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6화
276화
이런 곳에도 침을 놓나?
나연규는 그때까지만 해도 그것을 기행이라고만 생각했을 뿐 위기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러나 도종과 아진은 달랐다.
서로의 시선이 오가고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사람을 살리는 방법을 아는 이는 필연적으로 죽이는 방법에도 능통하게 된다.
아진은 북리세가에 갔을 때 그곳의 의원인 정진환이 자신을 죽이려 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 서종욱은 나연규를 죽이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앞으로 영원히 손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키려 하고 있었다.
나연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서종욱을 바라보았다.
손을 움직이지 못하는 의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서종욱은 나연규의 얼굴에도 시침을 시작했다.
“스승…… 님.”
나연규는 그제야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의 서종욱은 그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다.
서종욱이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념에 반하는 일을 강요당했을 때 서종욱은 크게 분노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모습은 그때와도 달랐다.
나연규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서종욱에게서 벗어나야 할 것 같았는데 몸이 꼼짝을 하지 않았다.
고수들이 피운다는 무형지기에 갇히면 이런 기분이 들까.
그는 자기가 왜 이러는 건지 알지 못한 채 서종욱의 화가 가라앉기만을, 그리고 서종욱이 자비를 베풀기만을 바라고 기다렸다.
“…….”
그는 다시 스승을 부르려 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지만 긴장한 탓에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설마하니 영영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윽고 서종욱이 그를 놔 주었다.
“내가 너에게 너무 큰 것을 맡겼다. 너는 사람의 목숨을 맡을 수 있는 아이가 아닌데 내가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래서 너에게 가르쳤던 것을 거두었다. 너는 앞으로 두 손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며 말을 하지도 못할 것이다. 네가 저지른 일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이 나였다면 너를 용서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허나 너는 고의로 환자들을 상하게 하였다.”
그 부분에 이르렀을 때는 감정이 격해진 듯 잠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입을 열어 말을 이어 나갔다.
“네 죄를 씻으라 하지도 않을 것이고 용서를 구하라 하지도 않을 것이다. 너는 독을 품은 독사와도 같아서 세상을 향해 오직 독만을 뿜어낼 뿐이다.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증명하려 한다 해도 소용이 없다. 나는 이제 더 이상 네가 어떤 사람인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진은 그 말을 듣고 소름이 끼쳤다.
그가 관심을 거둔다는 것을 상상하는 순간 등골이 오싹해지고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
도종과 린린을 힐끔 바라보자 그들도 같은 상상을 한 것 같았다.
“나는 차라리 네가 그냥 죽었으면 좋겠구나. 환자를 돈벌이 수단으로 생각하고 환자의 건강과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던 네놈이 내 제자라는 사실이 소스라치게 싫다. 네놈과의 인연이 끊어지면 좋겠고 네놈을 알게 된 순간으로 돌아가 너를 모른 척 지나쳐 버렸으면 좋겠구나.”
아진의 이마에서는 실제로 땀이 흘렀다.
서종욱이 누군가를 향해 그렇게까지 적개심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 대상이 자기였다면 정말 죽고 싶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이라도 나를 생각한다면 자결을 하여라. 그렇더라도 네 명복을 빌어 주지는 못하겠다만 말이다.”
그 자리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본의가 지부의 수많은 의원과 의생, 의녀들이 있었고 현청에서 나온 이들 중에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남아 있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서종욱이 나연규의 존재에 치를 떠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고 나연규가 저지른 짓이 얼마나 큰 잘못이었는지를 깨달았다.
나연규는 서종욱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려고 했다.
그러나 짐승 같은 울부짖음만이 입안에서 빠져나왔다.
절대의 고수가 와서 잔혹한 검풍을 날려 그 자리를 모조리 초토화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두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산본의가의 가주에 대해 그동안 들어왔던 것이 있어서 그런지 더더욱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현판을 부수어라. 아진아.”
그곳을 떠나면서 서종욱이 내린 마지막 명령이었다.
“예. 가주님.”
사람들의 앞이라 격식을 차려 말하고 아진이 검을 들었다.
날카로운 검강이 그의 검을 떨치고 달려나갔고 현판이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산본의가 천중지부]
더 이상 가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가주의 믿음을 배반한 제자의 처절한 말로였다.
* * *
향화문주가 직접 북리의천을 찾아온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더군다나 그렇게 창백한 얼굴을 하고 달려올 일은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산본의가의 사정이 달라졌고 많은 일이 사전에 통제되고 있었기에 그렇게 놀랄 일이 없었던 것이다.
“문주. 무슨 일인가.”
북리의천은 짱돌이 찾아온 사람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더욱 이상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숱한 상상을 하는 것보다 차라리 짱돌에게서 얘기를 듣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빨리 말을 해 보게.”
“대협. 독고세가에 변고가 생겼습니다. 빨리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게…… 그게 무슨 일인가.”
북리의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이미 신법을 전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고 짱돌이 북리의천을 찾아온 것을 알고서 그 자리에 와 있던 소청은 흑주를 챙겼다.
그러다가 소청은 독고세가라는 말을 듣고 쌩하니 달려가서 위도까지 데리고 왔다.
독고세가에 문제가 생겼다면 절대로 간단한 일이 아닐 것이고 그런 일은 사조와 자신만으로는 해결이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무림맹 놈들이 미친 것이 틀림없습니다. 항주의 왜구 토벌 이후로 정의맹의 세력이 커지고 수많은 무가와 문파들이 무림맹을 탈퇴하니까 놈들이 독고세가를 본보기를 삼기로 한 것 같습니다. 무림맹을 탈퇴하면 무슨 일이 생기는지 말입니다.”
“미친놈들이 아닌가. 그런 일에 왜 독고세가를 건드린다는 말이야! 독고세가가 무림맹에 있다가 탈퇴한 것도 아니고.”
오래전에는 물론 그렇게 했지만 정의맹이 만들어진 순간부터 그랬던 것이기에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 문제를 따질 것은 아니었다.
짱돌은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북리의천이 먼저 그 이유를 깨달았다.
정의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인 북리의천의 아픈 손가락.
그 독고세가를 치는 것으로 북리의천과 정의맹 전체에 선전포고를 하려 한 것 같았다.
북리의천은 더 이상 짱돌의 말을 듣지 않고 신법을 전개했다.
위도도 독고세가와 북리의천이 어떤 관계인지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기에 북리의천의 분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소청은 무림맹에서 사용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람이 되어서 어떻게 그런 부분을 공격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해서 분노가 참아지질 않았다.
‘그래. 차라리 잘된 것이다. 벌써 없애 버렸어야 할 무림맹을 너무 오래 놔둔 감이 있었어. 지금은 기회가 좋으니 이참에 놈들을 전부 다 없애 버릴 것이다.’
북리의천은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서 제발 자신이 늦지 않았기만을 바랐다.
사파에서는 아직 사도련을 대체할 조직을 만들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시도도 하지 못했다.
나라에서 나서서 눈에 불을 켜고 조짐이 보이기만 해도 미리 와해시켜 버리니 백만 황군을 상대할 생각이 아니라면 그런 시도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았을 터였다.
역천마의가 천마로 있는 천마신교는 정파와 서로 소가 닭 보듯 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의맹과 무림맹 간에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때를 노려 천마신교가 중원에 쳐들어올 가능성은 적었다.
“모두 조심해야 한다. 지금까지 몸을 낮추고 있다가 이제 와서 그리 나섰다는 것은 어느 정도 방법을 찾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야. 어제 나보다 하수였던 자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는 곳이 중원이라는 것을 잊지 말거라. 영약과 기연으로 내공을 높이고 깨달음을 얻으면 얼마든지 입장이 바뀌는 일이 아니더냐.”
북리의천은 따라오는 소청과 위도에게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가는 동안 그는 이번 싸움이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감정적으로 힘이 들어서였다.
항주에서 왜구를 토벌하는 것도 어렵다면 어려웠지만 항주는 그와 큰 접점이 없었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지금의 독고세가에 느끼는 감정을 갖지는 않았다.
그러나 독고세가는 달랐다.
같은 아픔을 공유하는 그들이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분노가 거세지고 감정이 깊어졌던 것이다.
‘죽일 놈들. 죽일 놈들! 거기가 어디라고.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와!!’
독고소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장 컸다.
독고세가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도 지금껏 아무것도 모른 채 산본의가에만 있었다는 것을 안다면 그녀가 얼마나 서운해할지.
북리의천은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소영. 미안하다. 내가 미리 살폈어야 했다.’
북리의천은 그 죄책감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소청은 그런 북리의천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사조의 감정이 심한 기복을 보인다는 것을 그는 일찌감치 깨달았다.
고도의 신법을 전개하면서도 요동이 없는 그였다.
내공의 소모도 일정하고 크지 않았다.
다른 모든 것이 뛰어났지만 내공의 운용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의 불허하는 정도였던 사조가 지금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소청은 다른 어느 때보다 긴장한 채 북리의천을 바짝 뒤따랐다.
오늘은 어쩌면 길보다 흉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북리의천을 따라가며 소청은 수시로 그를 살폈다.
위도 역시 북리의천에게서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에게 조금이라도 말을 걸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하고 있었다.
하지만 북리의천은 쉬지 않았다.
쉴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단전이 붕붕거리며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지만 자기가 쉬는 동안 독고세가의 무인들이 지원을 기다리다가 밀리는 모습이 상상돼서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만 버티면, 아주 조금만 더 참고 버티면 지원이 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리는 마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가주님. 기다려 주십시오. 모두들…….’
북리의천의 단전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졌다.
내공의 운용이 잘못된 결과였다.
그런데도 계속 이동을 강행하며 내공을 끌어올린 탓이었다.
그때 갑자기 위도가 뒤에서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북리의천은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의미였는데 위도는 말을 하는 대신 멈춰섰다.
같이 멈추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위도가 발걸음을 멈춰버리자 어쩔 수가 없었다.
“왜 그러는가. 위도.”
“대협. 잠시만 쉬었다가 오십시오. 저와 소청을 믿으십시오. 저희가 쉬지 않고 가겠습니다. 지금처럼 가신다면 대협께서는 그곳에서도 위험하실 것입니다. 대협께서 상하시는 걸 누가 바라겠습니까?”
북리의천은 마치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소청은 두 사람의 사이를 그냥 지나갔다.
자신이라도 먼저 도착하겠다고 생각하는 듯이.
북리의천은 소청의 안정된 신법을 보면서 자신이 평정을 잃었고 그 결과 평소와 같은 내공 운용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더라도 평정심을 되찾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은 강행하면 강행할수록 대협의 몸이 상하게 될 것 같아 걱정됩니다.”
위도는 평소 자신의 모습 그대로 투박하게 말했지만 북리의천에게는 그의 진심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