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278화 (278/470)
  • 제278화

    278화

    간단하게 식사만 마치고 그들이 함께 그곳을 떠나 산본의가로 향했을 때 독고세가주는 아진에 대해 많은 것을 물었다.

    이제는 어딜 가나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는 특히나 아진의 무위가 이제 어느 정도인지 그것을 궁금해했다.

    북리의천은 오랜만에 나누는 독고세가주와의 대화가 싫지 않았다.

    그와 얘기를 하다 보면 소영이 떠올라 감정적으로 힘이 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만큼 견디기 어렵지도 않았다.

    “그런데 검신은 언제까지 혼자 살 생각인가? 그건 소영이도 바라지 않을 걸세.”

    “어쩔 수 없습니다. 그걸 바라지 않았다면 그렇게 허망하게 떠나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생각입니다.”

    북리의천이 웃음을 지으며 독고세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내심 그런 말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그대로 산본의가에 도착하게 될 줄 알았던 그들은 도중에 정의맹에 속한 다른 무가들이 연달아 공격을 당한 것을 알고 그곳에 들러 지원을 해 주고 뒷수습을 도와주느라 며칠을 지체했다.

    소청과 위도는 각자 수백 명 몫을 넉넉히 해냈고 사람들은 그들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기량도 대단한데 그런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산본의가는 얼마나 대단한 곳인가 하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검신. 산본의가는 이제 산본 서씨세가라고 이름을 바꿔야 하는 것이 아닌가?”

    독고세가주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북리의천이 웃었다.

    “저도 그 생각을 해 보지 않은 건 아닙니다. 어떤 무가보다도 많은 무인과 고수를 보유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산본의가가 의가일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 분명해 보여서 말을 할 수가 없더군요.”

    독고세가주는 자기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왜 아니겠는가.

    모든 무가를 압도하고 있지만 산본의가의 본신(本身)은 어디까지나 의가였다.

    북리의천이 십천과 비교를 불허하며 천외천이라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산본의가는 그런 식으로 존재감을 부각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무림맹이 단단히 일을 꾸민 듯하지만 그래도 무가들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아서 다행이었습니다.”

    “그것도 다 산본의가의 덕분이네. 정의맹 소속의 무가들에 미리 약재를 넉넉히 보내주지 않았는가. 솔직히 나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많이 아까웠다네. 그런 건 많이 친한 우리한테만 주고 다른 건 팔아서 이문이라도 남기지 그러나 하고 말이야.”

    독고세가주가 웃으며 말하자 북리의천도 그를 따라 웃었다.

    누군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이렇게 세세히 알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 흐뭇했다.

    “다 왔구만. 이렇게 오래 걸릴 줄 알았으면 옷이라도 몇 벌 가져오는 건데 오랜만에 찾은 곳에 너무 준비 없이 와 버렸어.”

    “이렇게 정정하신 모습으로 찾아오신 것만 해도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북리의천의 말에 독고세가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다.

    산본의가에 가까워질수록 자신도 모르는 웃음이 자꾸 지어졌다.

    반가운 얼굴들을 보게 될 거라는 기대감에 그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 말고도 그곳에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듯했다.

    북리의천 일행이 돌아온 것을 보고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반겼다.

    산본의가를 떠날 때는 워낙 급히 신법을 전개해서 갔기에 그들이 떠난 것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독고세가를 지원하러 간 사람들이 빨리 돌아오지 않자 속으로 걱정들이 많았다.

    “이제 오십니까. 어르신. 가주님은 먼저 돌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유난히 흥분한 얼굴로 떠들어대던 사람의 입을 옆 사람이 갑자기 틀어막고는 북리의천을 보며 웃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가주님이 기다리십니다.”

    북리의천은 무슨 일인가 하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들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다른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지나친 흥분감?

    모두가 너무 들떠 있었다.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리고 싶은데 그것을 억지로 참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북리의천은 그들이 왜 그러는 건가 하면서 위도와 소청을 보았다.

    그들이라면 혹시 아는 게 있을까 해서 그런 거였는데 그들 역시 아는 바가 없었다.

    서로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산본의가에 이르자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거리에서 만난 마을 사람들보다 쉰 배는 더 강하게 얼굴에 그런 표정을 지었다.

    반갑고, 할 말이 많은데 억지로 그 말을 참고 있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은 걸음을 서둘렀다.

    안으로 들어가서 가주를 만나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겠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안에 있다가 북리의천과 마주친 사람들의 표정은 그동안 만났던 이들의 얼굴과 미묘하게 달랐다.

    뭐라고 해야 할까.

    안타까움과 애잔함이 교차하는 것 같다고 하면 대충 비슷하려나?

    북리의천은 아무나 붙잡고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으면서 일단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가 없는 동안 의가를 비웠으니 간 일에 대해서 말을 하기도 해야 했고 가주가 무사한 것을 먼저 확인하고 싶기도 해서였다.

    북리의천이 가주전으로 향하는 월동문을 막 들어섰을 때 가모가 몇 사람과 함께 서 있었다.

    함께 있는 사람은 소청의 어머니인 선화 부인과 벽예월이어서 누구인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그들과 함께 낯선 여인이 서 있었지만 자기가 상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은 빠르게 가주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그의 시선이 천천히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

    사람의 육체라는 것은, 그리고 감정이라는 것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게 작용을 하는가.

    북리의천은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그때부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는 바람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주책맞게 이게 무슨 일이라는 말인가.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억지로 눈물을 참으려고 했다.

    슬플 일도 없고 갑자기 눈물을 쏟을 일도 없는데 왜 이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민망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빨리 눈물을 닦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려고 했다.

    밖에서 이렇게 황당한 모습을 보이고 낯을 붉히느니 빨리 가주전으로 가야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가주의 앞에서라면 민망하기는 해도 그나마 감수할 수는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러면서 걸음을 빠르게 옮겼는데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도 미지의 여인에게 향했다.

    그의 눈에서는 전보다 더 많은 눈물이 경쟁이라도 하듯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아. 이거 참.’

    생전 처음 보는 여인의 앞에서 정말 못 볼 꼴을 보이게 생겼다고 여기며 북리의천은 일부러 더 걸음을 서둘렀다.

    정말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의 발은 바닥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그 자리에 우뚝 멈춰 버렸다.

    억겁의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녀가 돌아섰다.

    북리의천과 마주 보는 자리에 서 있던 선화 부인이 그를 먼저 발견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 모습을 보고 여인이 고개를 돌린 것 같았다.

    북리의천은 서둘러 손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눈꼬리에 눈물을 매달고 있는 꼴 사나운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녀를 보고야 말았다.

    “……!”

    북리의천은.

    그 자리에서 실신해 버렸다.

    그보다는 더 좋은 재회를 기대하며 북리의천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라던 수많은 사람은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채 북리의천에게 달려왔다.

    “아주버님!”

    “대협!”

    수많은 사람의 목소리 속에 어느덧 가주의 목소리와 아진의 소리도 들려왔고 북리의천은 정신을 차렸다.

    생전 이런 일이 없다가 오늘은 왜 이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북리의천은 그 와중에도 눈으로 그녀를 찾았다.

    “소영…… 소영…….”

    마음으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는 이미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소영이, 소영일 수밖에 없는 그녀가 그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미안한 얼굴이었다.

    ‘소영이 아닌가? 소영이라고 하기에는 젊은데.’

    그러나 무공은 수많은 불가능한 것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것이라 그 정도의 문제는 별 것 아니게 느껴졌다.

    ‘환골탈태를 한 걸까?’

    그에게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가장 믿기가 쉬웠다.

    소영이 환골탈태를 한 채 돌아왔다고.

    죽었던 소영이 살아 돌아온 것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기는 했지만 제 앞에 서 있는 그녀의 모든 것이 속속들이 소영인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다.

    북리의천은 소영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얼굴로 짓는 표정, 몸짓, 동작.

    손가락 마디마디의 생김새까지도 전부 알았다.

    “스승님. 이제 정신이 드십니까?”

    “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거였다.

    아진이 그에게 마나를 불어 넣고 가주가 보살폈으니.

    북리의천은 소영을 바라보다 놀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주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자기가 그랬다면 독고세가주 역시 큰 충격에 빠졌을 거라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이 묻자 그 역시 쓰러진 채 회복 중이라고 했다.

    아진이 곧바로 독고세가주를 치료했지만 충격을 받은 정도가 훨씬 커서 일각 정도는 조용히 회복을 취해야 할 거라고 했다.

    북리의천은 독고세가주가 얼마나 놀랐을지 이해가 됐다.

    그러면서 눈앞의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았지만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북리의천은 그녀가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승님. 지부를 찾아갔다가 뵙게 되었습니다. 사고님이 맞는 것 같습니다. 다만 사고님은 지금 이전의 일을 기억하지 못하십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린린은 마선이라는 신교의 사람이 술법으로 살린 것이 아닌가 하고 있습니다.]

    [마선?]

    아진의 전음을 들으며 북리의천의 놀라워했다.

    그게 맞다면 마선은 그에게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예. 스승님. 사고님을 살리면서 마선의 마기가 사고님께 깃들었습니다. 제가 진맥을 해 보고 사고님의 기혈을 모두 확인했는데 사고님이 맞습니다.]

    북리의천의 눈시울이 순간적으로 다시 붉어졌다.

    [사고님도 어느 정도는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지만 너무 부담을 주는 것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스승님.]

    [나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더냐. 아진아.]

    [예. 스승님. 그래도 스승님에 대해 많은 걸 알고 계십니다. 사고님이 누구인지 말씀드렸더니 놀라셨습니다. 그러면서도 혹시라도 그게 사실이 아니면 누가 되지 않을까 하면서 걱정하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듣고는 북리의천이 웃음을 지었다.

    소영이라면 그럴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독고소영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북리의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의 그녀는 환자를 돌보는 의원의 표정이었지만 북리의천을 향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북리의천은 아진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것 같았다.

    서두르지 말고 사고가 준비되기를 기다려 달라는 듯했다.

    그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고통 속에서 버텨온 세월도 있었는데 이렇게 돌아오지 않았는가.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다.

    아니.

    북리의천은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절대 소영의 고집대로 휘둘리지 않고 반드시 혼인하자고 할 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