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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73화 (273/470)

제273화

273화

이제부터 아진은 그녀에게 독고소영의 진실을 알려 주기로 했고 그것이 그녀에게 큰 충격을 안길 수도 있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쓰러질 때를 대비해 미리 마나를 불어넣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진에게서 따뜻한 마나의 기운이 흘러 들어가는 동안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

아진은 그녀의 웃음이 이해되지 않았다.

“의원님?”

아진이 부르자 그녀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왜 웃냐는 것 같은 표정을 보면서 그녀 자신도 같은 의문을 품었다.

그러게. 내가 왜 웃었을까.

그러면서도 아진에게서 들어온 마나의 기운에 기분이 좋아졌고 그것 때문에 아주 익숙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전혀 알지 못하는 극한의 즐거움이 농축된 것 같았고 벽 너머에 자신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쌓여 있는 것 같다는…….

그런 이해되지 않는 생각을 했다.

혼란스러웠지만 불안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아진을 믿을 수 있었다.

아진만 있었다면 어땠을지 모르는데 의원의 길에 들어선 이후 늘 존경해왔던 산본의가의 가주까지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에 더욱 의지가 되고 마음이 평화로웠다.

“이게 뭔가요. 공자?”

“마나입니다. 의원님.”

“마나요? 내공이 아니고요?”

“예. 저는 마나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한 비밀이 있었고 수많은 상처로 사람들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처음으로 만나서 마음을 열었던 분들이 제 부모님과 제 형님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을 만났지요. 거기에 한 분이 더 계십니다. 사고님요.”

아진의 감정이 다시 격해졌고 목소리가 떨렸다.

아진에 대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들었던 그녀라서 그 상황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

사도련을 토벌하고 천마신교에 가서도 수많은 고수를 상대해 일격에 쓰러뜨렸다는 그가 아니던가.

황상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무수한 사람들의 질시를 동시에 받지만 그들을 향해 늘 고고하고 거만한 표정으로 압도해 버린다는 서도진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런 표정을 하고 울먹이는 모습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 서도진의 말을 믿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이야기 중 그녀가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어질지는 알 것 같았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는 자기가 사고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서도진의 사고 독고소영.

검신과 아진의 절대적인 사랑과 추앙을 받았던 여협.

종국에 이르러서는 당당히 검후의 호칭을 차지했던 여인.

산본의가의 가주와 검신이 의형제를 맺었으니 가주는 그녀를 형수라고 불렀을 것이다.

만약 그녀 자신이 독고소영이 맞기만 하다면 생각지도 못했던, 상상해본 적도 없던 관계들이 한꺼번에 생겨나고 그녀에게 수많은 칭호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그녀의 몫이 아니었다.

추현화는 그렇게 생각했다.

거짓으로라도 자기가 맞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무리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아닌 것은 아닌 거였다.

사랑하던 정인을 잃고 오랫동안 깊은 슬픔에 잠겨 있다가 그 수렁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사람에게 다시 상처를 안길 수는 없었다.

그것은 차마 못 할 짓이었다.

“그분이 참 부럽군요. 그리고 내가 그분이었으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하지만 나는 그분이 아닙니다. 공자. 미안해요. 아니. 미안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겠네요. 정말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나인 것 같거든요.”

그녀가 희미하게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손을 뻗어 욕심을 내기만 하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하려 하자 안타까웠던 것이다.

“의원님. 혹시 산본의가에 저희와 함께 가 주실 수는 없으시겠는지요? 부탁드립니다. 그곳에서 의술을 펼쳐 주십시오. 의원이 되기로 하셨을 때 품은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눈물을 흘리면서 목소리가 흔들리더니 그사이에 무언가 단단히 결심한 것 같았다.

“…….”

그녀는 아진이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건지 알지 못했다.

그러면서 가주를 바라보았다.

의원이 되어서 산본의가의 의원이 된다는 것은 누구나 꿈꾸는 일일 터였다.

그곳에서 직접 가주에게 여러 의술을 배우는 것을 상상하자 꿈만 같았다.

서종욱은 기꺼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의원님. 저희에게는 의원님과 같은 분들이 필요합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저희는 지부의 관리를 강화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제자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고 각지로 보내서 지부를 내고 의술을 펼치게 하는 것으로 가르침이 끝났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제 제자들이 잘못하는 것을 알려 주고 꾸짖어 주십시오.”

아진이 놀란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언제 이렇게 순발력이 늘었다는 것인지.

자기가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였는데 도종이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아버지도 이제 네가 알던 그 순진한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제가…… 정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저는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여기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어도 며칠 동안 환자는 거의 한 사람도 오지 않습니다. 한 달에 세 명이나 다섯 명 정도가 되는 것 같아요. 이웃이 먹을 걸 나눠 줘서 굶주림을 면하고는 있지만 뜻을 이루고 싶다는 욕심은 있습니다.”

그 말에 네 사람의 표정이 동시에 환해졌다.

“그러면 가시지요.”

아진의 얼굴이 누구보다 환해졌고 그녀도 웃음을 지었다.

아진이 웃는 모습을 봤다고 왜 이렇게 울컥하고 마음이 슬퍼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그의 얼굴에 지어진 어떤 표정이 가슴에 박혀서 오랫동안 슬펐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그랬다.

이상한 혼몽에 빠진 것처럼 온통 이해되지 않는 것투성이었다.

* * *

일행이 한 사람 더 늘어난 것뿐이었는데 그들 사이에는 설명하기 힘든 활기가 넘쳤다.

추현화는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자기를 바라보고 감격을 주체하지 못한 채 웃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걱정이 됐다.

자기는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들이 자신을 오해하면서 행복해하고 있는 걸 보고 있으려니 괜히 못 할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독고소영이 정말 부럽다는 생각도 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으면 이렇게 시간이 흐르고도 사람들의 기억과 마음속에서 또렷하게 살아 있는 걸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의원님은 어떻게 의원이 되셨습니까?”

산본의가 지부를 향해 가는 길에 서종욱이 물었다.

“그게…… 잘은 모르겠어요. 사실은 예전 일이 기억이 잘 안 나요. 이전의 기억이 뚝 잘려나간 것처럼 그래요. 기억이 시작되는 부분은 사실 아주 늦어요…….”

추현화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자기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는 사람들인데 그런 얘기를 하면 그 믿음이 더 강화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그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 전에 자기가 독고소영이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괜한 희망을 주었다가 그들을 실망하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걱정이 됐다.

“그냥 제가 생각하는 걸 말씀드려 봐도 될까요?”

그녀에게 섭혼술을 시행하려고 하다가 걸린 이후 내내 뻘쭘해하던 린린이 물었다.

그러고는 추현화의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말했다.

“일단 제가 아는 것 중에 이 상황에 가장 맞는 건 그거라는 거니까 제 이야기를 믿지는 않으셔도 돼요.”

그러면서 린린은 자신의 전생이 천마 패월악이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나 추현화는 그 말을 듣고도 놀라지 않았다.

그 이야기는 이미 사람들의 입을 통해 많이 퍼졌던 것이다.

“천마신교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정말 많아요. 신기한 무공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도 많죠.”

린린은 자연스럽게 마선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나갔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그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린린은 마선이 떠오른 후에 여러모로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검증을 해 보면서 지금은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어느 정도 확신하고 있었다.

“제 생각이 맞다면 마선이 흙으로 돌아갔다가 사고님의 시신을 만난 것 같아요. 그리고 사고님을 살렸죠. 마선의 마기는 사고님이 갖고 계시던 내공과 균형을 이룰 수 없었을 거예요. 그래서 사고님의 내공이 지금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거나 그때 사라졌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 사고님의 내공도 워낙 심후했으니까 사라지지는 않았을 거고 기혈에 숨어 있을 거예요.”

추현화는 신기한 옛날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귀를 기울였다.

자기도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서 그게 아니라고 부정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춘 채 린린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해서 사고님은 다시 살아나신 거예요. 마기의 영향으로 환골탈태를 해서 원래의 몸보다 더 젊어진 것 같고요. 이게 맞는지 확인할 방법은 사고님의 몸속에 진기를 불어넣어서 사고님이 마기를 갖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기혈에 숨어 있는 내공을 확인하면 되죠.”

그러자 아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사고님의 내공이 왜 숨어 있었던 건지 이제 알았어. 왜 사고님에게 마기가 있는지도 이해가 됐어. 린린.”

“그렇지? 맞지? 역시 그런 거였어.”

아진과 린린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추현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몸에 내공과 마기가 들어 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린린. 그런데.”

아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린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왜 사고님이라고 해? 내 사고님인데.”

추현화는 이 상황에서 그런 걸 따지는 아진을 보며 경이롭다고 생각했다.

“배우는 게 있으면 사고님이라고 해도 되지.”

도종이 근본 없는 소리를 하면서 린린을 지원했고 추현화는 린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차분히 생각했다.

“의원이 되기로 한 건 어떤 계기였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의원님?”

서종욱이 묻자 추현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누군지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때 우연히 의방을 지나갔고 그 앞마당에서 사람들이 치료를 받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가슴을 칼에 길게 벤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을 본 순간 그때 어떤 약초를 쓰면 좋은지, 어떻게 치료를 하는 건지 기억이 났다고 했다.

그때 환자의 상태가 위급했고 계속 피를 흘렸는데 의원은 당황했고 제대로 치료를 하지 못해 그대로 두면 위험할 것 같아서 자기가 안으로 들어가 치료를 도왔다고 했다.

“그래서 제가 의원이 아닐까 했어요. 그 의원보다 더 잘했거든요.”

그 후에는 정식으로 의원이 되기 위해서 여러 곳을 전전했고 마침내 의원이 됐다고 했다.

아진은 얘기를 듣는 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독고소영이 아진을 보면서, 그리고 산본의가에 머물면서 어깨너머로 본 것들이 떠올랐고 그것 때문에 지금까지 의원으로 살아올 수 있었던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얼굴에 버짐이 피면 어떻게 처방을 하셨어요?”

아진은 갑자기 전혀 상관도 없는 것 같은 질문을 했다.

“백율…… 채를 달여서 바르라고요.”

“백율채를 또 어디에 쓰셨어요?”

“천을 염색할 때도 쓰고 진통제로도 쓰고요. 쓰이는 곳이 많아서 백율채가 보이면 뜯어다 놓는 게 습관이 됐었어요.”

아진이 갑자기 왜 그걸 묻는지 모른 채로 추현화는 대답을 해 주었다.

“다른 의원들은 백율채의 효능을 알고도 그걸 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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