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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8화 (268/470)

제268화

268화

창을 들고 서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세가 대단하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작이 맞았다.

‘혹시?’

하월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산본의가 인근에서 약초를 캐다 팔던 사람들이 중용되었다고 하던데 그자들이 금의위를 이렇게 만들어 버렸을까 했던 것이다.

그의 눈앞에서 금의위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놈들. 여기가 어디라고 이러는 것이냐! 여기는 황후 마마의 본가이니라!!”

총관이 구를 듯이 달려 나와 기세 좋게 소리쳤지만 잠시 후 그의 몸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황명을 받드는 자에게 누가 이런 망발을 하는 것이냐.”

용서의 여지는 없었고 검이 정확한 궤적을 그리며 총관의 가슴을 갈랐다.

그 모습을 보아서였는지 소란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그곳에서 벌어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실패가 없던 일이 이번에는 왜 이렇게 된 건지.

혼란과 의혹은 또 다른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도저히 출구를 알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그들은 그 안에서 길을 잃었다.

* * *

황후전에서 교태로운 웃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들으라는 듯, 황후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폐하. 이리 오랜만에 찾아 주시어 소첩이 어찌나 서운했는지 모릅니다.”

“짐이 좀 바빴소.”

황제는 여상한 얼굴로 말했다.

귀찮고 지루한 듯한 표정이라 황후는 그가 갑자기 황후전에 찾아온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혹시 뇌물을 받고 관직을 파는 걸 안 건가? 그건 아닐 텐데? 그자들은 남들이 모르게 황후전으로 데려오는데 황상이 어찌 알고?’

머리를 굴리면서 동시에 황상을 상대하고 웃어 주기까지 하려다 보니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었다.

“황후가 구문제독을 신임했던 것이 떠오르지 뭐요. 구문제독이 죽은 지금 황후의 상심이 클 듯하여 이리 와 보았소.”

“폐하…….”

황후는 이렇게 감격스러운 말이 다 있냐는 듯 눈에 습막까지 맺어 가면서 말했다.

감격하는 연기가 일품이어서 황후 본인도 감탄을 금치 못했다.

“황궁 내에서 감히 황후를 노리는 자들이 있었다는 말도 들었소. 흉수가 누구인지 반드시 찾아내라고 일렀소만 아직 지지부진한 모양이오. 그래도 너무 겁먹지 마시오. 황후. 이 일은 내가 반드시 책임지고 해결할 것이니.”

“소첩은 폐하만 믿사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한 진심은 전혀 갖고 있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번지르르한 소리를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구를 더 가증스럽게 여길지 그것도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폐하. 소첩은 폐하께서 이리 소첩을 찾아 주신 것만으로도 모든 원망이 눈 녹듯 전부 사라졌사옵니다.”

“원망이라니. 나를 원망하고 있었소?”

황제가 재미있는 말을 다 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그날 황후전에 찾아온 이후 처음 보이는 웃음이었다.

“폐하…… 그것이 아니오라.”

“그것이 아니면 무슨 말인지 알고 싶구려. 원망했다고 말한 것 같은데.”

“아니. 그 뜻이 아니옵고…….”

황제가 입에 꿀이 발린 듯이 말을 하는 바람에 그 정도의 말이나 애교는 허락이 될 줄로 알았다.

겨우 그 정도 말을 했다고 갑자기 쥐잡듯이 얼굴을 굳히고 정색을 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짐의 잘못이 없는데 짐을 원망한다니 이상하지 않소. 황후는 그 일을 사주한 것이 짐이라고 생각한 것이오?”

“아닙니다. 폐하.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소첩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에도 폐하께서 소첩을 찾지 않으시고 찾아와주시지도 않으시어…….”

“허허…… 짐은 황제요. 황후. 황제가 찾지 않았다고 원망을 하였다. 그대는 황후가 뭐라고 생각하시오.”

별꼴 다 보겠다는 듯한 말에 황후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조금 전으로 돌아가서 그 말을 돌이키고 싶었다.

별것도 아닌 말을 가지고 꼬투리를 잡는 황제에게 화가 났지만 원인을 제공한 것은 자신이라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황제는 그러고도 빨리 떠날 생각은 없는 듯 궁녀가 가져온 차를 전부 마셨다.

“같이 산책을 하겠소?”

“예. 폐하.”

도무지 황제의 꿍꿍이를 알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그냥 날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황후는 곧 황제를 따라나섰다.

“새 구문제독을 임명해야 하오만 황후는 누가 적합하다고 보시오?”

“소첩이 어찌 그런 것을 알겠사옵니까. 폐하의 마음에 기꺼운 사람으로 앉히시지요.”

“내각대학사에게 육부 상서를 관리 감독할 권한을 주는 것에 대해서는 어찌 생각하시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얘기 나눈 것이 있을 텐데. 이부상서와 말이오.”

“…….”

황후는 대답을 하기 전에 생각을 정리했다.

함부로 발을 내디뎠다가는 좀전의 실수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결과가 초래될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소첩이 그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폐하. 소첩은 정치를 잘 알지 못하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군.”

“……예?”

황제는 그날 내내 표정이 좋지 않았지만 그때 보인 표정에 비하자면 그 전의 얼굴은 상냥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고 해야 했을 것이다.

“폐하…… 어찌 그러시는지요……?”

“황후가 가증스러워서 그러하오만. 황후는 그것을 몰라서 묻는 것이오?”

“……폐하.”

황후는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말인가.

도대체 무슨 꼬투리를 잡아서 이렇게 나온다는 것인가.

황후의 머릿속에서는 근래에 그녀가 세웠던 계략들이 떠올랐다.

그것들이 도중에 실패하거나 발각된 것에 대해 생각을 해 보았지만 그럴 여지는 많지 않았다.

워낙 자신만만했고 이전에도 어려움 없이 성공해 왔기에 더욱 그랬다.

“최근에 뇌물을 받고 복권을 시켜 달라는 청탁을 받은 일이 있소, 없소?”

황제는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말했다.

그의 걸음이 빨라서 황후는 종종걸음을 치며 따라가야 했다.

“폐하…….”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은 아닌 것 같소만. 최근이라는 말이 광범위한가? 그러면 범위를 좁혀 주겠소.”

그리고 그는 정도영이 찾아왔던 날을 정확히 지정했다.

황후는 황제가 앞서가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그러지 않았다면 놀라는 자신의 모습을 그가 고스란히 봤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황후는 항주에서의 일을 어찌 생각하시오. 왜구를 토벌하고 부패한 관료들을 몰아내고 새로운 이들에게 관직을 맡긴 것 말이오.”

“그야 물론…… 폐하께서 선정을 베푸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자도 폐하를 닮아 총명하니 그리될 것입니다.”

앞뒤 맥락도 없이 태자를 들먹인 것은 그만큼 황후가 위기의식을 느껴서였다.

함께 낳은 태자를 생각해서라도 자기에게 심하게 굴지 말아 달라는 의미와도 같았다.

지금껏 황제와의 관계에서 그런 기분을 느낀 적은 별로 없었다.

제 아버지의 손으로 세운 황제였다.

허수아비와도 같았고 그가 아니라고 해도 황제가 될 수 있는 이는 있었다.

그는 대가 없이 황위를 받았고 그것은 두고두고 그가 갚아야 할 은혜였다.

그런데 왜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진 것일까.

황후는 머리가 어지러웠고 걸음을 옮기는 것이 점점 힘들었다.

작은 발로, 달리듯이 황제를 따라잡는 것이 버거웠다.

“폐하.”

“짐은.”

황제가 말을 하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언제가 되어야 황후에게 실망하는 것을 멈출 수 있겠는가.”

“…….”

절벽에 서 있다가 몸이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소름이 끼치고 두려웠다.

황제에게 그런 소리를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도대체 황제가 왜 이런다는 말인가.

무엇을 알아서 이리 나온다는 것인가.

안찰사의 일이라면 거기에 대해 해명할 일은 있었다.

알고 보니 새로 요직을 꿰차고 앉은 자들이 전부 탐욕스럽게 부패한 자들이더라고 말하며 증거를 보여 줄 수도 있었다.

증거는 지금쯤 아마 차고 넘치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황제는 자신의 곁을 따르던 태감과 궁녀들에게 손짓했다.

“궁으로 돌아가자.”

“예. 폐하.”

그들에게만 말을 하고 황후에게는 따로 말을 하지도 않았다.

축객령과 다름없는 말.

황후는 멍하니 그 자리에 서서 황제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냐!”

황제가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 그녀가 사나운 소리로 태감에게 다그쳤다.

“소신도 모르겠습니다. 마마. 갑자기 항주의 일은 왜 물으시는 것인지…….”

“황상이 무언가를 알아차렸으니 저러는 것이 아니냐.”

그녀의 머릿속에 갑자기 하월이 떠올랐다.

“하월 그놈이 황상에게 고자질한 것인가!”

“아닐 것입니다. 마마. 설마 북궁 태감이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느냐.”

“북궁 태감이 황상께 불려가기는 하나 좋아서 가는 것도 아닐 것이고…….”

황후는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를 노려보았다.

그동안 모든 일이 순탄하게 진행되어온 탓이었다.

실패라도 했다면 조심할 생각도 할 수 있었을 것이고 일이 어그러지는 경우를 상상해 볼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그냥 마음을 먹기만 하면 되었다.

그리고 승승장구했던 그 시간이 갑자기 몸을 틀어 그녀에게 올무를 던지려 하고 있었다.

“마마. 연 대인의 책임으로 하시옵소서.”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깨달은 태감이 그녀에게 말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이냐.”

“태자 전하를 지키셔야 하옵니다. 황상이 무엇까지 알고 저러는지 깊이 생각하셔야 하옵니다.”

태감의 말에 황후가 따르던 이들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문을 버리라.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것인가.

명빈을 죽이고 하월에게 덫을 놓고 항주의 안찰사를 썩은 관료로 만들기 위해 계획을 세울 때까지만 해도 좋았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라는 말인지.

대체 언제 그 창끝이 전부 자신을 향해 돌아선 것인지 황후는 알 수가 없었다.

* * *

조회 자리였다.

황상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무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평소와 달라진 것이라면 갑론을박을 벌이며 황상의 의견에 사사건건 반대를 표하던 육부 상서가 말할 수 없이 얌전해졌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황상이 하는 모든 말에 적극적인 찬동을 하고 나섰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낯부끄러운 말도 서슴지 않았다.

황제는 그런 말에는 개의치 않고 준비했던 말을 했다.

“육부 상서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만 통제할 마땅한 방법이 존재하지 않소. 다행히 대학사가 있어 그 일을 맡아줄 수 있으니 얼마나 잘된 일이오? 과거에 대학사의 전횡으로 나라가 고통을 당한 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대학사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뿐이오. 그런 문제는 어디에나 있소. 그렇지 않소?”

설마하니 황제가 그 문제를 거기에서 꺼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이들이 할 말을 잃은 채 황제를 바라보았다.

“이 일의 시행을 뒤로 미룰 것이 아니니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필요한 것을 준비하도록 하시오. 이부상서가 이 일을 맡아 진두지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찌 생각하시오? 힘이 부치면 말을 하시오. 어차피 구문제독도 새로 뽑아야 하니 그러는 김에 이부상서도 새로 하나 뽑도록 하지.”

“…….”

그것은 농담도 아니었다.

이부상서 연석영은 황상의 기분을 헤아리려고 애쓰며 비굴하게 웃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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