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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58화 (258/470)

제258화

258화

“질문해 봐. 오라버니.”

“…….”

아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수에게 물었다.

“살행을 의뢰한 자가 누구냐.”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이미 했던 질문이었지만 살수가 아진의 질문에 반응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다시 물은 거였고 린린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선이남을 보았다.

“이남 오라버니가 물어 보세요.”

“살행을 의뢰한 자가 누구냐.”

그러나 선이남의 말에는 살수가 대답하지 않았다.

위도와 황제, 하월까지 전부 다 물었지만 마찬가지였다.

“섭혼술을 걸 때는 술법을 시전한 사람의 목소리만 들을 수 있어요. 제 명령과 질문에만 반응하게 돼 있고요.”

린린이 말하자 황제가 신기하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가 끝을 맺어 봐.”

린린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한참이나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했다.

“……어떻게?”

“역천마의가 했던 것처럼 해 봐.”

역천마의가 사람들을 낙엽으로 만들어 죽였을 때 아진은 그 자리에 없었지만 린린이 하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섭혼술은 최면을 거는 것과 비슷한 듯했고 특별히 어려울 것 같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풀려나면 혈루의 루주를 찾아가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행을 의뢰한 자를 알아내도록 해라. 의뢰한 자를 알아내지 못하면 너희는 죽을 수 없다. 검이 목을 베고 심장을 찔러도 마찬가지다. 숨이 끊어지더라도 너희는 살아서 명령을 수행해야 한다. 의뢰자의 목을 벤 후에야 너희는 죽을 수 있다.”

“존명!”

“명을 받들겠습니다.”

두 살수는 텅 빈 눈을 한 채 포권을 취했다.

린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보았고 위도는 그 말의 결과를 보자는 듯이 살수의 목을 졸라 목뼈를 부러뜨렸다.

위도가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알지 못한 채 멍하니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러다가 서서히 상황을 파악한 이들은 위도가 물러난 후에 살수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살수의 목은 분명히 부러졌고 고개가 기형적으로 기울어져 있었지만 살수는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바르게 들어 올렸다.

하월의 목으로 마른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린린이 섭혼술을 하는 것까지는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다.

쉬운 일이 아니기는 하지만 워낙 기사를 아무렇지 않게 행하곤 하는 소저가 아닌가 해서였다.

그런데 아진은 원래 섭혼술을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고 린린이 해 놓은 섭혼술에 얻어타기만 한 것 같은데 믿기지 않는 일을 해 버렸다.

“지금…… 목이…… 이어 붙은 것 맞는 거지, 아진아?”

선이남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물었다.

위도는 직접 다가가 살수의 목을 만져보았다.

“붙었습니다.”

선이남은 고개를 숙이고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아진도 아진이지만 아진이 한 말대로 되는지 보겠다고 밑도 끝도 없이 남의 목을 부러뜨려 버리는 위도는 또 뭔지.

“어쨌건…… 이제 잘 해결이 된 듯하구나. 그리고 올라온 김에 짐을 도와줘야겠다. 아진아. 여러 번 부르는 것보다 한 번 왔을 때 오래 있다가 가야 가모에게 짐이 미움을 덜 받겠지.”

“그러면 저는 먼저 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지요. 폐하. 저는 철방에 꼭 필요합니다.”

위도는 소신 있게 말했고 아진과 린린은 할 말이 없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옆에서 볼 때는 흡사 착취당하는 노예 같은데 정작 본인은 자긍심이 대단했던 것이다.

“그래. 그러도록 하여라. 그러면 온 김에 가모에게 줄 뇌물을 좀 가져가도록 하여라.”

황제가 말하자 위도가 기다리지도 않고 말했다.

“폐하께서 그려 주신 그림을 비싼 값에 팔았다고 하시는 걸 들었는데 그림을 그려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 적막감이 감돌았고 아진은 급히 수습에 나섰다.

“폐하. 그것이…… 저희는 수시로 재정난에 빠져서…… 그때 그만…….”

“아니다. 그럴 것 없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준 것이니 잘 사용해 주었으면 잘된 것이지 뭘 그러느냐.”

황제는 개의치 않는 것처럼 말하더니 얼마에 팔렸냐고 아진에게 넌지시 물었다.

“황금 다섯 관을 받았다고 하신 것 같았습니다.”

“오! 한 번에 전부 넘긴 모양이구나. 그래도 그 정도면 값을 못 받은 것은 아닌 듯해서 다행이다.”

“아닙니다. 폐하. 한 점을 넘긴 것뿐입니다. 폐하께서도 저희 어머니와는 거래하시지 않는 것을 추천합니다. 어머니는…… 정말 대단하십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탈탈 털리게 되지요.”

황제는 진심으로 재미있어하며 웃어댔다.

“가모에게 도움이 되었다니 그러면 몇 점 더 그려야겠구나. 글씨를 써 준 것은 반응이 어떻더냐.”

“글씨는 별로여서 다음에는 그림을 그려 주시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아진이 차마 하지 못하던 말이 위도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 구나.”

글씨에도 자긍심을 갖고 있었던 황제의 어깨가 살짝 내려앉았지만 위도는 전혀 굴하지 않았다.

“그래도 글씨를 쓰는 건 시간이 훨씬 적게 걸릴 테니까 글씨를 쓰는 게 나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그림은 값이 너무 비싸서 아무나 살 수는 없으니 말입니다. 제 생각에는 성주 같은 사람들에게 줄 선물용으로 작은 종이에 두 글자쯤 적어서 주는 건 어떨까 합니다. 폐하. ‘건승’ 이런 것 좋지 않은지요?”

위도는 어느새 산본의가의 영업사원처럼 황제를 설득하고 있었다.

“성주에게 짐의 글씨를 준다는 말이냐.”

“지금까지는 그런 적이 없지요. 전에는 글자를 너무 많이 쓰셨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에게 큰돈을 받고 넘겨야 하는데 그럴 일은 생각만큼 많이 생기지 않지 않은지요.”

아진은 위도를 말리려고 했는데 나쁜 생각도 아니고 잘만 하면 어머니가 아주 기뻐하겠다는 생각도 들어 옆에서 같이 바람을 넣었다.

“폐하. 저도 좋은 생각 같습니다. 두 글자짜리 좋은 말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정진. 필승. 인내. ‘참을 인’자 한 자만 써도 좋을 것 같고 말입니다.”

선이남은 먼 산을 보았고 린린은 그런 아진이 창피한 듯 옆으로 슬슬 움직여 거리를 벌렸다.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라는 듯이.

황제가 말없이 허공을 주시하는 것을 보고 선이남은 그들이 선을 넘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때까지 조용히 침묵하던 황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극의’도 좋겠다. ‘무리’도 좋겠고. 생각해 보면 좋은 말들이 많겠구나.”

선이남은 자기가 완전히 헛짚은 거라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까지 말이 없던 하월까지 어느새 두 음절, 세 음절짜리 좋은 말들을 읊어 주었다.

“폐하.”

위도가 다시 황제를 바라보았을 때 린린과 선이남은 그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다른 곳에서 살다가 와서 황제를 어려워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잘못 하다가 황제가 화를 내기라도 하면 아무리 위도라도 벌을 피하지 못할 것 같아 걱정되었던 것이다.

황제야말로 떨리는 마음으로 위도를 바라보았다.

“무엇이냐.”

“산본의가에는 현판이 없습니다. 제가 다른 곳에 가 보니 별 것 아닌 곳에도 그럴싸하게 현판을 걸어 두었던데 산본의가에는 현판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현판의 글씨를 써주신다면 산본의가에 큰 의미가 될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린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위도를 데려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판이라. 정말 산본의가에 현판이 없느냐.”

“예. 단리서언이 왔을 때 현판이 부서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진의 말에 황제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렇구나. 그러면 짐이 현판을 써 줘야겠구나. 이럴 것이 아니다. 이럴 것이 아니야. 아진아. 어서 짐을 궁으로 데려다 다오. 쓸 것이 꽤 많겠구나. 산본표국에 산본무관까지.”

“산본전장과 산본철방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폐하. 그리고 저희 가모님의 성격에 어느 날 갑자기 마방이나 객잔을 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으니 그것도 이참에.”

황제는 위도의 말을 들으면서 확실히 깨달았다.

위도와 너무 가까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아니다. 위도야. 너는 먼저 돌아가거라. 그것들은 아진이가 돌아가는 길에 챙겨서 보내 주겠다.”

“예. 폐하. 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아직은 검을 만드는 솜씨가 서툽니다만 좋은 금속괴가 들어오면 따로 챙겨두었다가 폐하의 검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이리 고마운 일이 다 있느냐.”

황제는 훈훈해졌을 때 위도를 보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조금이라도 더 어두워지기 전에 어서 가거라. 위도야.”

“예. 폐하.”

위도는 자기 일을 성공리에 끝마쳤다고 생각한 듯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사라졌다.

정말 그보다 더 성공적으로 끝마치기도 어려울 듯했다.

린린은 두 살수에 대한 섭혼술을 마치려 했다.

그러나 이미 두 살수는 아진의 명령을 각인한 후였고 더 이상은 린린의 말에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문이 열리지 않아 아직 자기들이 떠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 있었던 것뿐이었다.

문을 열어 주자 살수들은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저자들은 그럼 강시와 같은 상태인 건가요?”

하월이 물었지만 아진도 대답해 줄 말이 없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그도 몰랐던 것이다.

황궁에 도착한 후부터 황제는 수많은 글씨를 써내야 했다.

현판에 사용할 글씨를 쓰기 전에 간단한 글씨를 먼저 썼는데 그동안 산본의가로부터 많은 것을 값없이 받기만 하다가 이제야말로 갚을 게 생겼다는 생각에 저절로 흐뭇해졌다.

“폐하께서 내각대학사를 중용하시고 고관대작들의 반발이 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백성 중에는 내각대학사가 덕망 높은 대인이라는 얘기가 많고 기대하는 이들이 대부분입니다. 힘든 일이 되겠지만 폐하가 아니면 시도조차 하지 못할 일일 거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저희가 보필할 것이니 폐하의 뜻을 이루시지요.”

아진이 옆에서 말하자 황제가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진에게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심중의 깊은 것까지 헤아리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향화문을 통해 육부 상서가 뿌리까지 썩었고 황후마마의 가문과 결탁하여 폐하의 권위에까지 도전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폐하께서 이 일을 어떻게 풀어 나가실지 궁금했는데 역시 폐하이십니다. 내각대학사에게 그들을 관리하고 감독할 힘을 주려 하심이 아닌지요.”

“그래. 역시 아진이가 짐의 마음을 잘 헤아려 주는구나. 네가 아니었다면, 그리고 산본의가라는 곳을 믿을 수 없었다면 시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구나. 짐에게 이런 지원군이 있는데 아무것도 이루지 않고, 아무것도 바꾸지도 않는다면 후대에 얼마나 많은 비난을 듣겠는가 하는 생각 말이다.”

아진은 문득 그와 처음 만났던 때를 생각했다.

천기를 멋대로 해석한 천문관 악진혁이 북리소은을 죽이고 산본의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산본을 찾아오지 않았다면 황제를 만나게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황제와 아진은 서로 나눌 이야기가 많았는데 하월도 그 사이에서 조바심을 냈다.

내각대학사의 장원에서 첫 실전을 치르면서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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