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7화
267화
그들은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는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곳곳에서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검풍대는 산본무관이 자랑하는 무인들이기는 했지만 실전의 경험은 곡주의 정예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사람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취하는 자들과 순둥순둥한 검풍대는 휘두르는 검격의 단호함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북리의천은 이미 그럴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는 검풍대가 스스로 그 문제를 뛰어넘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천령곡의 무인들은 검풍대가 순간적으로 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자 갸웃거렸다.
여기에서 빈틈을 찾을 수 있다면 승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자기들의 무기를 들고 달려나갔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들의 기세는 함부로 볼 것이 아니었다.
북리의천은 검풍대의 무인들이 움찔하며 긴장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그들이 스스로 깨고 나와야 할 껍질이었다.
몇 번의 실패가 있다고 하더라도.
몇 번의 검상을 얻게 되는 한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수고 나와야 할 껍질.
격렬한 부딪힘.
곳곳에서 들리는 폭음.
비명과 고함.
처절하고 격렬한 격투였지만 각자가 느끼는 기분은 완전히 달랐다.
검풍대의 검이 희망을 보고 있었다면 천령곡은 증오와 배신감에 차올랐다.
“너 때문이잖아!! 네가 우리를 여기를 끌고 왔어!”
검풍대의 무인들을 상대하던 마영루는 자신의 눈에 곡주가 들어오자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더니 그를 향해 도강을 흩뿌렸다.
곡주는 그것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그의 오해였다.
마영루가 곡주를 향해 도강을 뿌리는 동안 검풍대의 무인들은 넋 놓고 그 모습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기회가 왔을 때 그것을 살리지 않고 놓치는 것은 교만한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검기를 피워 올리며 마영루를 향해 득달같이 덤벼들었다.
마영루는 수많은 검에 검상을 입고 주저앉듯이 쓰러졌다.
막판에 도를 바닥에 짚어 우스꽝스럽게 나뒹구는 것은 모면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실제로 그에게 벌어진 일은 별반 차이가 없었다.
“…….”
그것은 절대 마영루가 원한 최후가 아니었다.
곡주를 밟고 올라서서 이부상서에게 중용되고 나중에는 황후의 지근거리에서 권력을 휘두르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어쩌다가.
‘이게 끝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고 생각하며 눈을 번뜩였다.
그러나 누군가 휘두른 검이 그의 목을 베고 지나갔다.
날카로운 검세에 바닥이 이장이나 깎여나갔다.
마영루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다.
죽음.
절대로 상상하지 않았던 자신의 죽음이었다.
완벽한 뒤처리 후에는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남아 있는 이들을 사냥감처럼 몰면서 검풍대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그들은 그동안 훈련해 왔던 절초를 펼치며 내공의 운용에 신경을 쓰며 서로 호흡을 맞췄다.
힐끔힐끔 북리의천의 눈치도 살피면서 자기들이 제대로 하는 건지 확인을 해 가면서 그들은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천령곡의 정예들이 한 사람을 남기고 쓰러질 때까지 그들은 잠시도 검격을 멈추지 않았다.
“…….”
끝까지 쉬지 않고 미친 듯 검을 휘둘렀던 소하연은 자신만이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포로로 자신을 정한 이유를 그녀는 알 수 없었고 그 때문에 굴욕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홀로 살아남았다는 감격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달콤했다.
“안찰사에게 하려고 했던 일을 증언할 수 있는가.”
북리의천의 말에 소하연은 잠시 대답할 말을 골랐다.
그러자 북리의천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내 말이 부탁처럼 들리는 모양이군. 내가 너무 친절하게 말을 해서 그런 것 같아. 사람들은 내가 말을 하면 그걸 부탁으로 듣더군.”
그 말에 검풍대의 무인들이 푸슬푸슬 웃었다.
임무를 무사히 마쳤다고 생각해서인지 이제 웃음도 나오는 모양이었다.
“너희에 의해서 모략을 당하고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들이 누구인지 순순히 말을 한다면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주겠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아직 그걸 모르는 모양이군. 소문이 거기까지는 들어가지 않았나? 산본의가의 가주에게 딸이 있고 그 딸이 천마였다는 사실 말이다. 그 아이가 섭혼술의 대가라는 사실이 솔직히 많이 알려지지 않기는 했지.”
말을 하며 짓는 북리의천의 표정은 잔인해 보였다.
소하연에게 부탁을 한 게 아니라는 것을 그녀도 결국에는 확실히 깨달았다.
“죽지도 못하게 만들고 네 머릿속에 있는 걸 전부 긁어낼 것이다. 우리가 너를 죽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겠지.”
지겹도록 날아오던 침.
그게 날아와 혈을 점한다면 아무리 소하연이라고 해도 자신의 원대로 죽을 수는 없을 터였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그녀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생각하는 건 틀렸다. 네가 죽더라도 우리 중에는 너를 살릴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오욕의 역사를 씻고 명예를 회복해야 할 사람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누명을 벗을 때까지 너는 절대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
“…….”
소하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위선적인 정파 놈들의 위협을 비웃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차원을 달리했다.
진심으로 소하연은 제 눈앞에 지옥이 펼쳐진 것을 생생하게 보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럼. 이제 가겠는가?”
비척비척 걸음을 옮기려는 소하연의 시선에 희한한 광경이 걸려들었다.
검은 구슬이 동료의 가슴팍에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설마 저게 그 흑주라는 건가? 죽어 가는 자의 진기를 흡수한다는?’
그냥 구슬일 뿐인데 허공에 떠오른 흑주와 눈이 마주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길하게도 흑주가 그다음으로 자신을 노리는 것 같아서 소하연은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다가 고개를 저었다.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 * *
하월은 자꾸만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이 꽤 살벌하게 보일 거라는 것을 그도 알 수 있었다.
명빈이 죽어 있는 뇌옥에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있었으니.
그는 황후가 의도한 대로 덫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황후가 꾸민 일을 황상이 알고 있는 이상 그 덫은 이미 무용지물이 되어 있었다.
하월이 웃은 것은 황상이 황후의 계획을 알았으면서도 명빈을 살리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는 정말로 황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의롭고 공정하고 자애로운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돌아보면 그는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상한 일에 몰두하고 오래된 일을 기억하고 있다가 복수를 실행하기도 했다.
이 일도 비슷한 차원인지 몰랐다.
황상은 자신의 총애를 이용한 명빈에게 배신감을 느꼈고 그 후로 명빈을 용서한 적이 없었던 듯했다.
황후가 명빈의 세력을 찍어내려고 했다는 것을 알면서도 명빈을 구명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일이 성공하도록 놔둠으로써 황후의 목에 올무를 드리웠다.
처음에는 그런 생각으로 웃었지만 하월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이 사라졌다.
‘그게 아닌 거군. 명빈을 놔두면 황후보다 더한 괴물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그러신 건지도 몰라. 어쩌면 황상은 명빈을 지금도 애틋하게 여기고 계시는지 모르겠군.’
황후와 그녀의 가문이 힘을 잃고 와해하면 그 후에 황실에서 가장 큰 권력을 갖게 될 사람은 명빈이었다.
더군다나 명빈은 한때 황제의 총애까지 받던 사람이었다.
황제에게 사죄하고 앞으로는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로 다짐하고 뒤에서 황후와 같은 일을 저지른다면 황상은 이번에야말로 흔들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것이 진실일지 하월의 추측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황상이 심장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수하고 명빈의 죽음을 방조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월의 생각이 열심히 달리고 있을 때 문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그가 뇌옥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느껴지지 않던 인기척이었다.
하월이 안심하고 뇌옥에 들어가도록 자리를 비워 두고 있다가 이제 시간이 됐다고 생각하며 때를 맞춰 찾아온 이들인 것 같았다.
누구인지 굳이 볼 필요도 없었다.
이부상서의 심복들.
의외성도 없었다.
“부, 북궁 태감……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마마님께서…… 마마님께서 왜 쓰러져 계신다는 말입니까!”
안으로 들어온 그들은 하월이 예상한 표정을 짓고 그가 예상한 말을 했다.
혼신의 연기에 하월은 손뼉을 두어 번 쳐 주었다.
“감쪽같습니다. 연기가 수준급입니다.”
끔찍하고 잔인하게 훼손된 명빈의 시신을 앞에 두고 하월이 조금도 놀라지 않은 채 오히려 조롱하는 말투로 말하자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건 그들이 예상했던 전개가 아니었다.
“내가 마마를 죽인 걸로 몰고 가고 싶거든 그렇게 하시오.”
“부…… 북궁 태감. 태감이 저지른 짓을 남 탓으로 돌리려고 하지 마시오. 태감이 이러지 않았다면 우리도 태감을 고발할 필요가 없소.”
“내가 뭐라 하였소? 고발하라는 것인데. 내 말이 이해가 안 되오?”
“…….”
사람들의 당혹감은 더욱 커졌다.
이 사람이 왜 이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미……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인데. 아무리 태감이 황상의 총애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은 황실의 근간을 흔드는 중차대한 일이오. 황상의 후궁인 명빈 마마를 죽인 일까지도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오.”
“거참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고발하라는 말이오. 아니면 그냥 내가 관으로 가겠소.”
그것은 그들이 원한 바가 아니었다.
하월은 명빈의 시신을 발견하고 벌벌 떨면서 겁에 질려야 했고 때마침 현장에 나타나 그 장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자신은 아무 죄가 없음을 고해야 했다.
그러면서 제발 살려달라고 비굴하게 애걸복걸해야 하는 거였는데 왜……?
어디에서 뭐가 잘못됐다는 말인가.
그들은 그런 하월을 황후에게 인도하기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하월이 관으로 가서 자복이라도 할 것 같아서 머릿속이 이만저만 복잡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태, 태감…….”
“이럴 것이 아니라 황상께 가서 말씀을 드리겠소.”
“태감이 뭐라고 말을 하더라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지는 못하오! 태감이 명빈 마마를 죽이지 않았다고 해도 그럴 거라는 말이오.”
“내가 안 죽인 것처럼 보이나 보오.”
하월의 말에 심복들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명령을 받았을 때만 해도 그들은 아주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실수를 하려고 해도 실수하기도 힘들 만큼 쉬운 일이었는데…….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수십.
아니.
수백이었다.
수백의 관병들이 빈틈없이 열과 동작을 맞추어서 다가오는 소리는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쭈뼛 서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는 얼굴이었다.
그러다 한두 사람이 급히 밖으로 나갔다.
하월이 밖으로 나가자 한눈에 봐도 이백 명은 넘어 보이는 금의위사들이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