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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81화 (281/470)

제281화

281화

이런 말을 들으려고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좋건 싫건 산본의가와 접점이 있는 사람이라 서이린에 대해 아는 것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그 이야기를 들어 보자고 한 것인데 어째 영 이상했다.

“알겠네. 더 들을 이야기가 없을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게.”

태자는 이미 마음을 정해 놓은 후였고 자기가 듣고 싶은 이야기가 정해진 상태였기에 더 이상 하월의 이야기를 듣는 게 싫었다.

하월은 그러고 나서도 서이린에 대한 온갖 안 좋은 얘기를 했고 태자는 결국 자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 버렸다.

하월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궁으로 향했다.

황제를 찾아가기 전에 하월은 선이남을 먼저 찾아가서 그 일을 논의했다.

황제가 태자를 후계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태자의 생각을 지지하려고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이남은 설마하니 태자가 그를 부른 이유가 린린 때문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깜짝 놀라서 하월을 바라보았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입니까. 하월 공자? 폐하는 린린을 정말 아끼십니다. 어떻게든 인연을 맺고 싶으실 텐데 린린을 며느리로 삼을 수 있다면 폐하는 그 기회를 포기하지 않으실 겁니다. 태자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고 하더라도 한 번 그 생각을 하기 시작한 후에는…….”

“다른 황자 전하의 배필로 삼기로 마음을 먹으실 수도 있겠군요.”

하월이야말로 더 놀라며 말했다.

“이건…….”

선이남은 생각할 게 많아진 듯 손으로 이마를 짚고 얼굴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천과 얘기를 먼저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건 함부로 말할 문제가 아닐 것 같고 린린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야 할 것 같아요.”

“저도 같이 가도 되겠습니까?”

“예. 그러시지요.”

두 사람이 남이천의 처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일과를 마치고 제대로 침상에 퍼져 있었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방문을 받고 긴장을 하며 두 사람을 맞아들였다.

“연락도 없이 웬일입니까. 사형?”

“큰일 났네.”

선이남은 하월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남이천의 표정은 급속도로 변했다.

“아주 안 좋은데요?”

그러자 하월도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도 그렇고 아진이도 그렇고 두 사람이 아직 어려서 서로에 대한 감정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두 사람 사이에 그런 방해물이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남이천이 그렇게까지 말을 하자 하월은 자기가 생각한 게 옳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황상께서도 린린을 포기하기가 어려우실 것 같지 않은가. 태자비가 아니면 황자비로 삼아서라도 곁에 두고 싶으실 것 같은데.”

그러나 남이천은 조금 더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폐하께서 두 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시니 그렇지 말씀만 드린다면 욕심을 접으실 것 같습니다만. 폐하가 린린을 욕심내려고 하신다면 아진을 포기하셔야 한다는 말이 되는데 폐하가 아진을 포기하실 수 있을까요?”

남이천이 확고하게 말했지만 두 사람은 아직 불안했다.

“이건 형님이 옆에서 아주 잘 말씀을 드려야 합니다. 폐하께서 두 사람에게 직접 얘기를 들어 보겠다고 아진이와 린린을 불러 놓고 물어본다고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바보들이 뭐라고 할지.”

“아진이는 펄쩍 뛰겠지. 린린은 자기의 소중한 만두일 뿐이라고 할지도 몰라.”

선이남이 말하자 그 자리에 깊은 적막감이 감돌았다.

그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졌던 것이다.

“아진이는 정말 자기의 감정이 뭔지 모르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바보인 걸까요?”

“정말 바보일 가능성도 있어. 그럴 가능성이 아주 커.”

선이남은 지극히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린린이라도 나서서 솔직하게 말을 해 주면 좋을 텐데 린린은 자존심도 강하고 아직 어리기도 하죠.”

“폐하께서도 아실 수 있을 텐데. 우리가 아는 걸 폐하만 모르시지는 않을 텐데.”

그러자 남이천이 걱정스럽다는 듯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서로 정말 좋아하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시기를 놓쳤다가 영원히 겉돌기만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아아! 검신 대협이라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남이천의 말에 선이남이 손뼉을 쳤다.

아진의 스승이라는 자격도 그랬지만 북리의천은 정인과의 사별 때문에 그 일에 적합해 보였다.

괴질이 낫기 전에도 독고소영을 좋아했지만 자신의 병 때문에 고백도 하지 못하고 멀리서 서성이다 서로가 인생의 찬란한 시절을 흘려보내야 하지 않았던가.

“제가 산본에 가서 대협을 모셔올까요? 아니면 사형이 먼저 폐하께 말씀을 드려 보실래요? 일이 잘 안 됐을 때 대협을 모시고 와도 되는 걸까요?”

선이남은 쉽게 말을 하지 못했다.

선이남에게 있어 처자식을 제외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아낀다고 단언할 수 있는 아진과 린린의 일생일대에 관한 문제였다.

“다녀와라.”

남이천이 경공에 있어서만큼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그렇게 말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남이천이 사라지고 선이남과 하월은 아직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애쓰면서 그 자리에 서성거렸다.

“폐하를 뵙기는 해야 하는데…….”

하월이 말하자 선이남도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와 함께 계획을 세울 때는 좋았는데 폐하를 상대로 계획을 세우려고 하니 불편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오늘은 그냥…… 린린에 대한 얘기는 빼놓고 태자 전하와 나눴던 다른 이야기만 전해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래야겠지요? 나중에 아시게 되면 화를 내시겠지만 어쩔 수가 없겠습니다.”

그러면서도 하월은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동안 아진에게 졌던 빚을 이번 기회에 크게 갚은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 * *

북리의천은 다른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아진과 린린을 열정적으로 지지해 주었겠지만 소영을 다시 만난 지금은 다른 어느 때보다 그 마음이 더 했다.

남이천은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쉬지도 않고 극성으로 신법을 전개한 바람에 단전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그래서 북리의천을 만나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얼굴을 찡그리고 고통을 참아 냈다.

“여기에서 쉬다가 출발하게. 일찍 와 주어서 고맙네. 이 일은 내가 책임지고 황상을 설득하겠네. 태자 전하가 얄팍한 수를 쓰는군. 만약 태자 전하가 끝까지 이 일을 감행하려고 한다면 나는 태자 전하를 죽일 수도 있네.”

“…….”

남이천은 설마 그렇게까지? 라는 표정으로 북리의천을 보았는데 그라면 정말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게. 태자 전하가 우리 린린을 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게 어디 린린을 연모하는 감정에서 그런 것이겠는가? 린린은 태자 전하의 가문에 원수나 다름이 없네. 혼인이라는 족쇄로 묶어 놓고 우리 린린을 얼마나 괴롭힐지 뻔하네.”

향화문은 그 시점에 특별히 중요한 내용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급부상할 수 있는 인물들에 대한 동향도 파악해 두고 있었는데 북리의천이 들은 태자의 소문만 해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정확히 밝혀진 것은 아니지만 태자비의 죽음에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아진에게도 말을 해야겠지요. 대협?”

남이천이 말하자 잠시 생각에 잠긴 북리의천이 고개를 저었다.

“이번 일은 아진이 나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 그놈은 아직 자기 마음을 모르는 것 같아. 이럴 때는 괜히 그 자리에 있다가 말실수를 하느니 차라리 없는 게 나아.”

“린린도요. 대협?”

“당연하지 않은가. 아마…… 당연할걸?”

건 조금 자신이 없는 것 같았지만 북리의천은 자기가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 바로 움직이지 말고 휴식을 충분히 취하게.”

북리의천은 남이천에게 몇 번이나 당부하고 밖으로 나갔다.

가주에게 말할 시간도 없이 그것도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급히 신법을 전개하려던 북리의천은 어디선가 돌아오고 있는 소영을 발견했다.

“소……, 추 의원님.”

소영을 부르려다가 급하게 추 의원이라고 부르며 다가간 북리의천은 자기가 그러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저 너무나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아직 자기가 독고소영이라는 확신이 없었지만 그녀는 북리의천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행복감을 느꼈다.

북리의천 대협을 보면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 그녀였지만 사실 누구도 북리의천을 그녀처럼 좋아하지는 않았다.

“대협. 급히 나가시는 모양입니다.”

독고소영은 북리의천에게 마주 다가오며 말했고 북리의천은 그녀의 말대로 급히 나가야 함에도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그렇게 말을 걸고 다가오기 위해서 독고소영이 얼마나 용기를 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그 순간 북리의천의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독고소영에 대한 소식은 아직 황상도 듣지 못했을 것 같고 독고소영을 본다면 황상도 북리의천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 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추 의원님. 부탁을 드릴 게 있습니다. 혹시 들어줄 수 있겠습니까? 내 제자를 위한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그 말을 들은 독고소영은 절대로 그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서도진으로 인해서 완전히 삶이 바뀌었는데 그런 서도진을 위한 일이라면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게 뭔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기만 하면 뭐든 하고 싶습니다. 대협.”

“고맙습니다. 지금 곧바로 가야 할 곳이 있는데 함께 가 줄 수 있겠습니까?”

“네. 대협.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곧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이대로 가도 될 것 같습니다. 추 의원님.”

북리의천은 그렇게 말하고 함께 신법을 전개하려고 하다가 독고소영이 무공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참. 그렇지. 의원님. 제 등에 업히겠습니까? 지금부터 신법을 펼치려고 합니다.”

“네…….”

독고소영은 그에게 업혀서 가는 것이 영 어색할 것 같았다.

그러나 서도진에게 문제가 생긴 것 같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북리의천이 서두르는 것 같아서 마냥 머뭇거리기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독고소영이 그녀의 앞에서 자세를 낮춘 북리의천의 등에 업히자 그는 행복한 표정이 지어지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황도에 이르기까지 쉬지도 않고 신법을 펼쳤지만 그는 힘이 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황상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막상 닥치고 보면 할 말이 자연스럽게 생각날 거라고 편안하게 생각하는 북리의천이었다.

어둠은 두 사람의 어색한 마음을 숨겨 주었다.

북리의천은 등에서 전해지는 독고소영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독고소영의 내공이 기혈에 숨어 있다는 아진의 말은 사실인 듯했고 숨소리조차 전과 달라져 있었다.

그래도 북리의천은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독고소영이 할 수 없게 된 것은 자기가 몇 배로 채워 주면 되었다.

신법을 하지 못하면 지금처럼 이렇게 업고 다니면 되는 거고 검술을 잊었다면 기초적인 초식부터 전부 다 새롭게 가르쳐 주면 되는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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