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264화
태감의 말에 따라 한 남자가 비단으로 만든 보퉁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갔고 황후가 태사의에 앉은 채 고고한 태도로 그를 맞아들였다.
“무슨 일로 나를 보자 했느냐.”
“마마. 소신은 억울하옵니다. 소신은 안찰사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사옵니다. 북리의천과 정의맹과 결탁하여 소신을 음해하고 새로운 세력을 내세워 항주를 장악했사온데 그로 인해 백성들의 원망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새로운 성주가 일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이냐.”
“그렇습니다. 마마. 그들은 왜인들을 내쫓고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선동하고 있사옵니다. 그러나 왜인들은 항주의 백성들에게 발전된 기술을 전수하고 수많은 사업장을 열어 도시를 번성케 했습니다. 지금 일부 사람들이 왜인들을 대하는 태도는 인륜에도 반하고 은혜를 알지 못하는 처사입니다.”
“허나 황상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시니 어찌하겠느냐.”
“마마. 소신을 복권해 주신다면 이제껏 그래왔던 것처럼 성심을 다해 황상 폐하와 마마를 보필할 것입니다. 이것은 미약하나마 소신이 준비한 것으로 황금 다섯 관이옵니다. 복권을 시켜 주시기만 한다면 해마다 황금 다섯 관을 바치겠사옵니다.”
황후의 얼굴에서는 표정의 변화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일이 워낙 비일비재하게 일어나서 감동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황금 다섯 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그런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그곳의 안찰사는 누구이더냐.”
황후가 태감에게 묻자 미리 알아두었던 듯 태감의 입에서 정보가 줄줄 나왔다.
“그자의 비위 사실은 알아냈느냐.”
“그것이…… 다른 이들은 조금만 털어도 말도 못 하게 먼지가 나오는데 항주의 관료들은 그렇지 않사옵니다. 검신과 정의맹의 사람들이 작정하고 검증을 하여 추대한 인물들인지라 꼬투리를 잡기도 어렵사옵니다.”
그러자 황후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왜 있는 것 같으냐. 먼지가 없으면 먼지를 집어넣고 털면 되는 것이다. 그자들의 집에 위조된 은자나 앵속을 숨겨두어도 좋을 것이고 나라에서 금하는 종교의 교리서를 두어도 될 것이다. 그런 것까지 내가 일일이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것이냐.”
“송구합니다. 마마. 즉시 그리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도영은 일이 이미 다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싱글벙글했고 황후는 태감을 향해 손짓했다.
정도영을 데리고 나가라는 동작이었다.
하나의 관직 값이 황금 다섯 관.
그 후로 매해 다섯 관씩을 주기로 했으니 자리가 보장되는 한 황후에게는 점점 더 많은 돈이 들어올 터였다.
황후에게 직접 청탁을 하는 자 외에 황후의 아버지인 연석영 상서의 장원으로 직접 찾아가 청탁을 하는 사람은 훨씬 더 많으니 돈의 흐름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명빈은 어찌하고 있다 하더냐.”
“자백을 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오래 가지 못할 것입니다. 마마.”
“멍청한 계집 같으니.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으냐. 어차피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인지. 왜 그리 미련하게 군다는 말이더냐. 멍청한 것. 멍청한 것!!”
황후와 태감의 말을 들어 보았을 때 명빈을 이미 모처로 빼돌려 가두어 놓은 듯했는데 명빈이 버티자 행여나 황제에게 발각이 되지는 않을까 해서 조금 불안한 듯했다.
어느 때 보면 황제의 존재는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았지만 어느 때는 황제로 인해서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황제가 황후를 확실하게 적대하지는 않으면서도 모호한 태도를 보이는 것 때문에 그러는 듯했다.
“계속 자백을 부인하면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요. 마마.”
황후는 한동안 대답을 하지 않다가 말했다.
“하월을 보내거라.”
“북궁 태감을 말씀이옵니까. 하오나 그자는 아직 확실하게 믿음이 가질 않사온데…….”
“그러니 하월을 보내라는 것이다. 그의 손에 피를 묻혀 놓으면 좋든 싫든 우리에게 협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만 맑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지. 하월이 도착하기 전에 명빈을 죽여라. 그러면 딱 되겠구나.”
황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즉흥적인 생각이었던 듯했는데 꽤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내가 목숨을 위협받을 정도로 위험한 공격을 당했는데도 황상께서는 나를 찾아오지도 않으셨고 심지어 사람을 보내 위로하지도 않으셨다. 하월이 충성을 맹세하기만 한다면 앞으로 하월의 앞길은 내가 보장해 줄 것이다. 아아…… 죽은 구문제독을 대신해서 그가 그 자리에 앉아도 좋을 것 같지 않으냐.”
그 일이 결코 황후의 권한이 아니었는데도 황후는 거만하게 말하고 있었다.
아진은 황후의 농단이 생각보다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자기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계획을 듣지 못했다면 하월이 큰 곤경에 처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희생당한 사람들이 과거에도 많았을 거라는 사실 역시 쉽게 추론할 수 있었다.
“명빈은 어찌 처리하는 것이 좋을지요. 마마.”
“혈루에 맡기도록 하여라.”
“혈루는 이미 루주와 함께 살수 대부분이 죽었습니다. 마마. 남은 살수들이 있겠지만 그들은 점조직처럼 퍼져서 누가 누구인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루주가 죽은 이상 앞으로 자기들의 정체를 밝히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곳이 혈루였다는 말이냐. 그자들이 꽤 쓸모가 있었는데. 그런데 도대체 누가 혈루를 그렇게 만들 수가 있다는 것이냐.”
그들의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린린의 섭혼술에서 시작한 일이 곳곳에 꽤 복잡한 파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 * *
조회를 마친 후 황제는 조용히 시간을 보내며 상소를 살폈다.
그것이 외부적으로 표명된 행보였다.
그가 천마에게 붙잡혀 쉬지도 못하고 글씨를 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제를 찾아왔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린 선이남은 눈물을 흘리면서 웃어 댔다.
만약 린린이 뭔가를 의도하고 그랬다면 황제도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순수한 감탄으로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바람에 황제가 쉴 틈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폐하. 저도 한 번 써 볼까요?”
나중에는 린린이 의욕을 보였고 황제 역시 린린의 글씨가 궁금해서 곧바로 린린을 재촉했다.
[마도 천하]
써 보라고는 하는데 뭘 쓸지 바로 생각나는 것이 없었고 그래도 가장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왔던 숙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그 글자를 일필휘지로 쓰고 나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그것이…… 폐하. 나라를 신교의 발아래에 두겠다는 것은 아니고…….”
“그래. 알고 있다. 아진에게 이미 그 이야기는 들었다. 짐은 마신을 믿지 않지만 신교도들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들었고 그 믿음이 부럽기도 하더구나. 전적으로 의지할 대상이 있다면 편안할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천상천면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너희가 믿는 마신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린린은 황제가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를 해 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가 감격한 채 제 글씨를 보았다.
“그럼 이건 폐하께 드리겠습니다.”
말할 수 없는 자유분방함으로 글자 하나하나가 각자의 획에 따라 만방을 향해 떨치고 일어나는 것 같은 글씨를 보며 딱히 그것을 갖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지만 거절도 하지 못했다.
“신교도에게 팔면 비싼 값을 받고 팔 수 있을 것입니다. 좋아하시는 글귀가 있으면 제가 더 써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아. 제가 구결을 써드리겠습니다. 폐하. 천상제의 구결이나. 아니면 허공섭물이나. 허공섭물이 실제로 그렇게 쓸모가 있는 무공은 아닌데 남들 기죽이기에는 좋지요.”
“린린. 정말 좋은 생각이다. 짐이 왜 이제야 너를 만난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무공이 무엇이냐. 남들 기죽이려고 익히는 것이 아니냐. 그래. 허공섭물의 구결을 적어 주어라. 천상제는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진이에게 업혀서 다니는 게 훨씬 빠르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구결을 아무 곳에나 두어도 되는 것이냐. 린린?”
“무고에도 그것들이 있지 않은지요. 폐하? 그런데 무고의 무공서에 있는 건 눈에 딱딱 붙지도 않을 테니 제 글귀로 보시지요. 제 글씨가 오밀조밀 통통하고 위풍당당해서 정감이 갑니다.”
“그래. 태어나서 이렇게 통통한 글씨는 처음 본 것 같다. 정말 좋은 선물이 되겠다. 허공섭물이라니. 말 안 듣는 자들이 있으면 손으로 잡아당겨서 뺨을 때리고 다시 제자리에 돌려놔야겠다.”
그러자 린린이 호응을 하지 않은 채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러려면 엄청난 수련을 하셔야 합니다. 폐하. 무공에 대성했다고 해도 거기에서도 차이가 납니다. 오라버니를 보시면 그걸 아실 수 있지 않은지요. 같은 검강이라고 해도 어떤 사람은 몸을 양단 내고 그치지만 오라버니의 검강은 땅을 몇 장 깊이로 갈라 버리는 것처럼 폐하께서 말씀하신 걸 하려면 내공 수련도 엄청나게 해야 합니다.”
“그렇구나. 그러면 그냥 화분을 움직여 날려서 머리를 깨야겠다.”
“그 정도를 목표로 삼으신다면 금방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
선이남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이게 과연 정상적인 대화인 건가 하고 깊은 번민에 빠졌다.
잔혹성의 우열을 따지기 어려운 폭군과 천마의 대화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절대적인 악인을 향해서만 그런 짓을 할 거라는 생각에 그나마 마음을 놓고는 있었지만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황제를 보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판에 쓸 글씨는 차곡차곡 완성되었고 린린도 그 옆에서 서탁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열심히 구결을 써 내려갔다.
“너는 다른 곳으로 가서 쓰거라. 린린. 좁지 않으냐.”
“거의 다 썼습니다. 그리고 먹물이 여기에 있으니 같이 써야 하지 않는지요.”
“먹은 새로 갈아오라고 하면 된다.”
“거의 다 썼습니다. 폐하.”
거의 다 쓰기는.
허공섭물의 구결을 알고 있는 선이남은 황제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린린의 패기에 입이 벌어졌다.
“린린. 너는 짐의 말을 전혀 들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정말 거의 다 썼습니다. 폐하.”
두 사람이 툭탁거리는 모습을 보니 괜히 흐뭇한 웃음이 지어져서 웃고 있는데 어느덧 아진이 돌아왔다.
아진은 린린이 허공섭물의 구결을 쓰는 걸 보고 있다가 별 생각 없는 얼굴로 말했다.
“은잠술 구결도 써 드려. 린린. 은잠술이 최고더라. 그동안 내가 왜 은잠술을 안 했었나 싶더라.”
“아아. 그러고 다녔어?”
황제는 무공에 대한 잡지식 하나는 그 자리에 있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고 은잠술이라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이미 그것을 사용해서 무슨 나쁜 짓을 할지 궁리를 하는 것 같아 선이남은 고개를 저어 댔다.
“황후전에 있는 동안 쓸모있는 정보를 많이 얻어 왔습니다. 폐하.”
아진은 안찰사 정도영이 뇌물을 가지고 찾아와서 스승과 정의맹을 모함한 얘기부터 시작해서 황후가 명빈과 하월에게 함정을 파려고 한다는 것까지 한 번에 들려주었다.
“그렇군. 이제 드디어 내가 쓴 글씨와 현판들을 써먹을 때가 된 것 같다.”
무슨 말인가 하며 아진이 바라보자 황제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