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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2화 (282/470)
  • 제282화

    282화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에게 해 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우선은 내공을 집중해 황성에 먼저 도착하는 것이 급하다고 생각했다.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이 이 순간을 진심으로 행복해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어떤 부족함도 없이 모든 것이 완벽하게 충족된 상태.

    지금의 그가 딱 그런 상태라는 게 저절로 느껴진다는 것도 희한한 일이었다.

    그가 말을 걸었다면 더 어색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서 나았다.

    황성에 도착할 때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독고소영은 북리의천과 한결 가까워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황궁의 문이 열려 있었고 북리의천은 문을 지키는 이들에게 나아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럴 필요도 없었다.

    혈천방과 비룡채에서 온 이들뿐만 아니라 산본문관의 수련생들, 향화문도까지 곳곳에 있다가 북리의천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대놓고 그를 반길 수 있는 사람은 드러내 놓고 반가워했고 신분을 감춘 채 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향화문 사람은 멀리서 반가운 마음을 삭였다.

    “대협. 여기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비룡채의 사람이었다가 황궁 수비를 맡게 된 파원호가 북리의천과 독고소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물었다.

    “황상 폐하를 뵈었으면 해서 왔다네.”

    “미리 말씀이 되어 있지 않다면…… 그래도 대협이라면 폐하께서 만나주려 하실지 모르는데…… 조금 있으면 조정회의가 시작될 것이고…….”

    그는 중얼거리면서 생각을 하더니 손뼉을 쳤다.

    “선 부정을 찾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대협. 제가 선 부정께 안내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이남이라면 황상을 측근에서 보필하고 있으니 약속이 되어 있지 않은 채 왔다고 해도 말을 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파원호가 머리를 쓰며 말했다.

    “그러면 되겠군. 신경 써 주어서 고맙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협께서 의가에 남아계시어 저희가 이곳에서 편히 일할 수 있는 것인데요.”

    그러면서 파원호는 독고소영을 자주 힐끔거렸다.

    그도 독고소영이 살아 있을 때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독고소영에 대한 소문은 통제가 되고 있었기에 향화문에서도 일부 수뇌부만 아는 실정이었다.

    그랬기에 파원호는 자기가 지금 누구를 보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까지 닮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하면서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귀신을 봤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그는 선이남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헤매고 다니다가 한참 만에 선이남을 찾아냈다.

    파원호가 선이남을 부르기 전에 선이남이 먼저 북리의천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검신 대협.”

    선이남은 혹시나 하면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천의…… 이야기를 듣고 오셨습니까?”

    그러던 선이남도 시선이 우연처럼 독고소영에게 이르자 커다란 혼란에 빠졌다.

    북리의천은 자랑스러운 표정이었고 선이남은 그럴 게 아니라 황상께 먼저 말씀을 드리고 오겠노라 말하며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라 하고 금세 사라졌다.

    독고소영은 기가 죽은 표정으로 주위를 조금씩 관찰하고 있었고 준비도 없이 너무 수수한 차림으로 온 것에 더욱 주눅이 드는 듯했다.

    파원호는 계속 북리의천의 옆에 있으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같이 듣고 싶었지만 자리를 오래 비울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결국 아쉬움을 달래며 자리로 돌아가고 얼마 안 되어 선이남이 돌아왔다.

    “폐하께서 어서 들라 하십니다. 곧 조정회의가 시작될 것인데 그 전에 먼저 보겠다 하십니다. 그런 후에 오찬을 함께 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독고소영은 황제가 북리의천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서 속으로 퍽 놀라고 있었다.

    산본의가의 명성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강호에서나 유명한 것 같던 북리의천을 대하는 태도까지 극진하다고 느껴져서였다.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의 표정을 보면서 흐뭇해졌고 선이남을 따라 들어갔다.

    황상은 조정회의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채 북리의천을 기다리고 있다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않고 다가왔다.

    선이남은 북리의천이 왔다는 소식만 전했고 아직 독고소영에 대해서는 얘기를 하지 못했는데 그 자신도 독고소영이 정확히 누구인지 알지 못해서였다.

    그 결과 독고소영은 선이남과 함께 밖에서 기다리도록 하고 혼자 들어온 북리의천은 마음이 급해졌다.

    “폐하. 소신은 혼자 오지 않았고 함께 온 사람이 있습니다.”

    “함께 온 이가 있다. 아진인가? 아진이라면 이런 절차를 따로 기다리지도 않을 텐데?”

    황상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말을 하며 누구냐고 묻자 북리의천이 벅찬 감격을 드러내며 말했다.

    “소영이옵니다. 폐하.”

    “소영…….”

    “예. 폐하. 제 정인인 독고소영입니다. 소영이 돌아왔습니다. 믿기 어려우실 거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만 소영이 맞는 것 같습니다.”

    “…….”

    황제는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북리의천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검신 대협.”

    황제는 죽은 연인을 잊지 못한 북리의천이 드디어 미쳐 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상대는 다른 이도 아닌 북리의천이었고 그가 하는 말이라면 일단 확인은 해 보겠다고 생각하며 그는 독고소영을 안으로 부르도록 명을 내렸다.

    선이남과 함께 들어온 독고소영은 어쩌다가 자기가 황상의 앞에까지 오게 된 건지 알지 못한 채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

    황상은 독고소영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가 보기에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았고 그곳의 모든 것을 낯설게 여기는 것 같았다.

    심지어 북리의천조차도 그녀를 완전히 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흐음…….”

    황상은 이번 조정회의가 기록적으로 빨리 끝나게 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게. 검신 대협. 금방 돌아올 것이네. 정말 금방 돌아올 것이네. 선 부정은 나를 따라오지 말고 대협과 함께 있거라. 짐이 없는 동안 부족한 것이 없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주도록 해.”

    “예. 폐하.”

    황상이 얼마나 서두르는지 겉으로 봐도 다 알 수 있었다.

    선이남은 황상이 나가자마자 북리의천에게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다.

    북리의천은 독고소영의 앞에서 그런 말을 직접 하는 것이 무엇하기는 했지만 그녀를 앞에 둔 채 전음만 나누는 것도 그래서 그냥 그동안 있었던 일을 선이남에게 알려 주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황제가 이각도 지나지 않아 조정회의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한 번 더 반복되었다.

    “그러면…… 검후이기는 한데 검후는 기억을 잃었다는 말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폐하. 현재로서는 그리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선이라…… 그자는 또 누구인가. 사도련주나 단리서언처럼 사특한 자는 아니었으면 좋겠군. 그래도 크게 빚을 진 것만큼은 사실이겠어.”

    황제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짐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편히 있거라. 검후. 나는 검후에 대해 많은 말을 들었지. 처음에는 빙소검후였고 사후에 검후라는 별호로 불렸다지. 아진이 사고에 대해 말을 할 때마다 늘 슬픔이 묻어나서 나도 검후를 생각할 때면 자연스럽게 슬퍼지더군.”

    독고소영은 이럴 때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는 걸까 하면서 난감한 표정이었다.

    황제는 정말 신기해서 독고소영하고만 얘기를 해도 한참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북리의천이 그곳에 온 이유를 먼저 듣고 싶어졌다.

    “검신 대협. 여기에 온 이유가 있겠지. 그 이야기를 먼저 듣도록 하겠네.”

    “예. 폐하. 소신이 감히 폐하께 드리고 싶은 청이 있어서 왔사옵니다.”

    “청이라. 그래. 그게 무엇인가.”

    “폐하. 태자 전하가 린린을 태자비로 원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뭐라…….”

    황제에게는 그 말이 금시초문이었고 황제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선이남에게 향했다.

    “선 부정. 선 부정은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느냐.”

    황제는 하월이 태자를 만나 나눈 이야기가 지난날에 보고한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북리의천이 갑자기 그곳에 온 것이 이해가 되었지만 모든 게 전부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습니다. 폐하. 소신이 북궁 태감에게 부탁했습니다.”

    “왜 그랬느냐.”

    “……그것은.”

    선이남은 이미 대답을 준비해 두고 있었지만 황제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당혹해하는 선이남을 대신해 북리의천이 나섰다.

    “폐하. 소신은 폐하께서 소신의 제자를 아껴 주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소신의 불민한 제자가 아직 제 감정을 알지 못한 채로 중요한 사람을 잃게 될 것을 걱정해서 폐하를 뵙기를 원하였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검신.”

    “린린을 태자비나 황자비로 삼지 말아 주시옵소서. 폐하. 두 아이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동기(同氣)로서 그런 것이 아니라 두 아이는 평생을 서로에게 의지해야 할 인연입니다.”

    “…….”

    황제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머릿속에 무수한 생각이 지나갔다.

    독고소영이 나타난 시기가 이렇게 절묘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의자에 기대앉은 채 헛웃음을 지었다.

    하월과 선이남이 태자의 말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북리의천이 어떤 마음으로 밤새 달려왔을지 알 것 같았다.

    태자 이야기를 듣자 생각지 않았던 욕심이 생긴 것은 사실이었다.

    “검신. 그런 말을 하면 짐이 어찌할 것 같으냐. 짐이 노여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더냐. 짐이 아진을 아낀다만 태자는 짐의 아들이니라.”

    “알고 있습니다. 폐하. 폐하께서 신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으실지도 모른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은 반드시 말씀을 드려야만 했습니다.”

    “목숨을 걸고라도 말이냐.”

    “물론입니다. 폐하.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시면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그리할 것입니다. 두 아이를 억지로 떼어 놓으신다면 그 아이들은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소신이 알고 있습니다. 소신은 이미 그 고통스러운 죽음을 전부 경험을 했기에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황제가 웃음을 터뜨렸다.

    북리의천이라니.

    하필 북리의천이라니.

    어떻게 이런 일이 다 일어난다는 말인가.

    왜 독고소영은 하필 이럴 때 나타났다는 말인가.

    황제의 사나운 시선이 선이남에게 향했다.

    “선 부정. 내가 너를 아꼈거늘 이리 나온다는 것이냐.”

    “어쩔 수 없었습니다. 폐하. 그러나 소신 역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아진이 폐하께 등을 돌려도 개의치 않으시겠는지요.”

    “린린을 태자비로 들인다면 그럴 거라는 것이냐. 린린이 인질이 되었는데 어찌 아진이 그럴 수가 있다는 것이냐.”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폐하.”

    그것은 아니었다.

    그냥 해 본 말이었다.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려고.

    그런데 겁을 먹고 잔뜩 머리를 조아려야 할 선이남이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황제를 가만히 바라보며 그렇게 물은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리 말하는 것이라면 더 이상 할 말도, 상종할 이유도 없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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