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9화
259화
황제도 하월이 급한 것을 알았는지 아진에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천마신교의 마공에 대해서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었는데 짐은 린린과 얘기를 나누고 있겠다.”
황제의 말에 하월의 표정이 환해졌다.
아진도 하월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기에 그렇게 자리가 마련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어찌 진행 중입니까. 하월 공자. 동창에서는 접근했습니까?”
“아직 아닙니다. 제가 북궁세가의 사람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제 실력을 보일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런 기회라는 게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라서 난감합니다. 가만히 서 있다가 갑자기 초식을 펼칠 수는 없지 않은지요.”
“그것도 그렇군요. 그러면 실력을 드러낼 정도의 공격을 받으셔야겠습니다.”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건 일단 놔두고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 보세요.”
말이 떨어지자 하월은 그동안 궁금했던 것들을 물었다.
일단 한 번 실전 경험을 했다고, 전과는 다른 생생한 질문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그 질문이 나오기는 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만큼 초식이 숙련되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가 아진은 기쁜 마음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동작이 이어질 때 내공을 운용하는 것은 자꾸 반복해서 연습해 봐야 합니다. 할 줄 안다고 생각하는 걸로는 안 돼요. 가만히 있어도, 의도하지 않아도 몸이 저절로 움직일 정도로 혹독하게 수련을 해야 하지요. 수련밖에는 답이 없습니다.”
“그렇군요.”
하월은 전에 비해 눈빛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전에는 생각이 많고 복잡해 보이던 눈빛이 이제는 훨씬 맑아진 느낌이었다.
“목표를 단순화하십시오. 바르게 가고 있으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됩니다. 공자는 지금 잘하고 있습니다.”
“…….”
그때까지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듣고 하월이 울컥해져서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얼마나 그 말을 듣고 싶었던가.
아진에게 듣고 싶은 것은 아니었고 가주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서 쉼 없이 애쓰고 달려왔던 시간이 떠올랐다.
“내일도 해야 할 일이 있을 텐데 이만 가시지요.”
“예…….”
하월은 아진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런 하월을 보며 아진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그리고 결국 말을 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예상했다.
아진의 주위에는 유독 속내를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도 그런 사람들에게 익숙해졌다.
황궁의 밤은 소리 없이 찾아와 점점 더 짙어졌다.
어디선가 이름을 알 수 없는 새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 *
황후전의 아침이 밝았다.
문안 인사를 위해 명빈이 들었다는 말에 황후가 냉정한 웃음을 지었다.
“청탁을 하려는 게지. 제 오라비의 자리를 뺏겼으니.”
황후는 뇌물을 싸 들고 와서 관직을 사고자 하는 이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줘야 했고 없던 자리를 만들려면 누군가의 자리를 뺏어야 했다.
자리도 만들고 정적이 될 수 있는 이를 미리 제거하는 효과도 노리며 몇 개의 자리를 비우도록 하자 당장 명빈이 찾아왔던 것이다.
곳곳에 숨겨 둔 사람들이 관료들의 비위 사실을 모아 왔기에 적시에 터뜨리기만 하면 관료의 목 하나를 날리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명빈의 오라비라고 해서 청렴하게만 살아온 것은 아니고 알량한 총애를 빌미로 그동안 꽤 많이 해 먹었다는 사실을 황후는 이미 파악해 놓고 있었다.
“아직 기침하지 않았다고 하여라. 오늘은 명빈을 보지 않을 것이다.”
“예. 마마.”
태감이 나가자 황후는 태감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며 기세등등했던 명빈의 모습을 떠올리자 권력이 얼마나 무상한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니지. 그것은 명빈이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야. 나는 지금도 굳건하지 않은가. 명빈이야 제 주제도 모르고 설쳐대서 그런 것이고.’
명빈 때문에 괜히 기분이 가라앉아서 황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행차를 준비하여라. 후원을 거닐 것이다.”
“예, 마마.”
준비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빠르게 움직이고 순식간에 모든 것이 갖추어졌다.
황후는 잠시 기다렸다가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되었다.
그녀가 나가자 그곳에 하월이 서 있었다.
황후는 경멸 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은 채 하월을 바라보았다.
윗전이 그리하자 다른 이들 역시 하월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았지만 하월은 그런 태도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황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할 수는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있기는 했지만 굴욕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후는 그녀의 앞에 어떤 일이 준비되고 있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가 그녀와 권문세가에 철퇴를 가하기 위해 지금 얼마나 철두철미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도.
그것을 알고 있는 하월이 황후의 시선 앞에서 주눅 들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하월. 내가 네 덕을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황상은 보필하기 까다로운 분이 아니더냐.”
황후의 말에 하월은 허리만 한 번 숙여 보였을 뿐 별말을 하지는 않았고 황후는 재미가 없다는 듯이 그의 곁을 지나쳐 갔다.
수십 명이 이미 황후전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황후가 산책하는 것 때문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동원되는 것을 보면서 하월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인력 낭비가 어디 있냐고 생각한 것이다.
수많은 인원이 황후의 곁을 첩첩이 싸고 행차가 시작되었다.
지난 밤늦게까지 수련에 수련을 거듭하던 하월은 전날 아진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실력을 드러낼 정도의 공격을 받아야겠다는 말을 다시 떠올린 것은 행차가 건청궁 후원을 빠져나갈 즈음이었다.
어디에서 날아든 건지, 갑자기 폭우처럼 쏟아진 화살이 하늘을 뒤덮고 사람들을 향해 떨어졌다.
기겁한 금의위와 동창이 검을 휘둘러 화살을 막았지만 황후를 향해서는 나아가지도 못했다.
조금만 앞으로 가려고 해도 마치 발을 묶으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처럼 집중적으로 화살이 그 자리에 쏟아졌다.
화살이 쏟아지는 순간 하월은 아진이 한 말을 떠올렸고 그것이 사람들의 앞에 자신의 실력을 증명해 보이라는 자리임을 깨달았다.
그는 옆에 있던 금의위사의 검을 뺏어 들고 바닥을 차고 올라가 화살을 베어냈다.
그의 검에서 검풍이 날려 한꺼번에 날아오던 화살 무더기가 잘려나가자 잠시 틈이 보였고 금의위사와 동창은 화살을 날린 이들을 찾는다며 몸을 날렸다.
“하월. 나를 지키거라!”
느닷없는 공격에 정신이 반쯤 나가버린 황후가 하월을 불렀고 그는 그녀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로도 몇 번 화살 비가 쏟아졌다.
그것은 하월을 위해 연출된 무대였을 뿐이었기에 그를 초조하게 만들지 못했다.
“하월. 내가 알기로 너는 무공을 익히지 못했을 텐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
화살 비가 멈춘 틈을 타 황후전으로 급히 돌아간 황후는 하월을 붙잡아두고 물었다.
“순탄치 못한 삶을 살다 보니 그리되었습니다.”
“저런. 목숨을 지키려고 익힌 모양이구나.”
“그렇습니다. 마마.”
“잘하였다. 장하구나. 네가 아니었으면 오늘 내가 큰 변고를 당할 뻔하였다. 내 너에게 큰 상을 내릴 것이다. 앞으로 내 곁을 지키거라.”
“소신도 그리하고 싶습니다만…….”
하월은 황상이 찾는다면 자기도 별수 없다는 뜻을 내비치며 조심스럽게 말했고 황후도 그것까지는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황상의 부름을 모른 척하라고 내가 어찌 말하겠느냐. 그래도 그런 일이 아니면 내 곁에 머물도록 하여라.”
“예, 마마.”
그 때문에 더 귀찮아질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했지만 아진이 의도한 일은 확실히 일어났다.
동창에서 하월에게 접근을 해 왔던 것이다.
* * *
은밀히 하월을 데려간 태감은 가는 동안 하월을 자주 힐끔거렸다.
그 역시 행차 중에 하월이 화살 비를 막아낸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내내 의문을 품었다.
신분이 확실했기에 더 행보가 의심스럽던 하월이었다.
하늘의 새도 떨어뜨린다는 말까지 듣던 북궁세가의 공자가 환관이 되었다.
구문제독의 동생이지만 그에게 절연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 이유를 쉽게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도 동창에서 확실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던 차에 의도치 않게 하월의 무위를 알게 되었다.
“금의위사들이 손을 쓰지 못하는 동안 북궁 태감이 황후 마마를 지켜드려 동창 제독께서 찾으시는 것이네.”
“예. 태감.”
“혹시 구문제독께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는가? 자네가 무공을 익혔다는 것 말이네.”
“아닙니다.”
“설마. 궁에 들어온 후에 익혔다는 것은 아닐 테고.”
떠보듯이 던지는 질문에 하월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정확히 질문하는 것도 아니고 혼잣말을 가장해서 중얼거리는 말에까지 자기가 대답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아랫사람이라고 비위를 맞추려는 것도 없고 기분을 살피려 하지도 않는 하월에게 태감은 한마디를 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월은 동창으로 가는 길을 주의 깊게 봐두었다.
길은 점점 좁아지고 복잡해졌다.
동창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본거지에 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자연스럽게 긴장이 되는 것을 어쩌지 못한 채 그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오고 가는 사람들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른 환관들과는 확실하게 다른 기세를 풍기는 사람들이 하월을 노려보았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를 가늠해 보려는 것 같은 시선들이 부지런히 오갔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들었겠지. 그러니까 궁금할 만도 하고.’
막상 화살 비가 쏟아졌을 때는 다른 사람들이 입은 피해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함께 온 태감에게서 얘기를 들었다.
그 일로 금의위사 중 많은 사람이 부상을 입어서 당분간 활동에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원. 누가 황궁의 심처까지 들어와서 화살을 날릴 수가 있다는 말이냐. 날아온 방향으로 봐서는 한두 곳에서 날아온 것도 아니지 않으냐. 적어도 흉수의 무리가 여덟은 되어 보였다.”
하월도 태감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이해했다.
‘아닐걸? 서도진 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런 일을 하면서 여러 사람을 동원할 사람이 아니지.’
하월은 그 생각을 하면서 괜히 자기가 뿌듯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사람들의 기세는 점점 흉흉해졌다.
그동안 마주친 사람들에게서 보인 감정이 호기심이었다면 이제는 의심과 적대감마저 드러났다.
“동창 제독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태감이 마침내 이른 곳에 권위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먼발치에서는 본 적이 있었지만 그를 그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황후전의 태감 북궁 하월이라 합니다.”
하월이 포권을 취하며 말하자 동창 제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공을 익혔더냐.”
“그렇습니다.”
“사문은 어디냐.”
“모종의 이유가 있어서 그것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하월의 말에 몇몇 사람이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동창 제독이 묻는 말에 감히 건방지게 말을 한다고 생각한 듯했다.
하월이 무슨 말을 하기만 하면 그들은 구문제독의 동생이 동창을 우습게 본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황후 마마께 변고가 생길뻔한 것을 네가 막았다고 들었다.”
“운이 좋았습니다.”
“그렇구나. 알겠다. 네 실력을 알아보고 싶은데 대련이 가능하겠느냐.”
“예.”
동창에 들어오는 것이 목표여서 그 일을 벌였는데 이제 와서 그것을 거부할 이유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