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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53화 (253/470)
  • 제253화

    253화

    “린린. 너는 진짜 대단하다. 나하고는 비교도 안 돼. 내가 한 일은 그냥…….”

    말을 하다가 아진은 그냥 스스로 입을 다물었다.

    전생에 자신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비웃음거리가 된 채로 괴수를 잡는 게 다였는데 린린은 전혀 달랐다는 생각에 조금 위축이 되는 것 같기도 했다.

    안에 들어와서 제대로 확인한 신교는 외부에서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는데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했다.

    “이 정도면 토번보다 규모가 더 큰 것 아니야?”

    아진의 말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신교 밖에 나가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까지 전부 합친다면 토번 정도 되겠지. 어쩌면 토번보다 더 클지도 모르고. 당분간은 유동적이겠지만.”

    린린은 신교에서 이탈해 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그냥 놔 줄 거야?”

    “장단점이 있기는 한데 뜻이 안 맞는 사람은 그냥 내보내는 게 좋긴 할 거야. 그자들이 밖으로 나가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그냥 여기에서 다 죽이는 게 좋을 것 같긴 하지만 그러다가는 반발이 나올 거야.”

    대규모 숙청.

    린린이 생각하는 건 그것인 듯했지만 반발이 나올 것을 염려한다면 아무래도 조심하는 게 좋을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진은 섣부르게 자기 생각을 내놓지는 않았다.

    린린이 신교의 교주 대행이라고 생각하자 말을 하는 것이 신중해졌다.

    전에 하던 것처럼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아무거나 툭툭 내던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자기 입에서 나온 말로 인해서 천마신교의 교도들의 삶이 좌지우지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함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걸릴까요. 사고님?”

    소청은 이곳이 신기하기는 해도 산본의가로 빨리 돌아갔으면 하는 듯 린린에게 물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 교주가 선출될 때까지 내가 있어야 할 건 아니고 교주를 선출할 사람들이 구성되는 것까지만 봐도 될 것 같기도 해. 신교에 위협이 되는 사람들이 사라지면 그때는 더 있을 필요도 없지. 더 있는 게 오히려 부담될 수도 있고.”

    “누구한테요?”

    “새로 교주가 될 사람들이랑 새 수뇌부한테 그렇겠지. 전사와 신교도들의 충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게 향할 거야. 하늘에 태양이 두 개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신교에 지존은 한 사람만 존재할 수 있는 거거든. 그러니까 나는 최대한 빨리 떠나는 게 좋아.”

    소청에게 설명을 하면서 린린은 정말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훨씬 더 서두르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도 같이 도와줘. 그래야 더 빨리 끝나지.”

    아진이 할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과정을 한 번 봐 두면 아진 자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지존. 사대 마가의 수뇌부들이 이미 마가를 빠져나갔습니다. 곳곳에서 격전이 벌어지고 있는데 지존의 지시를 들어야 할 것 같아서 와 봤습니다.”

    보고를 하러 온 사람은 섬마대주였다.

    이곳에 올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워낙 주위의 일들이 급박하게 흘러가서 그랬는지 아진과 소청에게 눈길을 주지도 못하고 있었다.

    “예견된 일이 아니냐. 그들을 뇌옥에 가둔다고 해도 문제는 생길 것이다. 지금은 그냥 도망치도록 놔 두는 게 좋을 거야. 그리고 은밀히 추살조를 꾸려 그들의 소재를 파악해 두어라.”

    “예. 지존.”

    “그들의 행방을 놓치면 그때부터는 일이 아주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고 실력 있는 자들로 추살조를 꾸리도록 해. 과거에 그런 일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었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린린이 말하는 것은 신교를 떠난 자가 혈교와 같은 비밀 단체로 흘러들어가 세력을 키워 대항하는 것일 터였다.

    천마신교에서 뻗어 나간 혈교는 그동안 여러 차례 수면 위로 올라와 존재를 과시했는데 그때마다 중원이 피로 물들곤 했었다.

    혈교에서는 인륜에 반하는 기이한 대법을 만들거나 살상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이 한 번 출현하면 그때마다 공적으로 몰려 정사마가 연합해서 혈교의 소탕에 나서곤 했었는데 어찌나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혈교가 뿌리 뽑히지 않는 것은 천마신교의 은밀한 지원이 있어서 가능하다며 천마신교 내부에 혈교의 세력이 있다고 의심을 하고 색출해 내려 한 적도 있었지만 린린이 패월악이었을 때도 그 일은 실패를 거듭했다.

    “그들이 혈교와 손을 잡으면 신교에는 큰 위기가 찾아올 것이다. 신교의 존립과도 관계가 되는 일인 만큼 각별히 힘을 써야 한다.”

    “존명!”

    섬마대주는 금세 모습을 감추고 사라졌다.

    “가. 오라버니. 소청이도 가자. 당분간은 교주전 가까이에 머무는 게 일 처리를 위해서도 좋을 거야.”

    그러다가 린린이 발걸음을 머뭇거렸는데 아진은 린린이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았다.

    아진도 이번에 보고 느낀 거였지만 린린은 일단 그렇게 하는 게 필요하다고만 한다면 위기에서 얼마든지 빛을 발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누가 묻는다면 린린은 그 일의 전후 사정을 다 꿰뚫고, 그 일을 그냥 놔두었을 때 어떤 결과가 생길지도 예상을 한 채 대답해 주었다.

    린린은 다른 누구로도 대체할 수 없을 정도로 현명했고 권위가 물씬 풍겼다.

    그것은 린린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싫어할 사람은 없겠지만 지금은 민감한 시기였다.

    새로운 교주가 선출돼야 하는 시기.

    그 시점에 강한 통솔력을 보이는 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뒷사람에게 상당한 부담을 안길 수가 있었던 것이다.

    린린은 그 선을 어느 정도에서 맞추는 게 좋을지 잠시 그 생각을 하는 듯했다.

    아진은 린린이 너무 뛰어나서 그런 걱정까지 하는 것을 보며 신기해했다.

    “소청아. 사고님 잘 봤지? 사람이 너무 훌륭하면 남들이 안 해도 되는 고민까지 해야 하거든. 그러니까 너는 그냥 대충 스승님 정도만 하고 살아.”

    “스승님도 너무 훌륭하신데요? 저는 사람들이 제가 누군지 알아볼 때마다 엄청 부담돼요. 잘못해서 사조님이나 스승님이나 사고님께 누가 될까 봐서요.”

    소청의 말을 들은 린린이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소청은 린린이 그렇게 해 줄 때마다 솔직히 얼마나 가슴이 벅찬지 알 수 없었다.

    모두가 우러러보며, 눈이라도 한 번 맞출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 린린이 자기에게 허물없이 친밀감을 드러낼 때면 정말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아진도 소청이 그런 기분을 느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귀여운 눈꼬리가 행복하게 접히는 것을 보면 저절로 알 수밖에 없었다.

    “일이 빨리 끝나고 소풍이라도 가면 좋겠다. 우리끼리.”

    아진이 말하자 린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기다려. 오라버니.”

    “너무 서두르지 마. 몸도 챙겨 가면서 하고.”

    “내가 마음대로 아플 수 있기는 한 사람인가? 조금만 아픈 기색이 보여도 오라버니가 다 낫게 해 줄 거잖아.”

    “그렇지. 우리 만두는 절대로 아프면 안 되지.”

    아진이 말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린린이 다시 그들에게 뭔가 말을 하려 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린린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질문을 하기 시작했는데 린린은 미안하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저녁 식사는 같이할 수 있을 거야. 오라버니.”

    “그래. 걱정하지 마. 우리가 애도 아닌데 뭐.”

    “응.”

    린린은 사람들과 얘기를 하다가 아진을 한 번 돌아보았고 급히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린린의 부름을 받고 아진에게 다가온 사람은 이십 대 초반의 무인이었는데 차림을 보니 상급 무력부대의 조장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혈마대 칠조장 흑천혈수 척도명이 공자님을 뵙습니다. 이곳에 계시는 동안 공자님을 보필하도록 명을 받았으니 필요한 일이 있을 때는 언제든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많을 텐데 우리까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진이 미안해서 말하자 척도명이 활달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저에게는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지존께서 저를 믿고 이 일을 맡겨주셔서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선은 처소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식사부터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식사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식사는 린린과 하겠…….”

    린린이라고 말을 하다가 교주 대행이라고 말을 해야 하나 하고 있었더니 척도명이 웃었다.

    “오라버니시니 호칭은 편하게 하셔도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아마 지존께서는 함께 식사하시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원로회의 분들과 호법들도 사라져서 지금은 수뇌부를 구성하는 일이 가장 급할 텐데 그 일이 해결될 때까지 정신없이 바쁘실 것입니다.”

    “그렇군요.”

    이해하지 못한 일도, 예상하지 못한 바도 아니었다.

    아진은 고개를 끄덕이고 척도명을 따라갔다.

    척도명은 교주전에 머물 자리를 잡아 주었다.

    린린의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척도명이 가장 좋은 곳에 처소를 마련해 준다고 무리수를 두는 것 같았다.

    아진은 그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척도명을 불러세웠다.

    “척 조장님.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습니다. 교주전은 곧 이곳의 주인이 되실 분을 위해서 준비해 둬야 할 듯합니다. 우리는 그냥 적당히 쉴 수 있는 곳이면 되니 이곳 말고 다른 곳에 자리를 마련해 주셨으면 합니다. 교주 대행에게 괜한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지존께서는 두 분께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 그럴 거라는 것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교주 대행의 마음이고 나는 그 마음을 다 받았으니 됐습니다. 작고 조용한 전각에 자리를 마련해 주시고 나중에 우리가 거기에 있다고 교주 대행에게 이야기나 해 주시면 됩니다.”

    “…….”

    척도명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는 별것도 아닌 일을 어렵게 만드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진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진은 두 번의 인생을 살면서 무시라는 무시는 부족하지 않게 받아왔고 다른 사람의 태도에서 얼마나 쉽게 감정이 상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새로 교주가 되는 사람은 아무리 잘하려고 해도 매사에 린린과 비교가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단언하건대 세상에 패월악을 뛰어넘을 수 있는 교주는 다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느끼게 될 열등감이나 자격지심은 상상 이상일 텐데 자기가 들어오기 전에 교주전에 패월악의 오라버니가 머물렀었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으로도 기분이 상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본의가에서 함께 머물렀던 사람 중에서 교주가 나온다면 그나마 좀 나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때는 더더욱 그들의 기분을 미리 신경 써 주고 싶었다.

    척도명은 자기가 절대 아진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서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진은 일단 한 번 마음이 서기만 하면 그때부터는 옆에서 누가 뭐라고 말을 하든 간에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척도명은 다른 곳에 처소를 준비하고 그곳으로 식사를 준비해다 주었다.

    아진의 눈에는 그곳에 있는 사람들이 린린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끝도 없이 들어오는 음식을 통해 보이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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