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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2화 (262/470)

제262화

262화

숱한 죽음을 보아왔지만 그 일이 저에게 일어날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피 분수가 솟구치는 몸을 그렇게나 많이 봐 왔지만 그 일이 제 몸에 벌어질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는 벼락같이 찾아든 죽음에 당혹감을 느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를 도우러 왔던 이들은 이미 시신이 되어 바닥을 틈 없이 메우고 있었다.

호수처럼 고인 붉은 핏물 위에, 살수들의 걸음이 파란을 만들었다.

흐릿해져 가는 시선에 흑빛 어둠이 밀려들었다.

그나마 죽음이 고통의 끝이라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희미하게 움직이던 손가락마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닿자 살수들에게도 변화가 생겼다.

의뢰인의 죽음은 임무의 완수를 의미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 존재의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과 마찬가지였다.

살수들은 그곳을 나갔고 밖에 있던 경비 무사들 몇몇이 그들을 발견했다.

북궁천영이 불렀을 때는 그 자리에 없던 이들이었다.

“누구냐!”

“웬 놈이냐!!”

그와 함께 침입자가 있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세가 내에 요란스럽게 울려 퍼졌고 무사들이 두 살수를 향해 짓쳐들었다.

서걱-. 서걱-.

자비 없는 검격이 두 살수의 몸 위로 떨어졌다.

팔과 옆구리, 가슴과 다리 할 것 없이 수십 개의 검상이 난잡하게 그려졌다.

불컥 치솟은 피는 멈출 줄을 몰랐다.

북궁천영의 처소에 있을 때만 해도 그러지 않았는데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소가주님을 살펴라! 이놈들이 소가주전에서 나왔다!!”

몇몇 사람들이 큰소리로 외치고 섬전처럼 움직였다.

소가주전으로 향하면서도 그들은 설마라고만 생각했다.

소가주전에서 나온 살수들의 검에 피가 묻어 있었지만 이렇게 별 볼 일 없는 실력을 가진 그들이 소가주를 죽였을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벌어진 참상은 그들의 믿음을 배반했다.

“소가주님!!”

한두 사람의 고함과 비명이 허공을 뒤덮었다.

멀리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세가가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온 것은 구문제독의 힘 때문이었는데 그 거대한 산성이 쓰러졌던 것이다.

소식은 빠르게 퍼졌고 그것은 가주의 귀에도 들어갔다.

가주는 미친 듯이 소가주전으로 달려왔다.

가주전에서 소가주전으로 달려오는 시간 동안 그는 몇 년이나 늙어 버린 것 같았다.

“이게…… 이게 무슨 일이냐. 이게 다 무슨 소리라는 말이냐!!”

그의 노쇠한 몸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는 것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줄도 모르고, 이름 없는 벌레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 * *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것은 향화문이었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태감 중 한 사람이 향화문의 문도 암천대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 때문에 궁 밖에서 수집된 정보 중에 시급을 다투는 일도 쉽게 전달이 되었다.

각 단계에 향화문의 문도들을 두어 그들이 서로 소식을 전달하게 했던 것이다.

그보다 더 빠르게 전달돼야 할 경우에는 선이남이나 남이천을 통해 곧바로 황제에게 전달하기도 했는데 북궁천영이 죽었다는 소식은 전자의 방법으로 여러 사람을 거쳐 암천대문을 통해 전해졌다.

암천대문이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황제는 중요한 소식이 들어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주위에는 황제가 글씨를 써놓은 종이가 가득했다.

암천대문은 그걸 보고 이게 다 뭔가 하면서 헛바람을 들이키다가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듯 소식을 전했다.

“폐하. 북궁세가에 괴변이 일어났다 합니다. 소가주 북궁천영이 죽었습니다.”

“무어라? 구문제독이 말이냐! 누가 그랬다는 말이냐.”

황제는 붓을 든 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직은 좀 더 알아보는 중이오나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자객이 침입한 것 같습니다. 북궁천영을 지키려다 세가의 무인 여럿이 같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자객이라는 자들이…….”

암천대문은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터무니없는 소리라서 그 말을 잘못 전했다가는 자기에게 불똥이 튈 것 같았던 것이다.

“무엇이냐.”

“그자들이…… 죽고도 다시 살아났다고…….”

그러자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진과 린린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혈루에 살행을 의뢰한 자가 구문제독이었던 거군.”

아진이 이미 아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을 하자 암천대문은 크게 안심이 되었다.

“그러면 그게 당연한 일인 것인지요. 공자님?”

“예. 저희가 살수들에게 섭혼술을 써서 조종해 놨거든요. 살행을 의뢰한 사람을 알아내서 죽이라고요. 그 자들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바로 알아들으시는 건가요?”

“죽고도 다시 살아났다고 해서요. 제가 그러라고 했거든요.”

그렇게 말을 해 놓고 해맑게 웃는 아진을 보면서 암천대문은 따라 웃지 못했다.

이 사람이 같은 편이니 망정이지 누가 그런 식으로까지 섭혼술을 극한으로 펼칠 수가 있다는 말인가.

아진 공자가 무공을 익히면 이미 그 무공은 처음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채 완전히 다르게 뜯어 고쳐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듯했다.

“구문제독이 그랬다니……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것 같기도 하구나. 그자처럼 이 일에 부합하는 사람도 없었지. 여러 이해관계가 동시에 맞아떨어졌고.”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오른팔을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같은 자세로 앉아서 글씨를 그렇게 오래 썼으니 힘이 들만도 했는데 한 장 한 장을 쓸 때마다 이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주변에서 열렬한 반응이 나오는 바람에 그만두지를 못하고 있었다.

아진의 술수에만 넘어가도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는데 린린까지 가세하자 이러다 자기도 두 사람의 섭혼술에 넘어가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진지하게 들었다.

암천대문은 일단 자기가 할 일은 마쳤다고 생각하며 공손하고 고개를 조아리고 그곳을 물러났다.

“린린. 짐에게는 섭혼술을 하면 안 된다. 알겠느냐. 짐의 글씨가 아무리 인기가 좋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글씨만 쓰게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황제의 말에 린린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았다고 말했다.

그런 말에 그렇게 대답을 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어떻게 자기가 그런 짓을 하겠냐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그냥 순순히 고개만 끄덕이고 있는 게 이상해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폐하께는 제 섭혼술이 통하지 않습니다.”

린린이 말을 하더니 아차 하는 표정을 짓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이미 해 봤는데 안 통하더라는 것 같은 그 말투는 뭐지?”

린린은 황제가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몇 번 황제를 향해 섭혼술을 시도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마다 실패했던 것이다.

대단한 일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황제가 알아차린 것을 모르도록 되돌리려고 한 거였는데 그때마다 황제는 강하게 거부하며 스스로 벗어났다.

“폐하야말로 대단한 분이십니다.”

린린은 이미 들킨 것 같다고 생각하며 비굴하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북궁세가의 공자는 하월 공자뿐입니다. 폐하.”

아진이 적시에 그 말을 해 주자 린린이 고맙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하월의 운명도 참으로 재미있지 않으냐. 가주의 인정을 받기 위해 그렇게 애를 쓰더니 이제는 저절로 소가주가 되겠어. 가주도 지금까지와는 태도가 달라지겠구나. 구문제독이 있었을 때는 하월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 아니냐.”

“하월 공자는 아직 이 사실을 모를 것입니다.”

“그래. 하월을 부르거라. 재미있겠어. 어서 이야기해 주자.”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황제의 생각도 분주하게 돌아갔다.

구문제독의 빈자리를 두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보이지 않는 전쟁을 치를지 알 수 없어서였다.

* * *

수많은 사람이 분주히 소문을 날랐다.

그리고 마침내 황후도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

“구문제독이 죽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 누가 감히 북궁세가에 침입해 그를 죽일 수가 있다는 말이냐!”

큰소리로 고함을 치던 황후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하월이 떠올랐던 것이다.

하월이 태감이 되어 그곳에 있는 것은 북궁천영 때문이었다.

하월에게 화가 난 북궁천영이 하월을 모욕하고자 그를 거세시키고 환관으로 만들어 버린 게 아니던가.

“이런. 이런. 구문제독이 무슨 짓을 했다는 말인가. 자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면서 너무 섣부르게 화풀이를 해 버렸던 거군. 이제 그 가문의 대는 누가 잇는다는 말인가.”

하월이 환관이 되기는 했지만 거세는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황후였기에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하월은 지금 어디에 있느냐.”

“황상께서 찾으셔서 급히 그곳으로 갔습니다. 마마.”

황후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그 일은 어찌 되었느냐. 감히 나를 공격한 놈들이 누구인지 알아냈느냐.”

“그것이 아직…… 많은 이들이 조사에 나섰지만 화살을 날렸을 만한 곳에 가도 아무 흔적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명빈은 어찌하였느냐.”

“그 일을 구문제독이 맡아서 해 주기로 했는데 그렇게 되어 버려 차질이 생길 것 같습니다. 마마.”

“어찌 그런 일이…….”

정치적인 동지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죽음은 황후에게 그저 재미난 이야깃거리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그의 부재로 인해 자신이 계획한 일에 차질이 생긴다고 생각하자 갑자기 화가 났다.

“왜 하필 이럴 때 죽는다는 말이냐. 왜!”

황후의 표독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태감은 고개를 조아렸다.

“나만 당하고 말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일이 흔하게 벌어지는 것도 아니지 않으냐. 반드시 명빈을 찍어내야 한다. 기회도 좋고 말이다. 나에게 청탁을 하러 왔는데 내가 만나 주지 않자 앙심을 품고 나를 해치려 했다고 하면 될 것이야. 그렇지 않으냐.”

“그렇습니다. 마마.”

그러나 황후는 입맛이 개운치 않았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이 함정을 완벽하게 만든 것 같은데 자꾸만 일이 틀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 * *

황제의 앞으로 간 하월은 처음에 그가 무슨 일로 부른 것인지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잘못 짚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동창에 가서 동창 제독을 만났기에 그 일이 어떻게 되었는지 물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갑자기 북궁천영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북궁천영이 죽었다고 했다.

좋아했던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생 그를 뛰어넘고 싶어서 얼마나 아등바등 애써왔던가.

그러고도 절대로 뛰어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며 좌절하고 미워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했던 사람이었다.

북궁마영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

심지어 어떤 때는 가주보다 더 위대하고 커 보인 사람이었다.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그래도 충격은 충격인 모양이구나.”

그사이에 더 많은 글씨를 써 놓고 황제가 말했다.

이 정도 썼으면 쉬어도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현판 글씨를 써야 했다.

“…….”

하월은 황제의 말에 뭔가 대꾸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바로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 제 감정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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