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5화
265화
“이걸 산본의가에 보내는 것이다. 그리고 산본무관의 무인들을 빌려 달라고 하는 것이지. 완벽하지 않으냐. 가모가 감동하고 있을 때 말을 하면 가모도 흔쾌히 무인들을 빌려 줄 것이다.”
아진은 정말 좋은 생각이라면서 손뼉까지 쳐주었고 린린은 자기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없다고 생각한 것처럼 구결을 계속 적어나갔다.
“섭혼술 구결도 적어 드릴까?”
어느새 그런 이야기까지 하면서.
구결을 안다고 무공을 전부 익힐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황제에게는 꿈 같은 시간이었다.
* * *
황제의 글씨와 현판은 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일은 황제가 상상한 것과 별로 다르지 않게 진행되었다.
당장 현판을 거는 작업이 시작됐고 산본의가에 찾아온 사람들은 낙관의 주인이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기함했다.
황제가 산본의가를 특별히 보살핀다는 사실은 전부터 파다하게 소문이 퍼져 있었지만 이로써 만방에 증명이 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단순히 산본의가의 현판만 써준 것도 아니고 표국과 무관, 철방과 전장에 이르기까지 써서 보내 준 것을 보며 사람들은 황상이 자기 집에도 이렇게는 안 할 거라는 말을 몰래 나누곤 했다.
더군다나 짧은 어휘를 수도 없이 많이 써주어서 간단히 선물하기도 좋고 급전이 필요할 때 융통하기도 좋을 것 같아서 가모는 한동안 감격을 금치 못했다.
황제의 명을 받고 선물을 가지고 온 암천대문이 그때를 노리고 있다가 무인의 차출 문제를 조심스럽게 말하자 가모는 흔쾌히 수락했다.
먼저 아진과 린린이 임무 수행을 함께 하는지 묻고 무인들이 위험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한 후에 말을 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른 때에 비해서는 답이 훨씬 빨리 나왔다.
제선문주도 그 상황을 재미있게 여기면서 자기가 만든 특제약을 전부 풀고 새로 약을 만들기 위해 위도를 데리고 사라졌다.
그 상황에서 북리의천만큼은 마냥 웃을 수가 없었는데 목숨을 내놓고 항주에서 왜구를 토벌했는데도 불구하고 황후와 권문세족이 뇌물을 받으며 부패한 관료들을 복직시키려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 문제는 어떻게 하면 좋다는 말인가. 암천대문.”
북리의천은 황후가 항주의 청렴한 관료들에게 덫을 놓으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향화문을 통해 미리 소식을 전해 놨습니다. 공자님은 그래도 일단 항주에 가서 일을 처리해 놓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건 내가 하겠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 하늘이 무섭지도 않다는 말인가. 어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다는 것인가.”
“저도 갈게요. 사조님.”
소청이 나서자 그 옆에서 랑랑이 소청의 팔을 잡아 흔들었다.
“오라버니. 랑랑이랑 같이 안 있고?”
“…….”
소청은 랑랑의 귀여운 얼굴을 보더니 마음이 흔들리는 듯했고 암천대문은 배를 안고 웃어댔다.
“소청아.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제가 너무 믿음직한 모습을 보였는지 이제 랑랑이 저한테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아요.”
귀찮기보다는 자랑스러운 듯한 소청의 말에 북리의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붙잡는 사람 없는 나나 가야지. 아무도 말리지 마라.”
“아진 공자님께서 황성의 일이 끝나는 대로 그곳으로 갈 것입니다. 대협.”
암천대문이 말하자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밤톨만 한 랑랑이 거기에서 소청을 붙잡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가 웃음이 나고 그 웃음이 쉽게 멈추질 않았던 것이다.
산본무관은 삼대 무력부대의 무사와 수련생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검풍대, 검운대, 풍운대.
각각이 사 오십 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어느 한 곳에 특출난 인원을 몰아넣지 않고 전력을 비교적 균등하게 나누었다.
각각의 무력대에 네 개에서 다섯 개의 조가 있었는데 조장을 맡으려면 절정, 대주가 되려면 초절정 이상이 되어야 했다.
수련생들은 하루빨리 수련생 딱지를 떼고 자기가 원하는 무력대에 들어가기 위해 늘 수련에 매진했다.
북리의천은 검풍대를 이끌고 먼저 항주로 떠났고 검운대가 암천대문과 동행했다.
두 개의 무력대가 떠나고도 산본의가의 방어가 어렵지 않았던 것은 그동안 무인들이 끝없이 수련한 결과였다.
풍운대는 직접 임무에 투입되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쉽기도 했지만 현판을 보고 있노라면 자기들이 속해 있고 지켜야 하는 곳이 얼마나 대단한 곳인지 깨달을 수 있어서 아쉬운 마음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 * *
항주가 달라졌다는 것은 멀리서부터 알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마저도 느긋하게 느껴졌고 백성들의 얼굴에는 여유가 넘쳤으며 사람들의 웃음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북리의천과 검풍대 일행을 알아보지 못하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행렬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러다가 몇몇 사람이 먼저 검신을 알아보고 환호하자 모두 즐거워하며 달려왔다.
북리의천과 정의맹은 그들에게 영웅이나 다름이 없었다.
모여든 사람 중에는 직접 북리의천의 도움을 받은 이들도 있었다.
북리의천은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황후와 전직 안찰사가 내는 소문이 헛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을 더욱 확실히 깨달았다.
파직당한 안찰사가 했다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는 사람이 어떻게 생겨 먹으면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을까 했는데 백성들의 모습을 보자 화가 가라앉았다.
그러면서 이곳에 다시는 왜구가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지가 더욱 확고해졌다.
검풍대를 본 사람들은 그들을 신기하게 여겼다.
아무리 강호의 사정에 밝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검풍대의 무인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북리의천이 그들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소개를 해 주었다.
“이들은 산본무관의 검풍대라네. 나와 함께 항주가 평안한지 살피러 온 것이니 친절하게 대해 주게.”
그 한 마디로 족했다.
북리의천이 그렇게 말을 한 이상 잘 대해 주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북리의천이 검풍대와 함께 항주에 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향화문을 통해 흉흉한 소문을 접한 관리들이 성주와 함께 줄줄이 북리의천을 마중 나왔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자기가 그들의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보여 주려는 듯 먼저 말에서 내려 그들에게 예를 갖추었다.
사십여 명의 검풍대원들이 그를 따라 함께 예를 갖추자 장엄한 광경이 펼쳐졌다.
“대협.”
성주와 관리들은 자기들이 더욱 민망해하면서 북리의천을 말렸지만 그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항주의 백성들에게 여러분은 존경스러운 분들이 아닙니까. 자신을 낮추지 마십시오.”
그들은 천외천이라 불리는 검신의 겸손한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대협. 그렇지 않아도 소식을 듣고 마음이 꽤 어지러웠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놀라서 심장이 두근거리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군요.”
안찰사의 말에 북리의천이 인자하게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황상께서 그 일을 이미 알고 계십니다. 지금까지는 황상의 뒤에서 은밀히 일들이 진행되어 왔지만 더 이상은 황상께서 일을 묵과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희도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패한 육부 위에 내각대학사를 세우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참으로 현명하신 판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북리의천과 한 마디라도 더 나누고 싶어 했고 그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저희는 대협께 큰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희는 항주와 운명을 같이 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도저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던 저희에게 대협께서 빛을 보여 주셨습니다. 대협께서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돌려주신 항주를 저희는 목숨을 바쳐서 지킬 것입니다.”
성주는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단호하게 말했다.
항주를 지키는 관료들은 사사로운 이익보다 항주와 백성을 더욱 깊이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듯했다.
“이제는 황후 마마가 보낼 자들을 기다리면 됩니다. 누구를 움직여서 준동할지 아직 모릅니다만 그래도 안찰사 대인이 목표가 될 거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다행입니다.”
“그러면 저희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군사를 보내고 기다리면 일은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자 성주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지금 사용할 수 있는 군사의 수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왜구 때문에 황폐해진 곳을 복구하기 위해 투입되어서 바로 병력을 이동시키려면 시간이 조금 소요될 것입니다.”
“그러면 저와 함께 온 검풍대에게 맡겨 주셔도 됩니다. 항주는 저에게 많은 의미가 있는 곳이니 말입니다.”
북리의천이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소매에서 흑주가 꼬물거리고 나왔다.
자기도 왔다는 듯이.
성주와 관료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지으며 흑주를 반겨 주었다.
북리의천 일행이 나타날 때까지만 해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태산 같던 이들은 이제 그 마음을 내려놓고 진심으로 북리의천 일행을 환영할 수가 있었다.
“그걸 아십니까. 대협? 함정에 빠지게 될 거라는 경고를 들었을 때는 정말 걱정이 됐습니다. 그리고 저희 때문에 실망하실 황상과 대협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렇게 마음이 불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를 믿고 항주를 맡겼는데 힘을 갖게 되면 다 똑같아진다고 생각하면서 실망하실 것을 생각하니 정말 속이 상하고 걱정이 됐습니다.”
북리의천은 그 말이 그렇게 잘 이해될 수가 없었다.
그들도 힘을 다해 해명하겠지만 그때는 이미 황상이나 자신이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까 봐 더 걱정되었을 것이다.
“여러분이 황상께 희망을 드렸을 것 같습니다. 근래에 일어난 많은 일로 인해서 황상의 심기가 크게 어지러워지실 만도 하지 않았습니까. 그 와중에 여러분이 항주를 충성스럽게 다스리고 있었다는 것을 아시게 되었을 테니 다시 희망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실 힘을 얻으셨을 것입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은 큰 선물이라도 받은 것처럼 밝아졌다.
원치 않게 오해를 사고 의심을 받지 않게 됐다는 것만으로 후련해서 그런 듯했다.
검풍대의 대원들은 북리의천의 그런 모습을 본 것이 처음이었고 현장에서 마주하게 된 진실한 모습에 감동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있었지만 단순히 그의 명성과 영향력 때문이 아니라 진심으로 존경해서 사람들이 그의 주위로 몰려드는 것을 보며 자긍심도 커졌다.
* * *
황후의 가문에서 만든 비밀 조직 천령곡의 곡주 관태혈은 은밀히 내려온 가주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수하들을 동원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에 자기가 믿는 수하를 다섯이나 다 데리고 올 필요는 없었지만 요즘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면서 실전 연습을 할 겸, 검에 피를 먹일 겸 최정예라고 할 수 있는 다섯을 모두 데리고 왔다.
그가 듣기로 항주의 관찰사는 신념과 자부심이 대단한 자였고 덫을 놓은 것을 알게 된다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다른 이들은 돈이나 크고 작은 이권으로 유혹해서 마음을 쉽게 조종할 수 있었는데 새로운 항주에서는 유독 크게 잘 통하지 않았다.
안찰사를 향한 수하들의 충성심도 대단해서 자칫 일이 커질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일을 너무 복잡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곡주님. 안찰사를 직접 죽이면 훨씬 쉬운 일이 아닙니까.”
혈기왕성하고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마영루가 불평 섞인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