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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55화 (255/470)

제255화

255화

“폐하. 폐하께서는 하월 공자가 견뎌낸 시간을 결코 견디고 싶지 않으실 것입니다. 저는 아진이가 하월 공자를 죽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그랬다는 말이냐.”

“예. 폐하. 하월 공자의 겉모습만 보고 부러워하실 것이 절대 아닙니다. 만약 저에게도 그 과정을 겪고서 지금의 하월 공자처럼 되고 싶냐고 한다면 저는 사양할 것입니다.”

선이남이 말하는 것을 듣고 황제가 안타깝다는 듯이 하월을 바라보았다.

“고생이 많구나.”

“그래도 소신은 싫지 않았습니다. 죗값을 치르는 거라고 생각하면서 견디면 견뎌졌습니다.”

하월이 무념 무상한 얼굴로 말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진이 찾아왔을 때 하월은 속으로 조금 반갑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뱀 앞의 개구리가 된 것 같아서 뱀이 특별히 기분 나쁜 것처럼 보이지 않아도 저절로 얼어붙었던 것이다.

아진은 하월을 찾아내 조용한 곳으로 가더니 그동안 해 왔던 것을 보여달라고 말했고 하월은 자신만만하게 심법과 검법을 보여 주었다.

아진은 상당히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들었다.

팔뚝 정도의 길이에 회초리처럼 가늘었는데 그걸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는 건지 하월은 짐작도 하지 못했다.

말라서 부스러져 가던 것인지 한 번 세게 때리면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갈 것 같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아진은 거기에 강기를 불어넣더니 하월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오십시오.”

하월은 머뭇거리다가 그동안 자기가 해 왔던 게 있으니 전보다는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진을 향해 공격해 들어갔다.

결과는 참담했다.

실수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느 순간 하늘을 보고 누워 있었던 것이다.

같은 일이 몇 번 더 반복되는 동안 하월은 어디에서 넘어지는지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차렸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었다.

모르고 당하냐, 알고 당하냐의 차이만 있을 뿐.

“20초를 버티면 새로운 무공을 하나 전수해 주겠습니다.”

하월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원하는 거로 말입니까?”

“…….”

아진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 생각은 아니었던 것 같았지만 일단 하월이 그렇게 나온다면 안 될 건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그리고 아진은 절대로 무공을 전수해 줄 일은 없을 거라는 듯이 그때부터 무지막지하게 하월을 몰아세웠다.

하월은 아진의 나뭇가지를 단 한 번도 막지 못했다.

아진이 어느 정도 자비를 두면서 봐주면 그도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겠지만 아예 작정을 하고 몰아세우는 바람에 금방이라도 포기해 버리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하월은 포기하지 않았다.

죽지만 않는다면 달라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20초를 버티다가 죽는다면 아진이 살려 줄 거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 시간을 견디기가 절대 쉽지는 않았지만 하월은 곤죽이 되도록 얻어맞으면서도 버텼다.

나중에는 아진이 놀라서 힘을 뺐을 정도였다.

“이제 가르쳐 주셔야 합니다.”

하월은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은 얼굴을 하고 말했다.

아진은 멍하니 그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고 싶은 게 있습니까?”

“남궁세가에서 전해지던 절초를 배우고 싶습니다.”

“그건 왜요?”

“검가로 명성이 높던 그들이 아니었습니까. 제왕검형을 배우고 싶습니다. 몇 대에 걸쳐 전수되는 동안 대성한 가주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안 하는 거면 모르지만 기왕 하기로 했으면 으뜸 중의 으뜸인 검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진은 하월의 몸을 훑어보았다.

근골은 하루아침에 변하는 게 아니었다.

혈맥에 쌓인 탁기를 없애는 것은 자기가 도와줄 수 있다고 해도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뼈를 깎는 아픔을 겪게 될 텐데 하월이 그 과정을 버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20초를 버텨 내는 것을 보니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았다.

황제 가까이에 있는 하월에게 그것을 전수하고 성취를 이루게 한다면 상당히 쓸모가 있을 듯했다.

아진은 거기에서 대화를 멈추고 우선 황제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에게 하월을 얼마나 믿는지 물었다.

황제는 아진이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고 기왕 하월이라는 패를 쓰기로 했으니 최고로 만들어 달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 하월은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 것 같은 나날을 보냈다.

그의 몸속에 있는 것은 내장 하나, 피 한 방울까지 전부 다 새롭게 태어난 것 같았다.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들고 이제 제발 그만하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 말을 하면 아진이 후련하다는 얼굴로 수련을 멈춰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참았다.

황후전의 태감이 아무 때나 시간을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하월에게는 ‘황제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 태감’이라는 또 다른 신분이 존재해서 그걸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하월이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한 사람들은 황상의 부름을 받고 간 모양이라며 자기들끼리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곤 했던 것이다.

하월을 보면서 아진은 아주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경이로운 감정을 느꼈다.

하월은 정말 재능이 없었는데 그는 그것을 오직 오기와 근성으로 버텨가고 있었다.

다시 살 수 있다는 걸 알아도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어떻게든 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게 마련이었는데 하월은 그러지 않았다.

물에 빠져 다 가라앉아가면서도 허우적거리지 않는 것처럼 끝까지 힘을 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하월의 모습에 이상하게도 아버지 서종욱이 겹쳤다.

포기해 버리면 더는 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최후의 전선에서 버티던 아버지는 그 시간을 견뎌 냈고 산본의가를 지켜냈다.

일단 그 생각이 든 후부터 아진은 하월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것에 조금도 한계를 두지 않았다.

진기를 불어 넣는 동안 하월의 세맥이 터지는 것은 이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일이 되었고 근골을 바로 한다며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는 것까지 서슴지 않았다.

솔직히 아진 자신도 누군가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한 몸으로 만들어 주겠다면서 자기 몸을 그렇게 개조한다면 그냥 참고만 있지는 않았을 텐데 하월이 죽었다는 듯이 반항도 하지 않고 묵묵히 참아 내자 점점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조금씩 욕심나는 곳을 더 손보았고 나중에는 누구라도 탐낼만한 근골로 재탄생을 시켜버렸다.

하월은 언젠가 끝이 나기는 하겠지 하면서 오직 거기에만 희망을 품었다.

그러다가 벌모세수가 전부 끝난 것을 알았을 때는 딱히 기쁘지도 않았다.

기뻐하기 위해서도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때부터 아진은 하월에게 여러 검술을 알려 주었다.

진득하게 초식을 가르쳐 주는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자신이 검술을 펼치며 대련을 하는 식이었다.

그래도 그때는 하월을 죽일 듯이 패는 게 아니라 검식을 보고 익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이게 제왕검형 입니까?”

그렇게 묻는 하월을 보면서 아진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하월이 배운 것이 창궁무애검이라는 것을 그는 나중에야 알았다.

하월은 가장 고결한 검술을 배우고 싶었고 그가 가진 지식으로는 제왕검형이 최고였다.

그러나 검법이 가진 명성을 떠나서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배우는 것이 나은 법이라 아진은 하월에게 여러 가지 검법을 보여 주고 하월의 몸이 보이는 반응을 파악한 후에 창궁무애검을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제왕검형도 알려주었는데 하월 역시 창궁무애검을 더 편하게 여기고 그것을 깊이 파려 했다.

황궁에 머무는 동안 아진은 하월이 원하는 대로 대련을 해 주었다.

처음에는 어디에서 빈틈을 찾아야 하는 건지 가늠도 하지 못하던 하월은 아진이 의도적으로 보여준 틈을 노리고 들어가 거기에서부터 공격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바람처럼 전개되는 초식은 빠르면서도 정확했고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강맹하고 고결하고 완전무결했다.

아무리 아진을 따라 하려고 해도 자신의 검격에서는 그런 분위기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하월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아진에게 이렇게 아무 대가도 없이 배울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신이 얼마나 큰 특혜를 누리는 것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하월 공자는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그 말은 이제 핑계 댈 것이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강호에서도 하월 공자의 적수가 될 사람은 오십 명이 되지 않을 겁니다.”

하월은 아직 오십 명이나 된다는 말에 조금 힘이 빠졌지만 말도 안 될 정도로 늦게 무공을 시작했으면서 자기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했다.

하월은 아진이 산본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 귀찮을 정도로 매달려 자신의 초식을 검사받았고 그 후에는 틈이 나는 대로 선이남과 함께 수련을 해 나갔다.

그러다가 지금처럼 황상이 부르면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에는 그동안 수련한 무공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황제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기막을 두르거라. 선 부정.”

“그리 하였습니다. 폐하.”

“그래. 요즘 밀영들의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 짐이 내린 임무를 번번이 실패하는데 짐의 생각에는 일부러 그런 것 같구나.”

그의 말에 선이남과 하월의 눈빛이 달라졌다.

황상의 명에 의해 움직이는 밀영이지만 그들도 온전히 황상에게만 충성하는 것은 아니었다.

밀영은 황상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동시에 여러 신분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인데 그때 생긴 이해관계로 인해 조금씩 성향이 갈렸다.

황상의 총애를 빌미로 파벌을 형성하는 이도 있는데 남들이 모르게 하는 일이라고 해도 지금의 황상을 속이기는 쉽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것은 향화문의 활약 때문이었다.

황상의 밀영들이 아무리 은밀하게 일을 도모해도 그것이 향화문에 의해서 훤히 까발려지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황상이 밀영에 대한 의존을 아주 줄이지 못하는 것은 그나마 다른 조직보다는 밀영의 충성도가 높다는 사실 때문이었는데 작금의 상황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하명하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다면 소신이 처리하겠습니다. 폐하.”

선이남이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짐의 명이 수행되는지 알아보려고 내린 것들이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월은 황제와 선이남의 사이에 오가는 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밀영 중에는 동창과 연이 닿아 있는 이들이 많았지만 드물게 구문제독이나 금의위와 가까운 이들도 있었다.

황제가 아끼고 깊이 신임하던 자들이 임무 수행 중에 죽으면서 그 후에 빈자리를 채우고 올라온 이들이 문제를 일으켰다.

“폐하. 산본의가의 무인들로 그 자리를 대체하시면 어떠신지요.”

하월이 조심스럽게 말하자 황제가 고개를 끄덕였다.

놀란 얼굴이 아닌 것을 보니 그도 어느 정도는 생각을 한 일인 것 같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냐. 만약 그 대안이 없었다면 짐은 참으로 처참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곳의 무인들이 월등한 실력을 갖춘 채로 잘 성장해 나가고 있어서 한결 마음이 든든하다. 짐은 밀영을 제거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그들을 본보기로 삼을 것이다.”

선이남과 하월은 그의 의중을 알겠다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짐이 새로 중용한 내각대학사에 대해 대소신료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도 영향력이 작지 않은데 육부 상서의 위에 올려놓는다면 난리들이 나겠지.”

황제는 재미있을 거라는 듯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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