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256화 (256/470)
  • 제256화

    256화

    “폐하.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이신지요.”

    선이남은 설마 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동안 내각대학사는 크고 작은 분란을 만들어 왔고 선대의 황제들은 내각대학사에게 너무 많은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경계해 왔기에 황제가 어떤 생각으로 그 이야기를 한 것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황위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지 않으냐. 누가 황위에 오르고 어떤 정치를 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적합한 사람이 내각대학사가 되고 그가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준다면 어찌 그것을 나쁘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선이남은 생각이 많아지는 얼굴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좋겠지만 지금껏 힘을 갖고 권력을 누려 왔던 모든 이들은 필연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던가 해서였다.

    “선 부정이 걱정하는 바를 짐이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금의 육부 상서는 모두 황후와 그 가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실정이다. 짐의 앞에서 몸을 낮추는 듯 보이지만 사사건건 짐의 발목을 잡는다. 큰 개혁을 포기한다면 그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만 짐은 허수아비가 되기 위해 황위에 오른 것이 아니다.”

    선이남이 놀란 얼굴로 그를 보았다.

    황제의 입에서 직접 그런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이었다.

    사람들은 당대의 황권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지만 그것은 고관대작들이 용인하고 있어서 그런 측면이 강했다.

    황제가 말을 잘 들으니 특별히 야단을 칠 필요가 없어서 겉으로 평화롭게 그를 떠받들어 주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내각대학사가 몇 번이나 공격을 받았다. 그가 머무는 장원에 자객이 든 것이 벌써 여덟 번이다. 황성에서 활동하는 살수단을 쳐서 누가 그런 짓을 한 것인지 알아내라고 했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향화문이 알고 있는 것을 밀영은 알 방법이 없다고 하더군.”

    선이남은 황제가 내각대학사의 습격 사건을 빌미로 일을 크게 키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선 부정은 짐의 말을 어찌 생각하느냐.”

    선이남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지금도 크게 불평할 것 없이 안락하고 윤택한 삶을 누리고 있는데 황제는 그것을 거부하겠다는 것이다.

    좋은 음식을 먹으며 사육당하는 것을 거부하고 본연의 존엄성을 되찾겠다고 말하는 황제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 과정이 험난할 거라는 것을 황제라고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릴 것이고 불평이 쇄도할 것이다.

    태평성대의 시기에 굳이 그렇게 해야 하는 걸까 하다가 선이남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이남아. 너야말로 권력에 취해 있었던 거로구나. 네가 있는 자리가 흔들릴까 봐 겁을 먹은 모양이구나. 깨끗한 돼지우리에 갇힌 채 먹이를 받아먹는 것이 퍽 좋았던 것이다.’

    선이남은 황제의 앞에서 머리를 조아렸다.

    “폐하. 그 길이 험난하여도 그 길을 가실 수 있는 분은 폐하뿐일 것입니다. 소신이 폐하를 보필할 것입니다.”

    황제는 선이남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서리고 잠깐 동안 고민을 한 것을 알고 있었다.

    선이남이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의 실망과 이탈은 더 할 거라고 생각하며 황제는 하월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오히려 하월의 표정은 편안해 보였다.

    “하월. 너는 어떠하냐.”

    “소신은 정치를 모릅니다. 하오나 폐하께서 징치하시려는 사람 중에 제가 싫어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제가 싫어하는 이들을 공격하는데 대의명분까지 따라 주니 그저 기쁠 뿐입니다.”

    황제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아진이 황궁에 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아진에게도 먼저 묻고 싶다만 산본의가의 가모에게 미움을 받지 않으려면 이런 일은 스스로 결정을 해야 할 것 같구나.”

    선이남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깜짝 놀라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괘념치 말거라. 향화문주의 말을 듣고 보니 짐이 심하기는 하였더구나. 산본의가에서 무인을 키워내는 족족 빼 오고 있으니 말이다. 밀영들을 정리하고 난 후에 한 번 더 크게 신세를 져야 하니 당분간은 가모의 눈치를 보면서 짐도 몸을 사려야지.”

    “향화문주가…… 그 이야기까지 하였다는 말씀이신지요.”

    선이남이 걱정이 돼서 말했지만 황제는 재미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짐은 산본의가의 사람들이 아주 좋다. 짐이 어려워서 속에 있는 말을 다 하지는 못하겠지만 짐은 그 속마음도 알고 싶다. 그래서 서운한 것이 남지 않도록 해 주고 오래오래 서로가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싶다. 그러니 그런 속사정도 알아야 하지 않겠느냐.”

    선이남이 외줄을 탄 심정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을 때 하월이 입을 열었다.

    “소신이 내각대학사의 장원을 지키고 있다가 자객들을 처리하고 그들을 잡아다 누가 사주한 일인지 알아내면 어떨지요. 폐하.”

    그러자 황제가 선이남을 바라보았다.

    말을 한 사람은 하월이었는데 선이남을 쳐다보았다는 것은 하월이 정말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해서였다.

    “못 미더우시거든 소신이 함께 가겠습니다.”

    “선 부정이 함께 간다면 믿을 수 있겠지. 그러면 그리 해 보거라. 살수들은 붙잡히느니 차라리 자기 목숨을 끊어 버린다고 들었다. 이번 기회에 너의 실력을 증명해 보거라. 하월.”

    하월은 처음으로 황제의 명을 받고 심경이 복잡해졌다.

    “예. 폐하. 반드시…….”

    잘하고 싶었다.

    그래서 만회하고 싶었다.

    꼭.

    이번만큼은 꼭 잘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고 심장이 거칠게 요동쳤다.

    * * *

    궁녀들이 황후의 머리를 빗기고 화장을 고쳐 주는 동안 태감이 그녀의 일정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었다.

    “항주의 관료들이라.”

    “예. 마마.”

    “미련한 자들 같으니. 지금껏 다른 이들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왜 그자들만 유독 그 모양이라는 것이냐. 그러고도 다시 청탁할 것이 있다는 것인지.”

    태감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라기보다 북리의천과 정의맹이 워낙 기습적으로 작전을 감행해서 생긴 결과였다.

    그렇게 압도적인 무력이 아니었다면 왜구가 토벌되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지만 왜구의 돈은 항주의 관료를 통해 황궁의 심처까지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부패한 관료와 왜구의 만행을 묵인해 주는 대가로 해마다 막대한 돈을 받아 오던 황후와 그 가문은 왜구가 토벌된 것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재정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뇌물을 강요하는 참이었다.

    “황금 두 관 이상을 가져오지 않은 자는 따로 만날 것도 없다. 그런 자들은 안 태감이 만나고 돌려보내거라.”

    “예. 마마.”

    “하월은 어찌하고 있느냐.”

    “그것이…….”

    “또 황상의 부름을 받고 간 모양이구나. 황상이 그리 남색에만 빠져서 혜안이 어지러우니 어찌해야 한단 말이냐.”

    황후는 명경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황상을 걱정하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퍽 마음에 들었다.

    사람들은 속으로 황상을 손가락질하고 있었고 총애를 잃은 황후를 동정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니 하월이 계속 황상의 관심을 잃지 않기를 바라기까지 했다.

    “그러면 좌부도어사 정 대인을 먼저 보시겠는지요. 마마.”

    정인과의 밀회.

    그것을 위해서 그리 오랫동안 단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태감이 말하자 황후가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겠다.”

    “예. 마마.”

    “항주에서 왔다는 이들에게는 야멸차게 굴지 말고 여지를 주어라. 사람이 잘못하고 싶어서 실수를 하는 것이더냐. 한 번의 실수는 과감히 눈감아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성의는 보여야 할 거라고 알아듣게 말을 하여라.”

    “그리하겠습니다. 마마.”

    안 태감이 조용히 그녀의 앞에서 물러났다.

    * * *

    선이남과 함께 일찌감치 궁 밖으로 나간 하월은 뒤늦게 찾아온 긴장감에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그의 처소에 든 하월이 은밀하게 내각대학사의 장원으로 향하는 것을 아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

    “선 대인. 중요한 것은 아니나 물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얼마든지요.”

    “선 대인은 서 공자를 얼마나 믿을 수 있습니까?”

    선이남이 하월을 보다가 답을 떠올리려는 듯 허공을 바라보았다.

    “아진이 내 집에 불을 지르고 내 가족을 죽이는 걸 본다고 해도 아진에게 내가 모르는 계획이 있어서 그러는 걸 거라고 생각하며 기다릴 정도라고 하면 어떻겠소?”

    “…….”

    역시 이 자는 미쳤다.

    산본의가의 사람들은 전부 미쳤다.

    전부터 느꼈지만 이로써 더 확실해진 느낌이었다.

    “어떻게 하면 사람을 그렇게까지 믿을 수 있습니까?”

    “그렇게 물으면 대답을 하기가 곤란한데요? 아진이를 믿기 위해서 뭔가를 한 건 없어서 말입니다. 나는 그냥 믿어지던데. 공자는 안 그렇습니까?”

    하월은 아직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믿어 버리면 편할 것 같아서 그냥 믿어 버리기로 마음을 먹기는 했다.

    그러고 나니 정말 편해지기는 했다.

    서도진이 아군이라고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지원을 받는 느낌이 들었다.

    “귀찮아서라도 나는 고민을 안 할 것 같아요. 그리고 나는 아진이랑 싸울 자신이 없어요. 그거면 충분히 답이 되지 않습니까?”

    서도진과 싸울 자신은 하월도 없었다.

    싸울 자신도 없으면서 그의 적이 되고 싶은 거냐.

    그렇게 묻는다면 답을 알 것도 같았다.

    “하월 공자. 사람을 죽여 본 적은 없지요?”

    “……제 손으로 직접 죽여 본 적은 없습니다.”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려 사람을 죽이게 한 적은 있었다.

    작은 형인 북궁마영도 그렇게 죽였다.

    “나는 하월 공자가 그 일을 잘할 것 같군요. 망설임 없이요. 그건 아주 중요한 덕목입니다.”

    “…….”

    대답할 말이 마땅치 않아서 그냥 있었는데 그때부터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그 상태로 내각대학사의 장원에 이르렀다.

    그는 아직 퇴궁 전이었고 선이남과 하월은 적당한 장소에 자리를 잡았다.

    그 후의 대화는 전음으로 나누기로 했지만 전음으로 나눌 말도 많지 않았다.

    하월은 실전 경험이 일천했기에 선이남을 자주 살폈고 어둠이 내리는 것을 틈타 살수들이 스며들자 눈짓을 주고받았다.

    자객의 습격을 자주 받아서 그런 듯 내각대학사의 하인들은 일찌감치 집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퇴궁을 하고 돌아온 내각대학사 역시 한 번 안으로 들어간 후에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이제부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건 그들은 나오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살수들이 먼저 움직였다.

    그들이 향한 곳은 내각대학사가 머무는 처소였다.

    평소에는 황제가 보낸 금의위사들이 전각을 지켰는데 그날은 그들마저 없었다.

    온전히 하월과 선이남에게만 맡기겠다는 황제의 뜻이었는데 하월은 심호흡을 하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선이남은 검을 빼 들고 있었지만 좌수에 침통을 들고 살수들의 위치를 파악해 내는 데 더 주력했다.

    그러다가 몇 사람을 향해 침을 먼저 날렸는데 그들은 침에 맞고도 그냥 벌레에 물렸다고만 생각하는 듯했다.

    그것으로 인해 자결할 기회도 얻지 못한 채 쓰러질 거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지붕과 담벼락,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이들이 내각대학사의 처소로 향했을 때 하월이 먼저 몸을 날렸다.

    살수들은 크게 놀라지도 않고 하월을 상대했다.

    아무리 하월이 아진에게 특훈을 받았다고 해도 기척을 숨기는 것은 한계가 있었고 살수들은 그 분야에 특출난 재능을 선보이는 이들이었으니 그들이 하월의 존재를 알아차렸다는 것이 경악할 일은 아니었다.

    하월은 그들에게 들키고 나자 오히려 후련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