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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57화 (257/470)
  • 제257화

    257화

    살수의 검은 하월이 그동안 경험했던 검과 달랐다.

    거기에 적응하는 동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하월은 대단한 집중력과 안력으로 그들의 검로를 파악해 나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어서 허둥댔지만 익숙해지기까지 걸린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선이남은 처음에 살수 몇 사람에게 침을 쏜 후 거의 나서지 않았다.

    하월은 아직 자기가 일을 망치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복면을 쓴 살수의 신형이 하월의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지며 전각 앞에서 나타났다.

    모두가 하월을 상대하고 있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하월은 그를 향해 벼락같이 몸을 날려 창궁무애검의 초식을 펼쳐나갔다.

    그것을 펼치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데도 자연스럽게 그 초식이 전개되는 것을 보며 하월은 아진이 왜 그것을 가르쳐 주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제왕검형보다 더 그에게 알맞고 그가 편하게 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았으리라.

    하월은 아진이 가르쳐 주었을 때 깨닫지 못한 채 머리에만 담아 두고 있던 많은 무리가 그 순간을 지나며 풀어지는 것을 알아차렸다.

    초식은 점점 과감해졌고 자신이 생겼다.

    치고 빠지는 동안 펼치는 신법도 자연스러웠다.

    살수들은 눈앞의 검객이 누구인지 급하게 머리를 굴렸다.

    실전 경험이 많지 않은 듯 허둥대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지만 무위의 수준은 결코 낮지 않았다.

    최소한 초절정의 중급에는 들어선 것 같다고 생각하며 황성 고수 중 이런 검법을 쓰는 사람이 누가 있는지 생각해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들이 알고 있던 검술을 소거해 나가는 것이었지 하월이 펼치는 초식이 창궁무애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는 없었다.

    하월이 그들을 향해 단조로운 검격을 선보이고 있을 때 선이남이 그들 가운데로 나왔다.

    그리고 몸과 검이 함께 무기가 된 격투를 보여 주었다.

    검을 들고 있는 우수는 물론이고 좌수도 쉬지 않은 채 가슴팍이며 얼굴을 노리며 권격을 날렸고 가끔 옆구리와 정강이를 발로 걷어차며 끊임없이 사람들을 압박해 들어갔다.

    하월이 살수들과 점잖게 하나씩 주고받고 있었다면 선이남은 한꺼번에 여러 공격을 폭우처럼 퍼부었다.

    하월이 한 번의 공격을 성공시키는 시간 동안 선이남은 대 여섯 번은 공방을 벌이고 검을 회수했다.

    그러고 난 후에는 살수가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쏟았다.

    하월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의 검은 그럴듯했지만 너무 느긋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 줄기 섬전 같은 검이 살수의 몸을 지나가자 피가 솟구치며 그가 쓰러졌다.

    검로를 막아내고 공격을 이어 갔다.

    힐끔 선이남을 보고 그가 다음 공격으로 이어갈 때 발을 어떻게 하는지 배웠다.

    선이남의 검에 푸른 검기가 서리는 것을 보고 자신도 검기를 만들어 보았다.

    막 태어난 괴물이 어설픈 걸음마를 하는 것처럼 하월의 움직임은 부족한 것투성이였지만 마침내는 자신의 틀을 전부 깨고 나올 터였다.

    날아오는 검을 막으며 급히 내공을 밀어 넣다가 급히 헛숨을 들이쉰 하월이 선이남을 쳐다보았다.

    실전 경험이 적은 만큼 내공의 운용이 아직 자유롭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고 있던 선이남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월은 그 시간을 통해 수많은 의문을 품고 과제를 잔뜩 떠안았다.

    어떤 것들을 극복하고 발전시켜야 할지 생각하고 수련할 것이 한가득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차곡차곡 성과를 만들어 나갔다.

    일곱 명이나 되는 살수들이 모두 그의 앞에서 쓰러졌다.

    선이남의 침에 맞은 두 사람은 격전이 벌어지는 도중 먼저 쓰러졌다.

    선이남은 그들의 혈을 점하고 하월을 바라보았다.

    “데리고 경공을 펼칠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하월은 미미한 흥분감을 느끼며 말했다.

    첫 살인.

    그리고 황명을 수행했다.

    감동이 점점 벅차게 번져갔다.

    * * *

    선이남에게서 산본으로 지급이 전해졌다.

    살수를 잡아두고 자결하지 못하도록 점혈을 하기는 했는데 그게 전부였다.

    이틀이 지나도록 그들에게서 살수단체에 대한 정보나 의뢰인의 정체를 전혀 알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살수를 산 채로 잡아 와서 이번에야말로 진전을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황제의 아쉬움은 컸다.

    선이남은 자신의 역량 밖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에게 아진이라는 패가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부르기는 아진만 불렀는데 린린에 위도까지 줄줄이 따라왔다.

    소청과 북리의천도 오고 싶어 했지만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왔다고 했다.

    황제는 그들을 보게 된 것이 좋아서 한동안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선이남의 장원이었는데 내각대학사의 처소에서 잡아 온 살수들도 그곳에 갇혀 있었다.

    “바쁜데 부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구나. 아진아.”

    “바쁜데 부르신 것이 맞습니다. 폐하. 그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아마 산본의가의 모든 사람이 오고 싶었을 것입니다.”

    “저런. 가모가 또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구나.”

    이제는 황제도 척하면 척이었다.

    “산본철방에 대해서 얘기를 들으셨는지요. 폐하?”

    “그래. 나도 들었다. 철방을 연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전국 각지에서 유명한 고수들이 무기를 얻기 위해 그곳으로 향한다지?”

    “예. 폐하.”

    아진의 얼굴에 자긍심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고 그것 때문에 자기가 아주 죽게 생겼다는 표정이 지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린린이 말을 해 보아라.”

    황제가 말하자 린린이 일단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입을 열었다.

    “저는 병장기를 만드는 일이 그렇게 힘이 드는 일인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망치질을 쉬지도 않고 계속해야 하는데 야장들이 병장기를 만드는 게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엄청난 깨달음을 얻으신 거지요. 내공을 가진 무인이 망치질을 하면 딱이겠다는 생각을요.”

    그때부터 그들의 불행이 시작된 것 같았다.

    황제는 손뼉을 쳐가면서 웃었다.

    “아무리 천마라고 해도 가모는 무서운가 보구나.”

    “정말 그렇습니다. 안 하겠다고 해 버릴 수도 있는데 저를 보는 어머니의 눈빛이 실망에 찬 것 같으면 가슴을 콕콕 찌르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해서 그냥 귀찮고 말자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린린은 황제의 앞이라는 것도 잊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이 저희 철방에서 만든 병장기가 좋다고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해서 제가 그자들을 색출해 입단속을 시키고 있습니다. 한 번만 더 그런 말을 하고 다니면 만들어 준 걸 뺏어서 녹여 버리겠다고 했지요. 그런데도 도대체 누가 그렇게 소문을 내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아진은 정말 난제라는 듯이 고개를 저어대며 말했다.

    “위도도 힘이 들어서 도망친 것이냐.”

    황제가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묻자 아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위도 형님은 아주 천직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쉬지 않고 일을 하다가는 죽을 것 같아서 제가 바람을 쐬자고 하면서 억지로 데려왔습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제로 입을 여는 게 쉽지 않더구나.”

    “역천마의가 있었으면 수월했겠습니다. 그런데 저도 섭혼술을 어느 정도는 할 수 있으니 자백 정도는 받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폐하.”

    “섭혼술이라. 그렇구나. 고신을 가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섭혼술을 할 수 있다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구나. 짐이 봐도 되겠느냐. 린린.”

    “물론입니다. 폐하.”

    린린은 시간을 지체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곧장 살수들이 갇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둡고 좁은 곳에 갇혀 있던 두 명의 살수는 날카로운 적의를 드러냈다.

    정신력 하나는 엄청나서 입을 열게 하는 게 쉽지 않을 거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안으로 한 무더기의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독기를 품었다.

    무슨 말을 하건 절대로 협조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다분해 보였는데 린린은 그들에게 한 마디도 말을 걸지 않은 채 구결을 외웠다.

    살수들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감돌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그들은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했다.

    린린의 구결은 길게 이어졌다.

    그러는 동안 살수들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불안에 떠는 것 같더니 린린의 입에서 구결이 멈춘 순간 눈빛이 흐릿해지며 시선이 허공에 고정되었다.

    “너희는 지금 이십 장 높이의 까마득한 절벽 위에 서 있다. 십천이 검강을 내리꽂아 너희가 서 있는 곳 주변을 깎아 냈지. 두 발을 다 디딜 수도 없을 만큼 깎여 나갔고 바람이 세게 불어. 옷이 펄럭일 때마다 너희의 몸이 같이 흔들린다. 너희와 함께 있던 이들 중 태반이 절벽에서 떨어져 뇌수가 터져 죽었지.”

    언젠가 역천마의가 했던 술법을 보고 자기도 가르쳐 달라고 졸라서 배운 것인데 실제로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래도 잘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없었다.

    살수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고 어느새 그들은 한쪽 발을 들고 서 있었다.

    린린이 하는 말을 의심 없이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몸이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바람이 불어 몸이 흔들린다고 믿는 듯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먼저 말하는 사람은 내가 아래로 데려가 주지.”

    더 이상 필요한 말은 없었다.

    그들은 경쟁적으로 이야기를 쏟아냈다.

    서로가 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하는 듯 동시에 말을 쏟아냈는데 두 사람에게서 나오는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황성 삼대 살문 중 하나인 혈루.

    특급 살수를 다섯이나 두고 있었고 미지의 고관대작과 결탁해 있다는 소문이 나도는 곳이었다.

    배후에 있다는 고관대작이 누구인지는 그들도 알지 못했고 이번 일에는 모두 금령의 살수만이 동원되었다.

    금령과 은령, 동령은 무위와 살행의 성공 횟수에 따라 정해지는 직급인데 금령에 속한 자는 스무 명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 금령 살수 중 태반이 목숨을 잃었으니 이번 일로 혈루가 입은 피해만 해도 막대하다고 봐야 했다.

    “너희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은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른 살문에 일을 의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황상께서 중용하신 내각대학사를 살해하려는 것이 황상의 뜻에 반한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저희에게 가장 우선되는 것은 루주님의 명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의 표정이 일제히 변했다.

    그런 말을 듣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황제에게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폐하. 이 자들은 정상이 아닙니다. 성심에 담아 두지 마시지요.”

    선이남이 말하자 황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야말로 마음 쓰지 말거라. 짐이 그것을 모르겠느냐.”

    몇 사람의 이야기가 오가다 아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동안 황성의 유명한 살문이 나섰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것은 금의위 때문이었을까요? 다른 살문이 연달아 실패한 살행을 성공하면 살문의 명성이 높아질 거라서 살수를 대충 선별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제가 알기로 금의위사들의 실력이 썩 좋지는 않은데. 게다가 다른 조직에서 금의위의 명성에 해를 끼치기 위해서 살문을 측면에서 지원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에 대해 황제가 답을 하려 했을 때 살수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내각대학사의 곁에 정체불명의 고수가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혈천방주가 내각대학사를 지켰다고 말했다.

    아진은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하고 린린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하는 말을, 섭혼술에 걸린 살수가 들을 수 있는 건가 해서였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더 놀란 얼굴을 하는 린린을 보았고 그것이 정상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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