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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3화 (283/470)

제283화

283화

“어째 하나같이 다들!”

황제는 화가 나서 서탁을 세게 쳤다.

저절로 내공이 실려 그 단단한 서탁에 손자국이 났다.

독고소영은 황제가 무공을 익혔는가 하면서 그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북리의천이 목숨을 건 것 같은 상황이었지만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기에 초조해하지도 않았다.

결단을 내릴 때 그것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사람은 그 뒤에 남게 되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점에서 그녀는 참 편한 삶을 살아 왔다.

그와 함께할 때는 항상 두 사람이 같이, 동시에 목숨을 걸었기에 남겨지는 사람을 걱정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독고소영은 자신이 할 수 없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기억을 잃어버린 그녀로서는 할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그녀는 그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동안 굳게 닫은 채 여러 명의 위사를 세워 지키던 문이 아무도 모르게 스르르 열려 버린 것처럼 그녀는 그 틈을 통해 자신의 기억을 엿보았다.

전투에 함께 나서고 서로의 등을 든든하게 지켜 주었던 두 사람.

그런데 그때는…….

그가 남겨졌다.

자신이 죽어 버려서.

벼락같이 찾아든 죽음에 속절없이 당해 버려서.

갑자기 그날의 모든 것이 전조도 없이 떠올랐다.

-의천. 변하지 마. 계속 싸워. 나는 이곳이 좋았어. 네가 지켜 줘.

-네가 없이 그게 무슨 소용이라고!! 너라면 그래? 너라면 그럴 수 있어?

-그래. 나라면 그래. 의천이 사랑했던 내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아니까. 포기하고 낙심하던 모습이 아니었잖아. 의천이 좋아하던 내 모습. 너를 이기던 나였잖아. 그렇지? 나는 너보다 더 강해. 의천. 이제 너는 가장 강해질 수 있어. 나를 베. 의천. 나는 숙주가 되고 싶지 않아.

북리의천은 눈물이 차오른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가 들고 있던 검을 잡았다.

거대한 강기가 휘몰아쳐 들어왔고 그녀의 몸이 수천, 수만 조각으로 터져 올랐다가 눈처럼 내렸다.

의천…….

북리의천…….

기억은 남의 삶을 엿보는 것처럼 서서히 열렸다.

한동안 독고소영은 그 상황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무엇이 어떻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리고 북리의천의 이야기였다.

‘의천.’

가슴에서 깊은 슬픔이 밀려들었다.

자신의 처지가 서러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북리의천이 그동안 겪었어야 할 아픔이 생생하게 떠올라서였다.

갑자기 기억을 되찾은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의 옆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슬픔과 미안함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황상과 북리의천이 대립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오직 북리의천만이 보였다.

“의천…….”

그녀는 자기가 그를 부르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소리는 선명하게 나왔고 북리의천은 그녀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이보다 더한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그 목소리를 놓칠 리는 없었다.

그가 그녀를 돌아보았고 황제도 독고소영을 바라보았다.

독고소영이 북리의천의 손을 잡았다.

“소영…….”

북리의천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보며 뭔가 말을 하려 했다.

그러나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거였는지 정작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기억이, 기억이…… 나? 이제 내가 기억이 나? 이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거야? 그리고 네가 누구인지도?”

다급하게 묻는 북리의천의 눈에 습막이 맺혔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천…….”

어떤 대답도 그보다 확실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자신의 패배를 시인해야 했다.

이렇게 빠르게 투지가 사라지는 것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자신이 들은 모든 말이 옳다는 것을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혼자서만 아닌 것처럼, 모르는 것처럼 고집을 부린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린린을 태자비로 삼으려 한다고 해도 순순히 린린이 혼례를 올린다는 보장도 없고 저에게서 등을 돌린 아진을 상대할 자신도 없었다.

‘내가 뭔가에 씌었던 모양이군.’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태자비가 된 린린.

그 상상이 너무 유혹적이어서 순간적으로 미쳐 버렸던 모양이다.

시기적절하게도 태감이 들어와, 오찬이 준비되었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 들이도록 하여라.”

요리가 들어오는 동안 서로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침묵이 정당해져서 그나마 마음의 부담감이 덜했다.

“그런데 아진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검신은 정말 확신하느냐.”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폐하.”

북리의천은 황제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선 부정도 그렇더냐.”

“예. 폐하. 그건 아진이만 빼고 전부 다 알 것입니다.”

“짐도 몰랐다.”

선이남은 그 말에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들거라.”

그 후로 식사가 끝나도록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렇다면 응당 그 자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이 황상의 눈치를 보고 불안해해야 할 텐데 북리의천이나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 독고소영이 기억을 되찾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사실이 너무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빨리 그것을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소영.]

북리의천은 급하게 전음을 보내 보았지만 기억을 되찾았다고 해서 내공까지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아닌 듯했다.

[대협. 어찌 된 일입니까.]

북리의천이 듣고 싶었던 소영의 전음은 안 돌아오고 선이남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것으로도 기뻤다.

북리의천은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고 황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불편해하지도 않는군.”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야. 얼마나 기쁘겠는가. 그런데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이런 일까지 생기지 않았다면 짐은 조금 더 고집을 부렸을 거네. 그런데 어쩔 수가 없군. 검후가 일부러 기억을 잃은 척하고 있다가 이 자리에서 대협을 기억해 낸 것처럼 꾸미고 있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아진의 마음이 그렇다는 건 정말 확신…… 아니.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황제가 말을 하고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 시각, 아진은 황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른 채 린린과 툭탁거리고 있었다.

“야. 린린. 너는 그럼 마선이 하는 걸 하나도 못 하는 거야? 마선은 바람도 되고 흙도 됐다며. 너는 왜 그걸 하나도 못 해?”

“그게 돼서 뭐 하려고?”

린린을 좌절시키는 건 정말 어려웠지만.

“그래도 일단 천마면 역대 천마 중에 최고가 돼야 하는 거 아니야?”

아진은 굴하지 않고 다시 린린의 속을 긁어댔다.

“안 그래도 돼. 누가 알아준다고? 아니. 알아준다고 해도 아무 소용 없는 일이야.”

그러나 이 느긋한 전직 천마는 그런 말에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전부 말을 받아쳤다.

그저 아까부터 왜 이렇게 귀가 가려운 건지 그게 궁금할 뿐이었다.

* * *

산본의가의 사업장마다 한바탕 홍역을 앓았다.

가주가 직접 나서서 사업장들을 불시에 방문하고 거기에서 조금이라도 비리가 밝혀지면 현판을 부숴 버린다는 소문이 괴담처럼 퍼져나갔다.

다른 사업장도 문제였지만 의가 지부는 특히나 직격탄을 맞았다.

환자의 몸을 담보 삼아서 돈벌이에 급급했던 일부 지부는 그 일이 발각되고 가주의 화를 면치 못했다.

한 번에 전국에 퍼져 있는 모든 지부의 실태를 파악하는 것이 어려워서 제보를 받기로 하고 제보가 들어온 곳에는 향화문을 보내 그것이 사실인지 탐문하게 했는데 제보가 사실인 경우가 많았다.

그것이 사실로 밝혀지면 가주는 지부를 폐쇄하고 현청에 고발해 대가를 치르게 했다.

앞으로는 평생 의술을 하지 못하도록 두 손을 마비시키고 언어 기능을 상실시키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것을 보면서 표국과 전장도 각자 단속에 나섰고 그동안 조직적인 부패가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안 것이 다행이고 앞으로 일이 커지기 전에 미리 관리를 해 나가면 될 것입니다.”

크게 낙심한 가주를 도종과 아진이 열심히 위로했고 랑랑은 한동안 가주전에서 특별한 임무를 수행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녀를 보면 가주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지어진다는 것을 노린 거였는데 다행히 그것은 효과가 쏠쏠했다.

“하부지. 하부지가 힘이 없으면 랑랑이도 힘이가 없소요.”

평소에는 잘만 말을 하다가 할아버지 앞에서 혀짤배기소리를 하며 애교를 부리고 안겨들면 가주는 저절로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다 보면 세상에는 영원히 잊지 못할 일도, 영원히 용서하지 못할 일도 없게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 일은 향화문 산하에 각 사업장의 감찰 업무를 담당하는 도찰원을 두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각 사업장의 수장들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됐고 부정한 청탁을 대가로 뇌물을 받으면 이유를 불문하고 자리를 잃었다.

황상의 총애를 받는 산본의가의 사업장이라서 받는 일종의 역차별이라고 할 수도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혀를 내두르곤 했다.

나무는 고요하고자 하나 바람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은 적어도 산본의가에는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다.

* * *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던 산본의가에 훈풍이 불었다.

그리고 북리의천은 더 이상 발표를 늦출 수가 없게 되었다는 듯 가주에게 가장 먼저 그 이야기를 해 주었다.

“아우. 괜찮으면 나랑 술 한잔 함세나.”

북리의천의 말에 가주는 그동안 자신이 그에게 너무 소홀했다고 생각하면서 당장 응했다.

“그러시지요. 형님.”

“그동안 아우 눈치를 보느라고 내 목이 다 쪼그라들었다네.”

북리의천이 너스레를 떨자 가주는 즉각 죄책감을 느끼고 그에게 몇 번이나 사죄했다.

“정말 죄송했습니다. 형님.”

“자네가 나에게 사과할 일이 뭐가 있나. 나한테 화가 나거나 서운해서 그런 것도 아닐 텐데. 이번에 일을 처리하는 걸 보면서 나도 많이 배웠다네. 본가로 돌아가면 나도 가주님께 말해서 본가의 사업장도 돌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말이야. 우리 모습은 그대로인 것 같아도 외부의 시선이 바뀌면 우리가 달라 보이지 않겠는가.”

“그렇지요. 형님.”

“그래. 그러면 일이 끝나고 내 방으로 찾아와 주게.”

그때까지만 해도 가주는 북리의천이 북리세가로 돌아가겠다는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가주는 늦게까지 일을 하고 북리의천을 찾아갔다.

그나마 약속 때문에 도중에 도종에게 일을 맡겨서 그나마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이고 그렇지 않았다면 밤늦도록 일이 끝나지 않았을 터였다.

스스로 만든 일이라서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북리의천은 가주가 늦을 거라는 것을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던 것처럼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의 방에는 다른 사람이 없이 북리의천 혼자였다.

이미 술상을 봐 둔 상태였고 가주는 자리에 앉아서 먹기만 하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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