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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70화 (270/470)

제270화

270화

그 경험은 새롭지도 않고 낯설지도 않았다.

자기 자신은 어제와 달라진 것이 없는데 그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지는 일.

아진이 SSS급 헌터가 되었을 때도 그랬던 것 같았다.

그들이 산본의가에 돌아갔을 때, 정확히는 산본성에 들어가려 했을 때 사람들이 말할 수 없이 깍듯하게 아진과 린린을 맞이했다.

전에도 그들을 대하는 태도에 소홀함이 없었지만 이제는 과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사람들이 그럴 때마다 아진은 조심스러워졌다.

힘이 집중되면서 초심을 잃고 결국에는 몰락하게 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봐 왔던 것이다.

정작 아진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아진의 주변에 모여든 사람 중에 자기들이 가진 힘을 사용해 다른 이들을 핍박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수도 있는 법이었다.

‘본가가 너무 커지기는 했지.’

그동안은 외부적인 성장에 치중해 왔고 그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필 겨를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어 아진은 자기 생각을 린린에게 말해 주었다.

“린린. 우리말이야. 산본의가 지부들을 찾아다녀 볼까?”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려고?”

아진은 멍하니 린린을 바라보았다. 왜? 라고 묻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해서였다.

“너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알아?”

“응.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게 매번 거기서 거기지. 그걸 모르겠어? 황상이 오라버니를 총애한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고 이번에도 황상을 도와서 산본의가가 큰 역할을 해 줬으니까 산본의가의 명성은 더 높아졌겠지. 우리는 그러지 않으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명성을 이용해서 권력을 누리려고 할 수도 있고. 그러면 언젠가 제선문이 그런 것처럼 본가의 지부가 다른 작은 의료원을 핍박할지도 모르고.”

“…….”

이 정도면 할 말이 없었다.

“너는 어떻게 내 머릿속을 다 아는 거야?”

“오라버니 동생이잖아.”

“그런데 그거. 그것도 사실이 아니잖아. 나를 낳아 준 분은 따로 있다고 하고.”

“모르지. 오라버니가 나를 키워서 그런 생각이 주입된 건지도 모르고. 그런데 그거 재미있을 것 같아. 일단 본가에 들렀다가 허락받고 가자. 오라버니.”

“네 생각은 어때? 본가의 의원들이 제선문 사람들처럼 다른 사람들을 핍박하고 있을까?”

린린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얼굴이었다.

“그건 모르는 일 같아. 막상 일이 닥치기 전에는 자기의 진면목을 모르는 사람도 많잖아.”

“그래. 그렇지.”

아진은 자기가 겁도 없이 진실의 민낯을 보겠다며 뛰어드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아진 자신이 아니라면 지금 이 시기에 그런 문제를 바로잡아 줄 사람도 없었다.

‘아니지. 아버지나 도종 형님도 있기는 하지. 이참에 같이 가 보자고 할까?’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린린이 그 말을 했을 때 아진은 진심으로 놀라서 기함했다.

“야. 너 혹시 그거냐? 단리서언이 그런 능력을 가진 때가 있었잖아. 상대방의 생각을 읽는 거.”

“아닌데? 나는 오라버니 생각만 읽을 수 있는데? 그리고 그건 오라버니가 워낙 투명해서 그런 거야. 오라버니가 생각하는 게 전부 다 보이는 걸 어떻게 하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칭찬은 아닌 것 같은 말을 들으면서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데 왜 좋은 생각이 아니야?”

“아버지랑 오라버니도 같이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옛날 생각도 나고 좋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응.”

“그러면 본가는 누가 지켜? 랑랑이는 누가 보고?”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나도 아버지랑 형님이랑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린린은 거의 확신에 차서 고개를 저었다.

“둘 다 싫다고 할 거야. 그때 가서 상처받지 말고 그냥 포기해. 오라버니.”

그럴 수는 없었다.

분명히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하며 아진은 혼자서 고개를 저었다.

* * *

현판도 사람들을 끌어들이는데 한 몫을 단단히 하는 것 같았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한 필체로 산본의가라는 글씨가 새겨진 현판을 보고 있으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황제가 쓴 글씨대로 동판으로 글자를 만들고 그 위에 금박을 입힌 형태였다.

멀리서부터 그 모습을 보면서 걸어가는데 한 무리의 낯선 아이들이 두 사람을 향해 다가왔다.

‘……?’

누구인지 모르겠는데 아이들의 얼굴에는 환한 웃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진은 한참이 지나서야 그 아이들이 화선에서 사도련에 속한 방파에 붙잡혀 있던 아이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너희들? 언제 이렇게 컸어. 어?”

아진이 뒤늦게 알아보고 한 사람 한 사람을 보며 말하자 아이들은 신이 나고 감격스러웠는지 환하게 웃어댔다.

얼굴에서 햇살이 흩뿌려지는 것 같았다.

“정말 많이 자랐네? 아니. 잠깐만. 우리가 이번에 자리를 오래 비운 것도 아니잖아. 그런데 이렇게 변할 수가 있는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진은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가까이에서 지내면서도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해서였다.

“부모님들은 다 평안하시지?”

“네. 의원님.”

“너희도 다들 건강하지?”

“그럼요.”

아이들은 그사이에 마을과 산본의가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말하면서 두 사람을 따라왔다.

현판의 글씨를 쓴 사람이 황상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특별히 진료를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라도 멀리에서 사람들이 뇌물을 가지고 오기도 한다는 말 역시 아진의 귀에 들어왔다.

“뇌물? 뇌물을 가지고 온 걸 어떻게 알아?”

“아버지 어머니가 그러셨어요. 그 사람들은 뇌물을 가지고 오는 거라고요.”

아진은 린린을 바라보았다.

산본의가의 가주와 가모가 가진 권력은 어느덧 황후의 힘을 능가하고 있었다.

황상이 가모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구는 것은 그냥 하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되기는요? 그 사람들은 안에 들어가서 일각도 지나지 못하고 쫓겨나와요. 가지고 간 걸 그대로 든 채로요.”

아이들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아는 듯했고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역력했다.

“황상 폐하께서 나라의 썩은 것을 고치려고 애쓰시는데 산본의가에서 뇌물을 받는 게 말이 되냐면서 가주님이 크게 호통을 치기도 하셨어요. 가주님이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건 처음 봤어요.”

아이들은 할 말이 많은 듯 쉬지 않고 떠들어댔고 아진은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서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면 자기가 했던 걱정은 기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진과 린린이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오는 모습을 보고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반가운 얼굴로 마중을 나왔다.

“공자님. 아가씨. 이제 오시는지요? 가신 일은 잘되었다고 들었습니다. 건강한 모습으로 무사히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모두 하나같이 밝은 얼굴이었다.

“저희가 없는 동안 본가를 지키느라고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아진도 밝은 얼굴로 그들을 치하하면서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디선가 바람을 일으키며 바퀴 하나가 굴러오는 듯하더니 랑랑이 아진에게 달려와 안겼다.

“툭부님. 툭부니임.”

“랑랑. 숙부님 보고 싶었지? 그런데 이렇게 통통해지다가 나중에는 구름이 되겠다.”

볼이 터질 것처럼 빵빵한 것이 린린의 어릴 때와 판박이라고 생각을 하다가 아진은 문득 자기가 도종이나 린린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어차피 환골탈태하면 얼굴이 바뀌는 거니까 뭐.’

아진은 랑랑을 안고 들어가며 수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았다.

이제야 집에 돌아왔다는 행복감이 깊이 퍼지고 있었다.

* * *

산본의가 지부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는 게 필요할 것 같다는 아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은 일제히 진지해졌다.

듣고 보니 정말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듯했다.

“맞아요. 어머니. 그동안 어머니가 전국 각지에 엄청나게 사업을 확장하고 지부를 벌려 놓으셔서 어디에서 본가의 이름으로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확인할 필요는 있어요.”

도종이 말하자 가모도 수긍했다.

“그러면 이참에 감찰단을 하나 만들까?”

이제 가모는 새로운 단체를 만드는 장인이 되어 버린 듯했다.

“아뇨. 어머니. 그냥 저희가 다녀올게요. 그런데 아버지랑 형님도 같이 가시면 어떨까 하기는 해요. 잘하는 곳에는 그 자체로 상이 될 거예요. 그렇잖아요. 본가의 가주님과 소가주님이 와서 특별히 진료해 주신다고 하면 환자도 더 많이 모여들 거고요.”

아진은 우선 그 정도로만 말을 해 두었다.

이제 떡밥을 물고 안 물고는 순전히 두 사람에게 달린 문제였다.

그리고 바로 반응이 왔다.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이구나. 오랜만에 너희랑 다 같이 여행을 하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말이다. 그동안은 그럴 기회가 없지 않았느냐. 이제는 본가에 의원도 많고 제선문주님도 계셔서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도 걱정할 일이 없다. 나는 가겠다. 도종이 너는 어찌할 생각이냐?”

그러나 ‘너희랑 다 같이’ 여행을 하게 됐다고 들뜬 가주의 말에 도종이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었다.

“내자에게 물어 보기는 해야겠지만 저도 가고 싶습니다. 아버지.”

“그래. 말을 잘해 보아라. 나는 기회가 아주 좋을 것 같구나. 옛날 생각도 날 것 같고 말이다. 정작 너희가 모두 어렸을 때는 우리 린린이 자주 아파서 같이 여행을 다녀보지도 못했지.”

가주는 그 일이 다시 떠오르는 듯했고 이렇게 건강하게 잘 자라준 게 대견하다는 것처럼 린린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린린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귀찮아 보이는 얼굴에 행복한 웃음이 가득 번졌던 것이다.

가만 보면 그것은 서로 영향을 미쳤다.

천마신교의 마두들은 린린이 그들을 인정해 주고 칭찬을 하면서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린린은 아버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것이 기분 좋아서 한껏 행복하게 웃고 있었던 것이다.

“중요한 일인 것 같으니까 도종이도 같이 다녀오면 좋을 것 같기는 하구나.”

가모도 그 일에 기대하는 바가 큰 듯했다.

작금의 이 나라에서 산본의가만큼 크게 영향력을 끼치는 곳이 있는가 하면 쉽게 떠오르는 곳이 없었다.

어떤 명문 세가도, 어떤 권문세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우선은 준비를 해야겠군요. 상공. 그런데 제가 없어도 괜찮으시겠어요? 상공은 저와 떨어져서 지낸 적이 별로 없잖아요.”

가모의 말에 서종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오. 그게 가장 걱정이오.”

아진과 도종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분들을 어쩔 거냐는 듯이.

“그래도 이번에는 참아요. 상공.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면 제가 선녀였다는 걸 아시게 될 거예요.”

“나는 지금도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소.”

“으어어!”

결국 린린이 못 참겠다는 듯이 일어섰고 아진과 도종도 덩달아 자리를 피했다.

모두에게서 일제히 웃음이 터져 나왔다.

* * *

하남성 천중산 부근.

산본을 떠나온 이들의 발걸음은 어느새 그곳에 이르고 있었다.

그동안 급히 갈 곳이 있으면 대부분 신법을 전개해서 갔는데 이번에는 목적이 따로 있는 만큼 말과 마차를 타고 천천히 길을 지나고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유명한 객잔에 들러서 좋은 음식을 먹기도 하고 가까운 곳에 의료원이 없는 지역에 이르면 무료 진료소를 열면서 오기도 하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그들 모두에게 의미가 깊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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