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1화
271화
“앞으로도 이런 여행을 자주 하면 좋을 것 같구나. 아주 뜻깊은 시간이다. 너희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것도 좋고 말이다.”
가주 서종욱은 벌써 몇 번이나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아진도 기뻤다.
산본의가가 거대하게 성장하면서 가주가 맡은 역할도 많아졌고 그 때문에 제대로 쉴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가 쉴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 함께 오기도 했는데 역시 천직이라서 그런 건지 서종욱은 사람들을 살필 때마다 그들의 몸에서 문제점을 찾아내고 그때마다 치료해 주었다.
가지고 온 약이 바닥을 드러내도 걱정할 것은 없었다.
잘 낫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아진이 마나를 불어넣어 몰래 치료를 해 주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에서 살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경우에는 그것을 피했다.
악한 자를 살려내는 것.
그것만큼 사람들을 곤란에 빠지게 하는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음식이 많이 맵네요? 아아. 매운 음식 하면 사천이라던데. 나중에 사천에도 가 보고 싶어요.”
도종이 말하자 가주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사천에는 꼭 가 보고 싶다. 원래 사천당문은 의술로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느냐. 참. 아진아. 사천당문에도 아는 분이 계시지 않느냐?”
“예.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오라고 성화인데 바빠서 가지 못했어요.”
“그러면 이번에 아예 거기까지 가면 어떻겠느냐. 아진아? 그쪽에도 본가의 지부가 있을 테니 겸사겸사 그쪽으로 방향을 잡아서 가 보도록 하자.”
“당채운 소협이 오라버니를 엄청나게 따랐잖아. 엄청난 추종자였지. 오라버니가 뭣만 하면 그걸 다 따라 하고 싶어 하면서 오라버니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린린이 말하자 가주와 도종이 신기한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당채운 소협이라면 독수라고 불리는 소협 말이냐? 그 소협도 요즘 강호에서 아주 유명하다던데. 후기지수 중에서는 가장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말이 있어. 그것도 물론 아진이 너랑 린린이 강호에 나서지 않아서 가능한 얘기라지만.”
도종은 자랑스러움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아진이 주위에 있는 사람이 그런 모습을 하는 걸 보는 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단다. 아진이는 어려서부터 그랬거든.”
가주의 말에 도종이 이견의 여지가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아버지. 저부터도 그랬잖아요. 아진이가 뭔가를 가지고 놀면 신기해서 같이 놀고 싶어서 자꾸 그 주위에 얼쩡거렸고요. 아진이는 정말 신기했어요. 하는 짓도 특별하고 재미있었고요.”
아진은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함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그러다가 어떤 일에 대해서는 아진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나중에는 가주와 도종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는 듯했다.
“아아. 그렇구나. 그건 그보다 전의 일이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도종과 가주는 그렇게 말을 하면서 넘어가기도 했다.
사천에 가기로 했지만 일단 그곳에 온 이상 천중산 일대를 먼저 돌아보았는데 그곳에도 산본의가 지부가 있었다.
그들은 지부의 의원들이 잘해 나가고 있을 거라고 의심하지 않으며 기대감에 부푼 채 사람들에게 지부에 대해 물었다.
그러나 흔쾌히 질문을 받아 주곤 하던 사람들이 일단 그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찌푸리고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일이 종종 발생했다.
아진은 어리둥절한 채 그들을 바라보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습니까?”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서로의 눈치를 보더니 말을 못 할 건 뭐냐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입을 열었다.
“요즘 산본의가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그런 거겠지만 산본의가 지부의 행패가 말도 못 할 정도로 심합니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아픈 사람이 찾아가서 오래 기다려도 그사이에 지체 높은 분이 사람을 보내서 왕진을 와 달라고 하면 그곳에 먼저 가 버립니다. 다른 의원도 있기는 하죠. 그런데 의원마다 수준이 다르고, 중증은 지부장 정도의 의원이 아니면 믿고 맡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쌓여 있던 불만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던 듯이 줄줄이 털어놓았다.
“사람들이 그러는데 약재도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른 곳의 약재와 다르게 보관 상태도 좋지 않고 값을 훨씬 비싸게 받는다고도 하고요.”
“그뿐만이 아닙니다. 근처에 개인 의료원이 생기면 얼마나 핍박을 하는지 모릅니다. 이 말은 확실하게 진위가 밝혀진 것은 아니고 그냥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이야기이기는 한데 왈패들을 동원해서 의원을 때리기도 하고 의료원을 뒤집어 버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난감한 것투성이였다.
한쪽에서 일방적인 이야기만 듣고 판단하는 것은 한계가 있겠지만 가는 동안 여러 사람에게 물었는데 그때마다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가주는 참담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다 무슨 소리라는 말이냐.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어. 의술을 가르치기 전에 내가 항상 환자를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서 가르쳤거늘.”
“아버지의 가르침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워낙 본가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사람들이 알아서 떠받들어 주다 보니 그리된 것 같습니다. 말을 하고 타이르면 고칠 것입니다.”
도종은 아버지가 낙심한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듯 말했다.
“우선은 그 개인 의료원에 먼저 가 보도록 하자. 그의 의술이 뛰어나다면 우리가 그곳을 지원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으냐.”
가주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간 곳은 그렇게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도 힘들 정도로 외부에서 알아보는 것이 어려웠다.
현판도 없이 낡은 깃발에 천중 의료원이라고 쓰여 있었고 그 깃발도 오랜 세월 동안 바람에 찢기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처럼 처량하게 보였는데 가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그곳에서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제선문의 핍박을 받으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가던 시절이 떠오르고 내일은 어떻게 버텨야 하나 하는 걱정을 멈추지 못하던 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던 것이다.
네 사람이 안으로 들어섰지만 곧바로 사람이 나오지는 않았다.
“계십니까?”
도종이 조심스럽게 묻자 그제야 안에서 사람이 나왔다.
의원이 혼자서 모든 일을 다 보며 환자까지 맞아들이는 듯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안에서 나온 사람은 의원복을 차려입은 여자였는데 그녀를 본 사람들은 일제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람들이 의원이라고 했을 때는 당연하게 남자일 거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산본의가에도 북리소은을 필두로 실력 있는 여자 의원들이 다수 포진하고 있었는데 그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놀란 이유는 정작 따로 있었다.
“사고…… 님?”
아진의 입에서 저절로 그 말이 나왔다.
그때까지 놀란 눈으로 의원을 바라보기만 하던 사람들은 아진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으며 자기들만 이상하게 느낀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독고소영.
북리의천의 영원한 동지이자 정인이었던 그녀.
사도련주와의 싸움에서 사람들을 지키다가 충독을 품은 이들에게 죽임을 당했던 그녀가 환생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똑같이 생긴 사람이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다.
나이는 죽을 당시의 독고소영보다 대여섯 살 정도 어린 것 같았지만 그 외에는 차이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천마 패월악이었다가 환생한 린린을 보면서 사람이 환생을 하더라도 전과 같은 모습을 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빙의?’
그러나 그것도 이상했다.
그게 빙의라면 원래 이 몸의 주인은 누구라는 것인가.
독고세가는 원래 대대로 아이가 극히 적었고 그것은 남아, 여아를 불문했다.
북리의천과 함께 독고소영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만 해도 그 이야기를 들었었다.
씨가 귀한 독고세가에 아이가 태어나서 태상가주와 가주가 기뻐하고 세가가 잔치 분위기에 휩싸여 있을 때 세가에 변고가 닥쳤다고.
그런 집안인데 세가의 사람이 이렇게 밖으로 떠도는 것은 쉽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물론 세상에 있는 수많은 사연을 전부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했던 것이다.
“누가 아파서 오셨나요?”
그들이 말을 하지 못한 채 황망한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한 듯 그녀가 먼저 물었다.
“아. 그것이…… 저희는 의원입니다.”
가주가 먼저 말을 했다.
괜한 거짓말로 무례하게 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은 모두 제 아들과 딸들입니다. 어쩌다 보니 기회가 되어 의술을 펼치며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다 의료원의 깃발이 보여서 잠시 말씀을 나눌 수 있을까 해서 들어와 봤습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셨군요. 정말 좋으시겠습니다. 이렇게 헌헌한 아드님과 따님이 동행해 주시다니요. 먼 길을 오신 것 같은데 안으로 드시지요. 누추하지만 바람을 피할 정도는 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쾌활하게 안으로 들어갔다.
목소리는 조금 차이가 났지만 그 목소리에도 금세 익숙해졌다.
아진은 자꾸만 사고가 떠올라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무공은 자기가 북리의천보다 낫지 않냐고 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제자가 되지 않겠냐고 하던 사고였다.
그러다가 그게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진의 수신호위가 되어 평생 그를 지켜 주겠다고 하더니 안타깝게도 너무 빨리 떠나 버린 사람.
독고소영의 존재와 독고세가가 보여준 헌신적인 믿음은 아진이 사람들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회복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곧 차를 내오겠습니다.”
그녀는 오랜만에 사람을 봐서 들뜬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의원이 나가자 그때부터 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능한 방법을 모두 꺼내 놓으면서 그들은 어떻게 이곳에 독고소영을 빼다 박은 사람이 있을 수 있는 건지 얘기를 나누었다.
“단순히 친인척일 가능성도 있기는 해요. 그게 가장 타당한 얘기이기는 하죠.”
도종이 말했지만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저었다.
가족과 친척 중에는 정말 많이 닮은 사람이 있기도 했지만 왠지 의원은 그 정도를 훨씬 뛰어넘은 느낌이라서였다.
그들이 그곳에 온 것은 산본의가 지부가 저질렀다는 패악에 대해서 증언을 듣고 싶어서였지만 이미 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저 의원이 정말 독고소영일까 하는 것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있어서였다.
“인피면구는 아닐까? 무인 중에는 그런 걸 쓰는 사람도 있잖아. 인피면구를 만든 사람이 그분의 얼굴을 본떠서 만들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것 역시 도종에게서 나온 의견이었는데 그 말에도 아진과 린린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얼굴을 본떠 만든 인피면구라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비슷한 분위기가 나오려면 얼굴의 골격이 독고소영과 같아야 하는데 그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린린. 혹시 마공 중에 이런 일이 가능한 건 없어?”
아진은 린린에게 물어놓고 자기도 여러 무공을 떠올리며 가능성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