위기를 만들어서 몰아갈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장태산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일순간 굳어졌다.

    갑자기 그에게 반박을 당한 맹주는 말할 것도 없었고 멍하니 앉아 있다가 선동당한 사람이 된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문주.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이오. 사태 파악이 전혀 안 되는 것 같구려!”

    맹주는 시뻘게진 얼굴을 하고 장태산에게 소리쳤다.

    독무문 문도의 수라고 해 봐야 고작 스무 명 남짓인 문파였다.

    그런 문파의 문주가 그나마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것은 현재 무림맹에 남아 있는 곳 중에 제독과 해독의 능력이 가장 뛰어나서였다.

    독을 이용해 공격할 수 있는 문파가 맹 내에 존재하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때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이 사실이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가진 해독 능력이었다.

    무공에 집중한 무인들은 독에 대한 두려움이 컸고 일단 전투에서 독이 사용되면 크게 위축되며 원래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기도 하는데 독무문이 함께 하고부터 그것이 어느 정도 상쇄되며 자신감도 얻었다.

    장태산의 독무문은 무림맹 내에 존재하는 위계질서를 가볍게 무시하면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은 가감 없이 하는 편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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