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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77화 (277/470)
  • 제277화

    277화

    “약속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절대, 잠시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으로 끝이라는 듯이 위도는 다시 신법을 전개해 나갔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북리의천은 요동치는 마음을 쉽게 진정시키지 못했다.

    ‘급하다고 서두르다가 사람들을 걱정하게 했구나. 이러다가 단전이 상하기라도 하면 어쩔 뻔했는가.’

    북리의천은 억지로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쉽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보다는 내공의 운용이 한결 쉬운 신법을 택해 다시 그들의 뒤를 따랐다.

    뒤를 따랐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의 모습이 워낙 앞서 나가고 보이지도 않아서 그 거리는 시간이 갈수록 멀어졌다.

    ‘죄송합니다. 가주님. 버텨 주십시오. 지금 저희가 가고 있습니다…….’

    북리의천은 애가 닳았다.

    북리세가에만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식을 좀 더 빨리 들을 수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나 북리세가에 있다면 단조로운 생활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았고, 수시로 많은 일이 생겨나고 뒷수습을 해야 하는 산본의가에 있는 것이 독고소영을 잊기에 좋아 그리했는데…….

    후회라는 것은 지독한 괴물이었다.

    어쩔 수 없다고, 이제는 그만 생각하자고 아무리 다짐하고 다짐해도 어느새 다시 그 생각을 하는 것을 보면.

    그래도 위도와 소청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아서 그는 어느새 평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 후부터 북리의천의 신형이 섬전처럼 날아갔다.

    * * *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부들부들 떨면서 검을 휘둘렀다.

    그 감정은 쉽게 말하기가 어려웠다.

    힘의 우위를 떠나서 그냥 슬펐다.

    자기들이 목표가 되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놈들은 잿빛 무복을 입고 복면을 했지만 그 아래에서 빛나는 눈은 알아볼 수가 있었다.

    무림맹을 탈퇴해 정의맹으로 들어온 문파의 고수들도 몇 명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문파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의맹에 반감을 갖고 북리의천과 서도진을 질시하는 자들일 터였다.

    후기지수들은 대부분이 그 자리에 끼어 있는 것 같았다.

    나이가 들면 마음이 닳고 닳아 어느 정도 유순해지고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도 한결 부드러워지지만 그 나이대의 사람들은 그것이 더 어렵기는 했다.

    승승장구하는 서도진을 보는 것이 화가 났을지도 몰랐다.

    그렇기로서니.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상대가 자기들이 되었다는 것이 서러웠다.

    북리의천과의 특별한 관계, 그리고 서도진의 사고가 있던 가문이라는 이유도 함께 작용했겠지만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취급을 받은 건가 하는 생각을 쉬이 지울 수가 없었다.

    “놈들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후환을 없애거라! 정의맹을 위해서도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이놈들을 놓치면 이놈들은 다시 속마음을 감춘 채 무림맹으로 돌아가 강호를 흔들어 댈 것이다. 차라리 잘 된 것이야! 얼굴을 마주 대고 있으면 죽이기도 어렵지 않으냐!!”

    태상가주가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그 말에 동화되어 빛살처럼 몸을 날렸다.

    복면을 하고 독고세가에 숨어든 무인들은 그들의 검이 원래 그렇게 날카롭고 단호했던가 하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그들이 여럿이 모여서 진을 형성하고 공격을 해 오면 원래보다 실력이 훨씬 더 높아졌다.

    이중, 삼중의 진을 만들고 공격을 하니 진 안에 갇힌 사람들은 쉽게 실력을 행사할 수가 없었고 내공의 수발조차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의 안과 밖에 있는 사람들의 차이가 뚜렷해지고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했다.

    ‘저게 어떻게 된 일인가. 저것은 외인에게는 전수하지 않던 검법이 아니던가.’

    침입자들이 놀라는 것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독고세가는 위기를 겪은 후, 그동안 적어도 가문의 방계는 되어야 전수 받을 수 있던 검법을 외인 출신의 세가 무인에게도 전수하고 깊이 있게 가르쳤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큰 난을 겪고도 끝까지 세가에 남아 있는 자들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어서였다.

    심지어 직계에게까지만 전수하던 검법 중 여러 가지도 방계는 물론 외인 출신의 무인에게도 전수가 되었고 그들 중 대성에 이른 이도 있었다.

    세가 내에서 절초를 대성하는 고수가 나오면 좋은 일이나 그러면서도 아무에게나 함부로 비급을 전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등을 돌렸을 때의 뒷감당을 할 수가 없어서라는 문제도 있었는데, 일단 독고세가는 그 문제만큼은 자유로운 편이었다.

    덕분에 절초를 대성한 고수들이 많았고 게다가 같은 검법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진을 만들었을 때 평소에 쉽게 펼치지 못하던 것들도 그 안에서 손쉽게 해내는 효과가 있었다.

    침입자들은 자기들이 독고세가를 너무 얕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침입자로부터 세가를 지킨다는 의미로 싸우는 대신 강호의 골칫덩어리를 이 기회에 확실하게 척살해서 정의맹에 후환을 남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싸웠다.

    “애송이 놈들이 본가의 무서움을 모른 채 덤빈 것이구나.”

    독고세가의 장로들은 노쇠한 몸을 이끌고 나와 독고세가의 최전선을 지키려 했고 한창의 고수들은 그 앞을 가로막으며 자기들이 대신하려 했다.

    “장로님들은 몸을 보중하십시오.”

    곳곳에서 검풍이 몰아쳤다.

    그러나 싸움이 꼭 독고세가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세가의 살림이 거덜 나고 전각이 부서질 수도 있어서였다.

    침입자들은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움직인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렇게 자꾸 밀려 나갔다.

    “불안해하지 말고 저놈들을 향해 너희의 검을 시험해 본다고 생각하여라. 뒤에는 우리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장로들의 말에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딱 그런 의미로 무림맹의 침입자들을 베어 나갔다.

    장로들은 자기들이 나서는 것보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며 진의 가장 바깥쪽에서 다시 진을 형성해 주었다.

    그때까지 만들어졌던 여러 개의 진이 가진 힘을 단번에 뛰어넘는 막강한 진이었다.

    그 안에서 독고세가의 무인들은 그동안 그렇게 오르고 싶어 했으면서도 절대로 이르지 못했던 상승의 절기들을 성공시켰다.

    그 안에 갇힌 이들이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피를 토하며 쓰러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것이 북리의천 일행이 독고세가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었다.

    시간이 가면서 달라진 것은 진이 점점 더 커졌다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진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에 대해서도 깨달았고 진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떻게 구성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지도 알아냈다.

    그날 습격을 받은 것은 꼭 나쁘다고 할 것만은 아니었다.

    함께 적을 무너뜨리는 동안 생겨난 마음이 있었다.

    세가는 반드시 자신들의 힘으로 지킬 거라는 강한 의지와 신념, 투지가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북리의천은 도중에 쉬었는데도 위도나 소청과 도착한 시간이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했을 때 싸움은 거의 소강상태였다.

    승산이 없다고 생각하고 기민하게 도주를 결심한 이들은 빠져나갔고 별 볼 일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버티다가 붙잡혔다.

    “가주님!”

    북리의천이 경내에 내려서며 다급한 소리로 외치자 정리를 하고 있던 독고세가주의 얼굴에 반가운 웃음이 지어졌다.

    “이 사람. 이제 이런 일이 생겨도 오지도 않는 모양이라고 막 욕을 하려던 참이었는데.”

    “가주님.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독고세가주가 웃으며 말을 했지만 북리의천은 먼저 그의 상태를 자신의 눈으로 살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물었다.

    눈으로는 그의 몸을 부지런히 훑었다.

    그리고 가주가 무사하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다른 이들을 마찬가지의 시선으로 살폈다.

    세가의 무인들은 북리의천이 찾아와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자기들을 바라보는 그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소식을 듣고 나서 늦을까 봐 초조했을 마음이 생각나 그들은 북리의천을 안타깝게 생각하기까지 했다.

    “이 멍청한 놈들이 감히 본가를 어찌 보고. 본가는 전보다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네. 오히려 더 강해졌지.”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산본의가의 성장세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가문 중 한 곳이 독고세가였다.

    성과 성을 오가며 표물을 운반하는 사업 같은 것은 혼자만의 힘으로 하기에는 벅차고 전국 규모의 세력을 가진 커다란 문파의 힘이 필요했는데 그때마다 산본의가는 북리세가와 독고세가의 도움을 받아왔다.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서로에게 이익이 되었고 그로 인해 독고세가는 과거보다 훨씬 세가 불어나 있었다.

    아진이 영초를 구하고 제선문주가 영약을 만들 때마다 그것이 독고세가에도 많은 양이 할당되어서 세가 무인들의 성장은 다른 무가와 비할 바가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크게 다친 사람이 없이 모두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의 주위로 모여든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훈훈한 감정을 느꼈다.

    천하의 검신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했다는 것이 좋았던 것이다.

    자기 일처럼 한달음에 달려온 북리의천을 보면서 고마움을 느끼며 사람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스스로 치하하느라 바빴다.

    북리의천은 자기가 익숙한 곳에 와서 반가운 사람들의 사이에 앉아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음을 감사히 여기며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놈들이 쳐들어 왔을 때는 화가 났는데 자네가 온 걸 보니 꼭 못되게 굴 것만도 아니었나 보군. 이렇게 보니 좋네. 검신.”

    독고세가주의 말에 북리의천은 미안해져서 고개를 숙였다.

    진작 찾아오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망설여지는 마음이 더 커서 지금까지 미루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독고세가라고 그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소영이 있을 때는 경첩이 헐거워지도록 드나들더니 소영이 죽은 후 오지 못하는 북리의천을 보면서 그가 아직 그녀를 잊지 못해 그런 거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술이라도 한잔 하고 가야지. 이대로는 못 보내네.”

    “예. 가주님.”

    북리의천도 밝은 얼굴로 말했다.

    소청과 위도는 그런 북리의천의 곁에 그의 수신호위처럼 서 있었다.

    독고세가주는 말로만 듣던 위도에 대해서도 궁금해했고 소청이 어느새 그렇게 듬직하게 자라서 북리의천의 곁을 지켜 주었는지 신기해했다.

    그는 싸움이 다 끝나지 않은 와중에도 북리의천 일행이 그곳에 도착한 순서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북리의천이 가장 늦은 것을 보고 그의 내공에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가 했는데 그들 일행 사이에 느껴지는 분위기를 통해 그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을 했다.

    곁에 소청이 없었다면 북리의천이 여기까지 오는 동안 위험할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독고세가주는 소청을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그곳에서의 분위기가 무르익었지만 북리의천은 이제 산본의가가 걱정되었다.

    아진과 린린이 모두 자리를 비운 상태라 이곳의 일이 해결되면 자신은 그곳에 있는 게 좋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가주님.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지금 산본의가가 비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렇군. 쉬 마려운 강아지 같다 했더니 그래서 그랬나 봐. 그런 이유라는데 내가 어찌 붙잡겠나.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함께 갔으면 하네. 가모님과도 의논을 할 것이 있고 전부터 한 번 갈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좋군.”

    무림맹의 습격을 받고 그 뒤처리가 제대로 되지도 않은 상태였지만 독고세가는 걱정 없다는 듯이 말했다.

    세가주를 대신해 줄 사람들의 충성은 견고했고 그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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