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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4화 (284/470)
  • 제284화

    284화

    “아우는 일을 너무 많이 하네.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는가. 물론 산본의가에 훌륭한 의원들이 많이 있고 아진이도 있지만 병이 들고 나면 너무 늦은 것이 아닌가. 그리고 아진이도 가끔은 고치지 못하는 병을 만나기도 하고 말이야.”

    “예. 형님.”

    가주는 북리의천이 곁에서 그런 말을 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산본의가의 가주로서 너무 막중한 책임감을 느끼며 부담에 짓눌려 있을 때마다 북리의천이 그동안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몰랐다.

    “아우.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정말 즐거웠네. 산본의가가 아니었으면 나는 아마 술통에 빠졌을 거야. 그래서 아우에게 정말 고맙네.”

    “형님. 왜 그렇게 말씀을 하십니까? 어딘가 떠나려는 분처럼요.”

    가주는 말을 해 놓고 설마 정말 북리의천이 세가로 돌아가려고 그러는 건가 하면서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오랫동안 너무 의지가 되었던 사람이라 이제 북리의천이 없는 삶을 생각하는 게 어려워져 버렸다.

    어른에게도 위로가 필요한 법이라는 것을 그는 북리의천이 온 이후에 알았고 그에게 의지하는 바가 컸기에 벌써 북리의천의 부재가 걱정되었다.

    “그래도 축하해 주면 좋겠네. 아우. 소영에게 말을 했어. 이제 우리도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고 살자고. 그러겠다고 하더군. 자기한테는 독고세가를 일으켜야 할 책임이 있다고 해서 내가 가주님에게 미리 받아 놨던 서찰을 보여 줬지.”

    북리의천이 즐거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소영이 이번에도 그런 말로 빠져나갈 것 같아서 내가 가주님에게 미리 부탁해 두었거든. 소영이 그럴 때를 대비해서 강하게 말을 좀 해 주시라고.”

    “가주님이 정말 써 주셨던가요?”

    “그랬지. 그걸 보고 소영도 더 이상 다른 말을 못 하더니 허락을 하더군.”

    “형님. 잘됐습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그런 이유로 돌아가신다고 하면 제가 어찌 말리겠습니까. 정말 축하드립니다. 형님.”

    그가 떠나려고 하는 이유가 혹시라도 의가에서 서운한 일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을까 하다가 서종욱은 마음이 놓이고 기뻐서 몇 번이나 북리의천을 축하해 주었다.

    북리의천은 그에게 말을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색해서 얼굴을 붉혔다.

    “남들 같으면 아이들이 벌써 장성했을 텐데 나는 이제 혼례를 올리고 이제 아이를 낳아서 키울 생각을 하니 갈 길이 까마득하네. 이제 낳는다고 해도 도종이의 아이보다 어리지 않은가.”

    “그게 뭐가 대수인가요. 형님? 평생을 잊을 수 없는 분을 만나고 여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서종욱은 진심으로 감격스러워서 웃음을 지우지 못했다.

    “아마도 우리는 거기에서 살게 될 거야. 이곳이 자주 그리울 거네. 자주 찾고 싶을 테지만 그렇게 하지 못할지도 몰라.”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형님. 제가 가겠습니다. 당연히 제가 가야지요.”

    “정말 그래 주겠나?”

    산본의가를 떠나는 것 때문에 서운한 것은 어쩌면 북리의천이 더할지도 몰랐다.

    항상 보던 아진과 소청도 볼 수 없게 될 것이고 산본의가 특유의 분위기를 더 이상 느낄 수도 없을 터였다.

    북리세가도 물론 좋은 곳이지만 산본의가가 오랫동안 그리울 거라는 생각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기는. 내 두 번째 고향 같은 곳이야. 이곳이 아니었으면 소영을 다시 만나는 건 상상도 못 했을 거야.”

    서종욱은 북리의천이 그렇게 말해 주는 것이 고마웠다.

    “혼례 날짜는 잡으셨습니까, 형님?”

    “벽 소저에게 부탁하려고 하네. 길일을 잡아 주겠지.”

    “받고 싶으신 선물이 있거든 말씀해 주십시오. 형님.”

    “내가 뭘 더 바라겠나. 그동안 받은 것만 해도 족하네. 그동안 너무 많이 신세를 졌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형님이 아니었으면 그동안 저희가 이렇게 평안한 삶을 살 수가 있었겠습니까. 오늘은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습니다. 정말 너무 즐겁습니다. 형님.”

    가주가 말을 하며 먼저 북리의천의 잔을 채워주었고 북리의천은 흔쾌히 술잔을 비웠다.

    그들이 술자리를 하는 동안, 독고소영 역시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나중에 얘기하면 한 사람 한 사람과 깊은 얘기를 하지 못하고 고마움을 전부 다 표하지 못할 것 같아서 특별히 고마웠던 사람들과 먼저 자리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가모는 독고소영이 말을 꺼냈을 때 이미 어느 정도 예측을 한 상태였다.

    “아주버님께서 청혼하신 거군요. 그렇지요?”

    가모가 먼저 활짝 웃으면서 그렇게 말을 하는 바람에 독고소영은 말도 하지 못한 채 얼굴을 붉히기만 했다.

    “세상에. 정말인가요? 축하드려요. 정말 축하드려요.”

    가모의 옆에서 그녀의 자매처럼 지내오고 있던 선화 부인은 눈물까지 흘리면서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주었다.

    “저희 소청이를 워낙 예뻐해 주셔서 대협께서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랐는데.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어요. 대협이 혼자 쓸쓸하게 계신 걸 볼 때마다 정말 속이 상했는데. 아니. 이럴 게 아니에요. 예복은 제가 지어 드릴게요. 날짜는 잡으셨어요? 언제로 하실 건가요?”

    선화 부인은 아직 세부적인 게 결정되지 않았다는 말에 다행이라고 하면서 예복으로 입고 싶은 원단만 미리 정해서 알려 달라며 서둘렀다.

    일단 그 이야기가 한 번 밖으로 나오자 산본의가 전체가 다 같이 들썩거렸다.

    혼례는 북리세가와 독고세가를 오가며 올릴 거라는 말에 산본의가의 수많은 일정이 조정되었다.

    가주의 의형이자 아진의 스승인 북리의천의 혼례식에 빠질 수는 없는 일이라며 의가의 수많은 사람이 일정을 비운 탓이었다.

    흥분된 분위기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파되는 것 같았고 북리의천이 마침내 사랑을 쟁취하는 것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서 자기들이 좋아하던 사람들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몇 명은 성공을 거두었고 몇 명은 고배를 마셔야 했지만 좌절은 길지 않은 듯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는 랑랑이랑 혼인할 거지?”

    수많은 도전자의 대열에는 랑랑도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소청은 얼굴이 새빨갛게 붉어진 채 우리는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우물거렸지만 랑랑은 그런 비겁한 변명은 집어치우라며 단칼에 그 거절을 거절해 버렸다.

    아무래도 소청은 그렇게 랑랑에게 코가 꿰일 운명인 듯했다.

    * * *

    북리의천의 혼례는 단순히 개인의 경사라는 의미만을 갖고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정의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고 그를 향한 존경의 의미로 규모를 불문하고 정의맹에 속한 모든 문파와 무가의 수장이 참석했다.

    황상이 직접 예식에 참석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래도 직접 오는 것은 어렵지 않겠냐면서 측근을 대신 보낼 가능성이 높이 점쳐졌다.

    그러나 황상은 그런 사람들의 예측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예식에 직접 참가했다.

    마지막까지 소식을 전해 듣지 못했던 아진은 하월과 선이남을 대동하고 나타난 황상을 보며 반가움을 감추지 못했다.

    “폐하. 스승님의 혼례에 직접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항주를 되찾아준 검신이 아닌가. 당연히 와야지.”

    황상의 참석으로 열기가 고조된 가운데 한 무리의 반가운 사람들이 그곳을 찾았다.

    “역천마의. 아니. 교주님이라고 해야 하겠군요.”

    정의맹의 수장 격인 북리의천의 혼례에 천마신교의 수뇌부가 대거 참석하면서 일순간 묘한 긴장감이 형성되었다.

    역천마의와 함께 온 마두들은 교주가 된 역천마의에게 지존에 대한 예를 갖추고 린린에게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을 이해하면서도 아진은 그럴 거면 왜 굳이 그곳에 온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연회가 시작된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 * *

    하객들을 위해 곳곳에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지만 천마신교에서 온 이들을 위해서는 더욱 특별한 곳이 마련되었다.

    처음에는 정의맹과 신교가 공공연히 회합하는 모습을 외부에 보이는 것이 부담스러울 거라는 배려로 이루어진 일이었지만 나중에는 그 자리에 황상까지 끼면서 꼭 필요한 일이 되었다.

    “짐이 있다고 불편해하지 말고 허심탄회하게들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여라. 이리 만난 것도 오랜만이 아니냐.”

    황상은 절대 불가능할 것을 주문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앉아 있는 그를 없는 것처럼 여기는 것은 절대로 쉽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천마의나 다른 마두들이 그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 자체가 그리 길지 않고, 이러다가는 따로 린린과 얘기를 나눌 기회도 없어질 것 같아서 결국 역천마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려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린린에게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주군이라거나 지존이라는 호칭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것은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도망친 자들이 혈교와 결탁했군요.”

    린린은 사람들의 앞에서 역천마의를 존중해 주기로 하고 존대했다.

    “예. 피해가 벌써 생기고 있습니다. 신교도들이 속속 실종되었다가 돌아오는데 그사이에 몸이 뒤바뀌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 아진은 조용히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마공에는 그런 식으로 까다로운 술법이 존재해서 머리가 아팠다.

    자기가 아는 사람이어서 평소처럼 대했는데 알고 보니 자기가 알던 사람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몸을 뺏긴 채 조종당한 거라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었다.

    아무리 때리고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여간해서 죽일 수 없는 강시보다도 오히려 그런 경우가 더 상대하기 까다로울 거라는 생각을 해 왔었는데 이야기는 운명처럼 그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일로 혈마 수라대가 괴멸했습니다. 조장 두 명이 실종됐다가 돌아왔는데 처음에는 그게 실종이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다시 돌아왔을 때 그들은 다른 사람으로 바뀌어 있었고 조원 모두를 공격한 후 부대주까지 죽이고 나중에는 대주와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대주도 그때 입은 부상으로 죽어서 정말 완전히…… 괴멸해 버렸습니다.”

    역천마의는 자신의 통렬한 패배를 시인하는 것이 괴로웠을 것이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 북리의천이 들어왔다.

    하객으로 참석한 마두들의 표정이 굳어 있는 것을 보고 뭔가 일이 생긴 것을 직감했던 것이다.

    그의 곁에는 독고소영도 함께 하고 있었다.

    아직 내공을 완전히 회복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자신의 몸에 있는 마공을 사용하는 방법도 터득하지 못해서 예전만 한 기량은 나오지 않았지만 오랜 실전 경험을 토대로 한 실력은 쓸만했다.

    “검신 대협. 오늘 같은 날 어두운 이야기를 가지고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역천마의의 말에 북리의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큰 적이 나타났으면 같이 힘을 합쳐서 제거해야지요. 이런 일을 혼자 해결했다고 혼자만 끙끙거리고 있었다면 결국 더 큰 화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북리의천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역천마의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도 결국은 그것 때문이었다.

    지금은 혈마 수라대가 괴멸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수법에 당하는 조직이 얼마나 많아질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서 성공을 거뒀으면 꼭 신교 내에서만 작전을 펼치려고 고집을 부릴 이유도 없겠군. 강호에 숨어들 수도 있고 권문세가와 어쩌면 황실까지도 노릴지 모르지.”

    황제의 말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서서히 경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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