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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60화 (260/470)
  • 제260화

    260화

    “진검을 가져다주고 천라수가 상대하거라.”

    그 말에 한 남자가 앞으로 나왔다.

    그는 이미 진검을 든 채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월이 오기 전에 미리 이야기가 되어 있었던 듯했다.

    하월은 어떤 무공으로 그를 상대할까 하다가 창궁무애검을 펼치기로 했다.

    단순히 멸문한 남궁세가의 검법, 그것도 세가의 아무에게나 전수되지 않던 검법을 아는 사람은 없을 거라는 우연에 기댄 것은 아니었다.

    동창의 눈에 확실히 각인되기 위해서는 자기가 가진 것을 제대로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였고 그러려면 대충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근래 들어 해 왔던 것이 창궁무애검법이었기에 다른 것으로 상대하는 것이 오히려 더 어렵기도 했다.

    “천라수와의 공방을 30초 이상 버티면 너를 인정하겠다.”

    “예.”

    눈앞에 서 있는 남자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는 몰라도 그가 아진을 넘어서지 못할 거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래서 하월은 어떤 긴장감도 없이 검을 들었다.

    천라수는 하월이 아무 긴장감도 없이 자신을 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모습을 보고 놀라는 얼굴은 아니었다.

    후원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그도 역시 들은 것이 있었고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버거운 상대가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여겼다.

    곳곳에 동창들이 서서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았다.

    대부분이 천라수의 선배들이었고 그들은 구문제독의 동생이 이곳에 와서 설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가 동창이 된다고 하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밟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천라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순간적으로 푸르스름한 검기가 검에 덧씌워졌다.

    천라수는 이제 갓 삼십 대에 진입한 듯했고 그런 자가 벌써 검기를 발현할 수 있다는 것은 상당한 성취라고 할 수 있었다.

    그동안 주위에서 평범함을 뛰어넘는 괴물들을 너무 많이 봐 와서 그렇지 이 정도라면 확실히 칭찬할만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하월은 남의 성취를 축하해 주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의 진검에 순간적으로 검강이 덧씌워졌다.

    “……검강!”

    누군가 비명을 토하는 것처럼 그 말을 외쳤다.

    하월은 검을 앞으로 든 채 빠르게 천라수를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사람들은 하월이 펼치는 검식이 무엇일지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 동창 제독의 입에서 낮은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저자가 어찌 창궁무애검을 안다는 말인가…….’

    황궁에는 무공 비급서를 모아둔 무고가 있었다.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동창 제독의 자격으로 그는 몇 번 그곳에 들어간 적이 있었다.

    안에 들어갈 자격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체류할 수 있는 시간은 길지 않았는데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그는 남궁세가의 절기들을 엿보았다.

    구결이 심오해서 한 번 무공서를 본 것으로 무공을 익히거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형을 상상할 수는 있었다.

    그랬기에 그의 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 창궁무애검법의 정수라는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하월은 창궁무애검을 제 옷처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걸치고 있었다.

    몸의 모든 곳이 창궁무애검을 펼치기 위해 조율되고 다듬어진 것처럼 한없이 자유로웠다.

    ‘무공을 일찍 시작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데 어떻게 이런 것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창공무애검 중에는 막대한 내공의 양이 필요한 초식도 있었는데 하월은 그것도 전혀 어려워하지 않은 채 펼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많은 내공이 이동해야 하는 구간에서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펼쳐냈던 것이다.

    하월의 단호한 검은 천라수의 가슴팍을 노리고 들어갔다.

    천라수는 검을 나눈 지 몇 번 만에 하월이 절대 자신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고 도망치지도 못하고 하월의 검에 난자당하려는 순간 제독이 다른 이에게 눈짓을 했다.

    대련하는 도중에 합의도 없이 상대를 바꾼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었지만 그의 눈짓을 받은 이는 곧 검을 들고나와 천라수의 자리를 대신했다.

    하월은 전혀 불쾌한 기색도 없이 상대를 바꾼 채로 싸웠다.

    자기가 보인 것이 상상을 뛰어넘었기에 그렇게 한 거라고 여겼고 그에게는 좋은 징조로 느껴졌다.

    하월은 그 시간을 통해 자신도 얻는 게 있기를 바랐다.

    ‘내공의 운용. 거기에서 자꾸 막혔었지.’

    수준을 갖춘 자가 있다면 그자를 상대로 해서 기꺼이 제 한계를 알아보고 그것을 뛰어넘고 싶었다.

    하월이 바닥을 차고 뛰어오르자 상대 역시 그를 향해 짓쳐들었다.

    두 사람의 검이 불꽃을 튀며 부딪히고 허공에서 폭음을 일으켰다.

    “…….”

    힘에서 밀리지 않는 것을 보고 하월은 섬뢰를 사용해 볼 생각을 했고 그 상태에서 섬뢰를 발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굴렸다.

    격전이 벌어지는 중이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겠지만 이리저리 생각해 가면서 다음 것을 내놓을 수 있을 만큼 거기에 적합한 상대였다.

    마침내 하월의 검에서 네 줄기의 섬뢰가 흘러나가자 상대가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

    동창 제독의 검미가 찌푸려졌다.

    창궁무애검과 달리 조금 전의 섬뢰는 하월이 능숙하게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던 것이다.

    익숙하지도 않은 것을 꺼내 시험 삼아 해 본 것임을 알고 동창 제독은 기분이 상했다.

    지금 하월을 상대하는 흑선이 누구던가.

    동창 제독이 직접 발굴하고 직접 무공을 전수한 그의 애제자였다.

    그런 흑선이 하월에게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선의 주력이 독과 비수를 사용하는 암기술이었고 그것들이 대련에서 허용되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동창 제독은 그 순간 그것을 허락하는 게 좋을까 할 정도로 마음이 흔들렸다.

    그러나 흑선은 하월과의 대련이 싫지 않은 듯, 하월을 상대로 자신이 가진 것들을 차근차근 드러냈다.

    한 번의 대련을 통해서 그동안 막혀있던 것이 무너지기도 하고 한 단계 성장할 단초를 얻게 되기도 하는 법이었는데 흑선에게는 그 순간이 기연이었다.

    하월도 흑선이 자신과의 대련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속도를 맞춰 주었다.

    상대를 죽이려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증명해 보여야 했기에 그렇게 하는 게 유리해서였다.

    두 사람의 검무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나갔다.

    하월이 흑선을 끌어 주었고 흑선의 검 끝이 점점 과감하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흑선이 우뚝 멈췄고 하월도 검을 거두었다.

    동창 제독이 말을 해야 했지만 흑선이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장내에 있던 모두가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동창의 대선배가 이제 갓 들어온 환관과 검을 겨루고 거기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동창 전체로 보면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었다.

    특히나 작금의 상황에서 위험한 임무에 자주 투입되는 그들에게는 고수가 벽을 깨고 성장하는 것이 더더욱 절실했다.

    “나는 흑선이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흑선이 말했다.

    대련을 하던 중이라 일부러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온 것임을 알아차리고 동창 제독은 그에게 폐관수련을 명했다.

    “감사합니다.”

    흑선은 그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지 알았고 그대로 사라졌다.

    그것으로 하월에 대한 처분은 결정이 되었다.

    “신기한 일이군.”

    동창 제독은 하월을 바라보며 말하고 다른 이들을 물렸다.

    “그것은 창궁무애검이었다. 내가 본 것이 맞느냐.”

    “그렇습니다.”

    하월은 역시 알아차렸나보다고 생각할 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것을 누구에게서 배웠느냐.”

    “기연을 얻었습니다.”

    “대답하지 않겠다는 말이군.”

    “대답하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송구합니다.”

    “아니다.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느냐. 나는 그것을 황궁의 무고에서 보았다. 거기에서 본 남궁의 절초는 그것만이 아니었지.”

    하월은 그가 무엇 때문에 그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었다.

    “다른 것도 보일 수 있느냐.”

    “예.”

    “나와 대련을 해 볼 수 있겠느냐.”

    동창 제독이라고 해서 그의 무위가 흑선보다 월등히 뛰어날 거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동창 제독이라는 자리는 무위의 수준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얻은 자리일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월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무공을 익힌 자에게 영약만큼 중요한 것이 무공 비급이고 동창 제독에게는 거기에 접근할 기회가 많았다는 사실이었다.

    출발선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뒤에서 시작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런 부분에서 특혜를 누릴 수 있다면 월등한 성장을 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 증거가 바로 하월 자신이 아니던가.

    하월이 그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이것은 내가 생각한 제왕검형이다.”

    동창 제독은 검을 휘두르며 말했고 하월은 거친 흥분감이 제 몸에 서서히 퍼지는 것을 보았다.

    같은 비급을 보고서도 각자가 이해하는 것이 달랐다.

    깨달음이 다르고 생각하는 것이 달라서였는데 두 사람은 검을 들고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생각을 들여다보았다.

    연달아 폭음이 나고 불꽃이 튀었다.

    그들은 호적수를 만났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그 기회를 그대로 날려 버리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기뻤다.

    이런 기회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은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한계를 뛰어넘었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50초가 넘어가는 공방이 이어졌다.

    동창 제독은 동창의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놔두기만 한다면 이 괴물은 70초건, 100초건, 혹은 200초라도 버틸 것 같았다.

    200초의 공방 끝에 누더기가 되는 사람이 누구일지도 확실히 말을 하기가 어려웠다.

    내부가 황폐해지도록 실컷 검을 휘두르고 나서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검을 내렸다.

    서로 탐색은 마쳤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문이 어디인지는 끝내 밝힐 수가 없겠느냐.”

    “송구합니다.”

    “좋다. 구문제독과의 관계는 어찌 이해하면 되겠느냐.”

    “제 형입니다만 저를 죽이고 싶을 것입니다. 저에게는 두 형이 있었고 작은 형님은 제가 죽였습니다.”

    “…….”

    동창 제독이 하월을 보다가 마침내 광소를 터뜨렸다.

    “재미있는 아이로군. 그동안 황상에게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보면서는 그냥 바보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런 말을 들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부정할 수 없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는 바보였습니다.”

    “그래. 지금은 아니고. 그 말이 맞는 것 같다. 다행이야. 바보였을 때 만났다면 난감했을 것이다.”

    동창 제독은 일단 하월의 실력을 알게 된 후부터는 그를 공정하게 대해 주었다.

    하월이 원한 것도 딱 그 정도였기에 그는 마음을 놓았다.

    “동창에 들어오너라.”

    “감사합니다.”

    “바라고 있었던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황상을 보필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월은 말을 하고 동창 제독을 바라보았다.

    동창이라면 황상을 보필할 수 있는 자리일 거라고 생각해서 그랬다는 듯이.

    “그래. 잘 하였다.”

    “그러면 이제 앞으로 황후전의 일은 어찌해야 하는지요.”

    “두 가지 일을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앞으로 너는 동창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황후전에 오래 붙어 있지도 않았던 터라 황후전에 있는 게 좋았다거나 싫었다는 감회도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동창에서 생활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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