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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3화 (263/470)

제263화

263화

“조만간 가주가 너를 부를 것이다. 통쾌하지 않겠느냐. 이제 너에게 소가주가 되어 달라고 사정을 할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바랐던 일이기는 한데 지금의 기분을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 자리를 얻게 될 거라고는…….”

하월은 멍하니 말을 하다 아진을 바라보았다.

혹시 아진이라면 자신이 느끼는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해서 그런 거였는데 아진은 하월이 자신을 보는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아진은 하월과 처지가 질적으로 달랐다.

가문의 크기나 영향력으로 말한다면 이제 산본의가는 북궁세가의 명성을 뛰어넘고도 남았다.

그러나 그는 단 한 순간도 소가주의 자리를 탐한 적도 없었고 산본의가의 소가주는 아진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아무리 시간이 지난다고 하더라도 하월이 느끼는 감정을 아진이 느낄 수는 없을 터였다.

“소가주라. 그 후에는 가문의 주인이 되겠구나. 북궁세가주라면 함부로 할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오랫동안 그것을 바랐겠구나.”

황제의 말에 하월은 고개를 숙였다.

그 말이 맞는데.

숙원이 이루어진 것인데 지금의 기분이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월. 너는 어떤 가문을 만들고 싶으냐.”

“……모르겠습니다. 폐하. 지금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습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호기심을 갖고 해변을 얼쩡거리다가 갑자기 허리까지 들이닥친 바닷물에 놀라 겁에 질린 아이처럼 그는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멀리서 볼 때는 평화롭던 바다였지만 그것이 막상 자신에게 닥치자 겁이 났던 것이다.

“미리 생각하는 게 좋을 것이다. 네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일은 이루어질 테니 말이다.”

“예. 폐하.”

“아진과 이야기를 많이 나눠보도록 하거라. 아. 산본의가의 가모와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도움이 되겠구나. 북궁세가가 그동안은 무가였으나 지금의 상황으로 무가의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겠느냐. 짐은 북궁세가가 너의 시대에 크게 탈바꿈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만.”

하월은 놀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북궁세가를 두고 어떤 계획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지금 막 그런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황제의 커다란 계획에 산본의가가 전제가 되었던 것처럼 북궁세가에 기대하는 것이 있는 듯이 느껴졌다.

“본가가 폐하의 큰 뜻에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드릴 것입니다.”

“기특하구나.”

앞이 보이지 않고 제 감정조차 헤아릴 수 없던 하월은 이제부터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네가 북궁세가의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유일한 자이니 조만간 황궁을 떠나야 할 것이다. 너는 어찌하고 싶으냐.”

“어제 동창 제독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동창에 들어갔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그 소식이 궁금했던 참이라 모두의 시선이 하월에게 향했다.

“그 이야기를 자세히 해 보아라.”

하월은 자기가 창궁무애검법을 펼쳤고 동창 제독이 그것을 알아보았다는 얘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제왕검형을 보여 주더라는 얘기도 했다.

“황공 무고에서 비급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동창 제독의 실력이 그 정도일 줄은 몰랐기에 사실 크게 놀랐습니다.”

“그래. 그럴 것이다. 동창 제독에게 무고를 개방한 적이 있었다. 오랫동안 그 안에 있게 하지는 않았는데 그 시간 동안 그것을 익힌 모양이구나. 아니면 몰래 필사를 해서 나왔을지도 모르지. 아무리 엄격히 금지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틈을 찾아내지 않더냐.”

한동안 이야기가 오갔고 하월은 황후가 피습당한 일을 이용해 명빈을 찍어 내려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황제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짐에게는 황후도, 명빈도 다 의미가 없는데 뭘 굳이 그렇게까지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구나. 황후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다. 짐의 옆에 쓰러져 죽은 사람이 있으면 시신이 짐의 가까이에 있다고 화를 내며 시신을 멀리 내던질 사람이지. 그래도 이번 일은 황후의 뜻대로 되게 놔둘 수는 없겠구나. 내각대학사의 일부터 줄곧 짐을 흔들어 대려고 했으니 이제 황후도 깨닫는 바가 있어야겠지.”

“수많은 사람이 뇌물을 가지고 황후 마마를 찾아옵니다. 폐하. 특히나 항주를 왜구에 내주었던 자들까지 황후 마마를 찾아와서 복권을 청하고 있습니다.”

“짐이 파직한 자들이 황후를 찾아와서 복권을 요청한다. 그자들에게는 짐이 아니라 황후가 하늘인 모양이구나.”

황제의 목소리는 고저 없이 나왔지만 그의 기분이 어떨 거라는 것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하월은 말할 기회가 있을 때 전부 다 말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황제의 표정을 살피고 말했다.

“황후 마마는 좌부도어사 정 대인과 밀회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폐하.”

“저런…… 얼굴은 짐이 더 나은데. 젊어서 좋은 건가? 취향 한 번 독특하군. 그리고 그자가 짐보다 늙어 보이지 않느냐. 차라리 짐보다 나은 자를 정인으로 삼았다면 이리 기분 나쁘지는 않았겠다.”

황제가 허공을 보며 말했는데 그의 얼굴에 곧 웃음이 떠올랐다.

“어찌 됐건 황후야말로 즐거운 삶을 사는 것 같군.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하월. 네가 황후전의 태감으로 있었던 것이 짐에게 크게 유익했구나. 그런데 네가 짐에게 그런 이야기를 고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도 황후가 밀회를 나눴다는 말이냐.”

“…….”

하월은 말을 하지 못했다.

황제의 말대로였다.

그런데도 황후가 조심하지 않은 것은 하월이 황제에게 고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나 황제가 안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전자보다는 후자일 가능성이 더 컸고 그게 맞다면 황후가 황제를 얼마나 가볍게 생각하고 있는지 단편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었다.

“이 일을 어찌 해결하면 좋겠느냐. 아진아.”

“린린의 섭혼술로 자백을 받으시면 어떠실지요. 폐하. 황실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황후 마마를 폐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너무 자비롭다. 짐은 황후를 그렇게 쉽게 놔 주고 싶지 않구나. 폐위로는 부족하다.”

아진은 그동안 황제의 친절한 모습만 보아 와서 자기가 그의 진면목을 잊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는 안 되겠다. 겨우 그렇게 하는 걸로는. 황후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을 하나씩 전부 치우고 완전한 고립감을 느끼게 할 것이다. 생각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무릎을 꿇게 할 것이다. 마실 물 한 방울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황후도 알게 되겠지. 그동안 자기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말이다.”

아진은 황제의 계획을 다 알지는 못했지만 황제가 일단 작정을 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동안은 고관대작으로 대변되는 황후의 세력이라는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아진의 손을 잡은 채 그것을 뛰어넘어 보려고 하는 듯했다.

“린린. 어떻게 생각하느냐. 짐이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기대됩니다. 폐하.”

“그래. 짐도 그렇다. 잘 하면 내각대학사의 문제는 황후의 축출과 함께 자연스럽게 해결이 되겠구나. 그러고 보니 새로운 구문제독에 누가 좋을지 그것도 생각해야 하고…… 정해야 할 것이 많구나.”

그의 얼굴에는 희미한 기대감마저 보였다.

아진을 알지 못했을 때는 꿈도 꾸지 못하던 일이었다.

-아니되옵니다. 저하.

-아니되옵니다. 폐하.

-신은 결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사옵니다.

그가 하려는 일을 사사건건 막고 발목을 잡으며 수많은 신료 앞에서 모욕감을 안겨 주던 장인이자 이부상서인 연석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얼굴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숨이 가빠지고 불안하고 초조해졌는데 어느 날부터 그런 증세가 사라졌다.

그랬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웃을 수도 있었다.

뱀 앞의 두꺼비가 독을 품다 보니 이제는 능히 제가 뱀과 겨뤄 볼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이제 글을 쓰시면 어떠신지요. 폐하?”

린린은 오직 현판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말했다.

황제는 이곳에서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그리하자. 산본의가에 오는 이마다 짐의 글씨를 볼 수 있으니 이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느냐.”

“표국과 무관, 철방과 전장도 그럴 것입니다.”

린린은 그가 써야 할 것이 그 외에도 많다는 걸 상기시켜 주려는 듯 말했다.

“그래. 알고 있다.”

희한한 일이었다.

벼르고 별렀던 개혁을 단행하려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본가의 현판을 써 달라고 재촉하는 린린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건지 아진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황제는 머리가 차게 식으면서 분한 감정이 사라지고 계획이 더 날카로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린린이 그것을 노리고 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만 도움이 되었다는 것까지 부정할 수는 없었다.

* * *

아진이 황궁에 왔다는 사실은 꽤 오랫동안 비밀이 유지되었다.

그것도 이전에 비해 달라진 것 중 하나였다.

예전이라면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이 황후전에 전해지는 것이 자연스러웠고 궁인마다 죄책감이나 두려움도 없이 그 일을 황후에게 전했는데 이제는 각자 위험을 감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향화문이 황궁 깊숙이 침투한 것이 변화의 가장 큰 요인이었다.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대거 투입된 새로운 궁인들의 출신을 알지 못했는데 그들 중에는 향화문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들은 외부의 소식을 황상에게 빠르게 전하는가 하면 황궁 안에서 정보를 수집해 향화문과 산본의가에 전했다.

그렇게 모인 소식으로 아진과 산본의가는 누구보다 정보력에서 앞서나갔고 그 결과 문제가 생기기 전에 선제적으로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수많은 인명을 살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함부로 황상의 신변잡기를 고한 자들은 그들이 저지른 일이 낱낱이 까발려져서 어떻게든 대가를 치렀고 그런 일이 반복되자 스스로 입단속을 하게 되었다.

아진은 극한의 은잠술을 전개해 사람들 틈을 다니며 분위기를 살피고 어떤 것이 뜬 소문이고 어떤 것이 진실인지 가려냈다.

린린도 함께 왔으면 했는데 린린은 황제가 글씨를 쓰는 걸 구경하는 재미에 푹 빠져서 아진이 무슨 말로 설득하려고 해도 따라오려고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황제가 자기 좀 살려 달라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지만 아진도 별수가 없었다.

‘은잠술도 이런 식으로 쓸모가 있네.’

여러 무공을 알아도 자기에게 꼭 필요한 게 아니면 관심이나 수련을 등한시했는데 황궁에서 정보를 모으기에는 은잠술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곳곳을 다니다가 마침내 황후전에 이르렀다.

그곳은 다른 곳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북새통을 이루었다.

오히려 황제의 집무실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오가는 듯했고 하월이 말한 대로 뇌물을 가지고 와서 청탁하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아진은 그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황후가 그들의 문제를 어떻게 처리하는지 지켜보기로 했다.

황제가 황후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비위를 도려내기로 한 것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오해가 있으면 안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해의 여지는 그리 많지도 않았다.

“마마. 항주의 전 안찰사 정도영이 들었사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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