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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79화 (279/470)
  • 제279화

    279화

    북리의천은 벌떡 일어나서 독고세가주가 누워 있는 방으로 찾아갔다.

    한동안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북리의천 때문에 쉴 수가 없게 되었지만 독고세가주도 크게 불만은 없었다.

    “가주님. 이번에는 반드시 혼인할 수 있도록 소영이를 설득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소영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그거야말로 정말 이해가 안 되네.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런 건지.”

    “그런데 그건 가주님에게 배운 건지도 모릅니다. 모두 소영이가 하자는 대로만 하시는 걸 보고 저도 당연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 않습니까.”

    “허허허허. 이 사람이 이제 별 트집을 다 잡는구만. 어쨌든 알았네. 그 일은 내가 반드시 매듭을 짓겠네. 고얀 놈 같으니. 이렇게 속을 썩이다니.”

    독고세가의 메마른 눈에 눈물이 맺혔지만 그것은 더 이상 슬픔으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럼 좀 더 쉬십시오. 가주님.”

    “아니네. 나도 소영이를 봐야겠네.”

    “그런데 소영이는 아직 자기가 소영이라는 사실을 모른다고 합니다.”

    북리의천의 설명을 들으면서 독고세가주는 조금 서운한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이런 일이…….”

    그는 번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 채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뇌었다.

    “그런데 가주님. 소영의 몸에 마기가 찼다고 합니다. 소영을 살려낸 사람이 신교의 인물이라서 그런 것 같다고 합니다.”

    “그게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독고세가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표정을 보고 북리의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몇 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그러다가 린린과 소청으로 인해 완전히 기류가 달라졌다.

    예전까지만 해도 마공을 익히거나 마공서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멸문의 화를 피하지 못할 큰 죄에 속했는데 그사이에 두 사람으로 인해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정파 무림의 안위를 위해 크게 공헌한 사람들을 두고 그들이 사용하는 것이 마공이라며 배척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독고세가주도 그 생각을 하는지 북리의천을 따라 웃었다.

    “의천. 고맙네. 정말 고맙네. 내 생각은 그렇군. 마선이라는 사람이 소영을 어떻게 찾아냈겠나. 아무 사념도 남기지 않은 채 소영이 그냥 죽어 버렸다면 소영이 어떻게 마선의 의지를 움직일 수 있었겠나. 자네를 향한 마음이 미련으로 남아 있어서 그 사념이 마선을 이끈 것이라고 생각하네. 우리 소영이를 지금까지 기다려 줘서 고맙네.”

    독고세가주가 나무껍질처럼 메마른 손으로 북리의천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북리의천은 다시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방을 나서면 감정을 제어해야 할 테니 그때까지는 속이 시원하게 울자고 생각하고 고여있던 눈물을 전부 다 쏟아 냈다.

    한참을 그렇게 울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이제 가시지요. 가주님.”

    “그래. 가세.”

    두 사람이 방으로 돌아갔을 때 소영은 그곳에 없었다.

    밖에 나가서 의가를 둘러보고 있을 거라는 아진의 말을 듣고 북리의천이 황급히 나가자 소영이 후원에 서 있었다.

    담장 밑에서 자라고 있는 사영초를 바라보면서.

    “의원…… 님.”

    북리의천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애쓰며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자 그녀가 돌아서며 그를 바라보았다.

    백율채가 그녀의 뒤에서 풍성하게 만개해 있었고 북리의천의 얼굴에도 그 꽃을 닮은 웃음이 지어졌다.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 벅찬 기쁨에 그의 마음은 끝도 모르게 고양되고 있었다.

    * * *

    동창의 분위기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동창 제독은 하월을 자주 불렀고 그에게 벅차다 싶을 정도로 많은 임무를 맡겼다.

    하월은 동창 제독이 시키는 모든 일을 맡아 했고 모든 것을 성공시켰다.

    동창 제독은 동창의 일을 황상에게 알게 하지 말라며 몇 번이나 하월에게 말했고 그것을 강제하기 위해 금제까지 가했다.

    동창의 다른 환관들에게도 금제가 가해져서 그들이 동창의 일을 외부에 발설하거나 동창을 배신하려고 하면 금제가 발동해서 죽게 된다고 했는데 일단 하월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었다.

    그것은 점혈과도 비슷해서 점혈을 짚은 사람의 내공이 상대보다 약하고 적으면 효과가 없었는데 하월의 내공은 동창 제독을 뛰어넘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동창 제독의 앞에서는 자신의 내공이 일갑자 정도인 것으로 해 두어서 동창 제독은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설마하니 하월이 내공의 정도를 자유자재로 숨길 수 있을 만큼 내공 고수라는 사실은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이제까지 하월은 몇 번이나 위험을 감수했다.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인 조직은 그가 어느 정도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인지 알고 싶어 했고 조직을 위해 목숨을 내걸 정도로 충성을 하기를 바랐다.

    목숨을 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하월은 이중의 첩자였는데 자신의 진심을 황상이 알고 있다는 것으로 족했다.

    하월이 점점 믿을만한 패로 확고하게 존재감을 나타내면서 황제는 자신이 꿈꿔 왔던 많은 개혁을 단행했다.

    동창은 황상이 자신들을 배척하는 것에 배신감을 느꼈고 본보기로 자신들의 이익에 해가 되는 요인(要人)을 죽였는데 그때마다 하월이 사용되었다.

    이미 하월에 의해 목숨을 잃은 요인의 수만 해도 스물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것은 중앙이나 지방 관료를 가리지 않았고 하월의 검에 피가 묻을수록 동창 제독의 신임은 더욱 두터워져 갔다.

    “짐은 그 말을 들으면서도 설마 그 일까지 성공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북성의 포정사를 죽이고 돌아온 하월을 맞이한 자리에서 황제가 한 말이었다.

    그 자리에는 선이남이 함께 기다리고 있다가 상처 입은 하월을 치료해 주었다.

    선이남은 황제의 말을 들으면서 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죽으면 안 될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황제를 찾아온 아진에게 하월이 던진 질문이었다.

    그런 하월에게 아진은 표정의 변화도 없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 명령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면 죽여야지요.

    -죽으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죽여야 하는 거라서 묻는 말이 아닙니까?

    -예. 그렇기는 하지만. 죽으면 안 된다니까요?

    강아지가 제 꼬리를 물고 뱅글뱅글 도는 것처럼 이상한 대화가 조금 더 이어졌다.

    아진은 지친다는 듯이 하월의 입을 다물게 해 놓고 말을 이었다.

    -죽이십시오. 그리고 살리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월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걸 할 수 있는 사람은 공자뿐입니다. 화타가 살아 돌아온다고 죽은 자를 다시 살리지는 못합니다.

    -귀식대법을 시키십시오.

    -…….

    귀식대법이 무엇이던가.

    호흡은 물론이고 심장의 박동까지 멈춰서 죽음을 완벽하게 가장해서 자신의 기척을 숨기는 무공이었고 아무나 쉽게 익힐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걸 시키라니.

    익히라고 해도 어려웠을 텐데 시키라는 말을 듣고 하월은 지금 자기가 이야기를 잘못 이해했나 했다.

    -제가 죽여야 할 사람들은 문관들일 것입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가 대부분이라는 얘기입니다.

    -격체전력을 사용하십시오.

    내공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에게 자신의 내공을 불어 넣어 주는 방법…….

    하월은 귀식대법과 격체전력을 같이 머리에 떠올리고 그것을 하는 상상을 했다.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가능해야 맞는 것인데 불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그 일을 이 인간이라면 해낼 것만 같았다.

    누구를 탓하랴.

    처음에 그 방법을 물은 것이 저인데.

    -나는 귀식대법을 하지 못합니다.

    -공자를 만든 게 나인데 내가 그걸 모를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진은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듯이 말했다.

    격체전력도 할 줄 모른다는 말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말은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월은 염마를 몇 번이나 볼 뻔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신없이 내공을 얻었다.

    이제 됐으니까 제발 넣어 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아진은 아끼지도 않고 내공을 때려 박아 주었다.

    도대체 이 많은 내공은 어디에서 주워 담은 건지 기가 찰 정도로 아진의 내공은 화수분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내공을 전해 주고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며 아낌없이 내공을 박아 넣은 후에 한 것은 귀식대법과 구명지로를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정도로 전수하는 거였다.

    그 일을 위해서는 선이남이 동원됐다.

    선이남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부패 정도가 심하지 않은 시신을 공수해 주었고 아진은 하월에게 사람의 내장이 어느 위치에 자리하는지 알려주며 중요한 기관을 피해 무기를 찔러넣는 방법을 숙련시켰다.

    쓸만한 무공을 보면 여전히 탐을 내는 황제도 그 옆에서 열심히 기웃거렸지만 귀식대법은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일찌감치 포기했다.

    그러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그때마다 깜찍한 허공섭물로 물건을 근처로 옮겨 주었다.

    연습할 때는 잘되는데 아진 앞에서 하려면 유독 긴장이 돼서 그런다는 황제는 허공섭물도 말끔하게 성공하지는 못하고 꼭 일 장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고 떨어뜨리는 바람에 사람이 꼭 허리를 구부려서 집어 들게 했다.

    그래도 그렇게 연습을 한 결과 하월은 내공을 갖지 않은 사람에게 격체전력으로 귀식대법을 하게 만들 수 있었고 겉으로 보기에는 죽은 게 확실해 보이지만 중요한 기관은 전혀 건드리지 않은 채 공격을 할 수 있게 됐다.

    그것이 그동안 하월이 해 온 암살 방법의 전말이었다.

    “그러면 포정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선이남이 하월의 상처를 소독하며 물었다.

    하월을 공격하는 사람들은 포정사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라 하월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상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포정사를 죽이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것처럼 하고 나머지 공격은 방어에만 치중을 하다 보니 크고 작은 부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향화문에서 안가(安家)를 내주었습니다. 당분간은 그곳에 있을 것입니다.”

    “이제 동창 제독은 하월 공자를 전혀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시신이 전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다면 모르지만 그게 밝혀지지만 않으면 안심해도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황상께서 미리 손을 써 놓으셨으니 들킬 염려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는 시신을 훔쳐 사특한 제물에 사용하거나 전염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이유를 들어 시신의 처리에는 다른 사람이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고 하월에게는 그들에게 시신의 인계를 요구할 수 있는 패를 내려 문제를 해결해 뒀다.

    “동창이 이렇게 건방지게 이를 드러냈으니 짐은 오히려 더 편해지는 것 같다. 그놈들을 언제 찍어 낼지는 적당히 기회를 노릴 것이다. 동창이 노릴 정도면 개혁에 도움이 되는 사람들이라고 봐도 되겠지. 인재를 발굴하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동창 제독이 짐의 노고를 줄여주려고 이리 애를 쓰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황제가 냉혹한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안가로 옮겨진 사람들은 뒤늦게 황상의 교지를 받고 그곳에서 황상의 개혁에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해 나갈 터였다.

    죽은 이후부터 오히려 더 어려운 시간이 닥치게 되는 상황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몇 개의 안가에서 학식 높은 사람들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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