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9화
249화
“어이구. 창피해.”
“…….”
린린 역시 그랬다.
“와…… 진짜 내가…….”
린린은 할 말이 정말 많았다.
패월악이 이랬다는 걸 알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아진의 말이 서러워서 삐쳤던 거라고 하면 그 말을 누가 믿을까.
제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끼며 린린이 두 손으로 얼굴을 톡톡 두드렸다.
“얼굴 빨개지니까.”
“뭐, 뭐!!”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냐는 듯이 린린이 쏘아보자 아진이 굴하지 않고 말했다.
“김치만두 같다. 아. 너는 김치만두가 뭔지 모르겠다? 김치 먹고 싶어지네. 김치만두라는 게 있어. 김치가 들어간 만둔데 김치가 들어가면 만두가 빨개지거든. 김치가 빨개서.”
“뭐래?”
린린은 괜히 아진을 노려보고 사람들에게 돌아갔다.
엉망진창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아진과 얘기를 나누고 나니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린린은 사람들에게 돌아간 자리에서 말했다.
“나는 신교로 돌아가지만. 그리고 설인정을 구해서 돌아오겠지만 그렇다고 다시 천마가 되지는 않을 거다.”
그 말을 들은 이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패월악을 다시 교주로 모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를 곁에서 보필할 수 있을 거라는 꿈에 부풀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지, 지존…….”
역천마의는 떨리는 음성으로 린린을 바라보았다.
“지존…… 그렇게 급하게 결정하실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우선은 신교로 돌아가서 상황을 살펴보신 후에 결정한다고 해도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섬마대주가 말하자 다른 이들도 그렇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이번 생은 다른 것 때문에 내 행복을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야. 이번에는 어떤 것에도 묶이지 않고 나만을 위해서 살겠다고 생각했어. 신교는 내가 좋아하는 곳이지만, 마신님이 나에게 맡겼던 곳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신교에 묶여 있기는 싫어. 그러고 싶지 않아.”
“…….”
아진은 그것이 린린의 진심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본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자신의 진심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진은 린린이 조급하게 내린 결정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혹시라도 린린이 그러는 것이 자기 때문이라면 좀 더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도 일단 린린의 표정이 풀어진 것을 보고 어느 정도는 마음을 놓은 채 그들은 다시 경공을 전개해 나갔다.
“내일이면 도착하겠습니다. 지존.”
“그래. 내일이면.”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두들을 바라보았다.
힘들어하는 것 같으면 하루 정도 더 쉬었다가 가자고 하는 게 좋을까 해서였다.
신교에 갔을 때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는데 이동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붓고 준비도 없이 싸움을 시작하면 안 될 일이었다.
“역천마의. 도착하자마자 단리서언과 싸우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
역천마의는 뇌혈검과 섬마대주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약간 자신 없는 표정이었다.
별 것 아닌 전투라면 몰라도 상대가 단리서언이라면 그때는 전력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때라면 자기들이 가진 기량을 다 발휘해야 하는데 지금의 상태로는 무리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듯했다.
“쉬었다가 와. 충분히 쉬어서 각자의 몸을 최고의 상태로 만들어서 와.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되지 않고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모두 린린을 먼저 보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만 마지막 말에 고집을 부릴 수가 없었다.
이대로 강행한다면 천마신교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해서 쓰러질 듯했고 그렇게 해서는 린린의 말대로 폐밖에는 되지 않을 것 같았던 것이다.
“곧 따라가겠습니다. 지존.”
역천마의가 말을 하고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얼마나 안타까울지 그 심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린린은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이제 다른 사람의 심정까지 헤아릴 수 있게 됐구나.
린린은 문득 그 사실을 떠올리며 자기가 제법 컸다고 생각했다.
“소청이는 어떻게 할래?”
소청은 반반이었다.
같이 가는 것이 심적으로는 편할 것 같았지만 싸움이 격렬해질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충분히 축기를 하고 싸움에 임하고 싶기도 했다.
소청이 주저하는 것을 본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청이 너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와. 나는 설인정이 괜찮은지 봐야겠어.”
그 말이 끝이었다.
그녀의 신형은 번개처럼 사라졌다.
허공에 나란히 빛줄기 두 개가 그어지듯 하다가 사라졌다.
두 개의 빛 같은 신형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멀리 사라지고 있었다.
* * *
교전에 단리서언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단리서언의 기세가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에 저런 살기가 다 있다는 말인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살을 콕콕 찔러대는 것 같은 살기에 사람들은 몸을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순간 날카로운 살기가 그대로 몸을 파고들고 관통해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방진 놈들이 귀여운 짓을 하고 있었구나.”
교전으로 들어온 단리서언은 마신상 앞에 서 있는 설인정과 그 옆의 전사들을 보며 말했다.
전사들은 단리서언이 나타나자마자 거의 본능적으로 몸을 움직이며 대형을 짰는데 그 대형이 설인정을 단리서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것 같은 모양을 취했다.
단리서언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전사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마신이 단리서언을 제어하는 것 같더니 왜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단리서언도 그들의 표정이 왜 변한 건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단리서언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너희는 속은 것이다. 지금껏 천상천면에게 놀아난 것이지. 저년이 뭐라고 말을 하던가. 자기가 마신님의 은총이라도 받았다고 하던가?”
“…….”
사람들은 숨이 막혀올 것 같은 기분에 꼼짝도 하지 못했다.
“어리석고 가소로운 것들. 마신님의 비호를 받는 자는 나, 천마, 단리서언 뿐이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그리고 너희가 내 손에 죽어서 그 증명을 더욱 굳게 할 것이다.”
“교…… 교주님……!”
몇 사람의 몸이 터져나갔다.
압도적인 기운에 결국 버티지 못했던 것이다.
설인정은 처연했다.
결국 이리되어 버리는구나 하면서도 그녀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진실을 알았으면 했다.
진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지존을 위해 싸워줄 수 있기를 바라며 설인정은 마지막 싸움을 준비했다.
“재미있어.”
단리서언이 웃으며 말했다.
그는 천상천면이 왜 그 별호를 가졌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그 별호는 즉흥적으로 여러 개의 얼굴 중 하나를 뒤집어쓰면 되는 거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자신이 여러 개의 인격 중 골라서 영체이혼대법을 하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할 줄 아는 것이 그런 것뿐이니 대단한 것은 없을 거라고 단리서언은 멋대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진 천의 얼굴 중에 어떤 얼굴이 있는지, 그 모습들이 그녀에게 어떤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그냥 죽어 줘야겠다. 천상천면. 곱게 죽이지는 못하겠어. 내가 아주 기분이 나빠서 말이지.”
천상천면의 주위에 있던 이들은 순식간에 쓰러져 바닥에서 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쉽게 죽이는 것은 싫어서 목숨을 부지하게 해 놓았는데 그것 때문에 그들은 극한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천상천면.”
“나를 죽이려고 온 것이면 닥치고 죽여라.”
설인정의 입에서 독한 말이 쏟아졌다.
단리서언은 상상하지 못했던 대응에 기가 막혔다.
감히.
감히 기루의 루주 따위가.
단리서언은 손을 들어 천상천면의 얼굴을 사납게 후려쳤다.
그들 사이에는 십여 장의 거리가 있었고 손이 직접 닿지도 않았지만 천상천면은 거기에 휘둘렸다.
몸이 날아갈 정도로 대단한 기세였다.
그러나 천상천면은 다시 단리서언을 노려보았다.
험악한 눈빛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것이나 하려고 온 건 아닐 텐데. 장난하려고 온 건가?”
천상천면이 다시 한번 단리서언의 신경을 긁었다.
단리서언은 천상천면이 노리는 게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이번에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천상천면의 몸을 타고 앉아서 두 주먹으로 번갈아 얼굴을 때렸다.
조그만 얼굴이 그의 주먹 아래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부서지고 짓이겨졌다.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물을 흠뻑 먹은 이불을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단리서언은 그대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살의를 느꼈다.
‘아니지. 안 되지. 이렇게 빨리, 이렇게 간단히 죽어 버리게 할 수는 없지.’
그는 간신히 이성의 끈을 붙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천상천면은 다 죽어 가는 것 같은 와중에도 다시 그를 도발했다.
“끝인가? 겨우 이걸 하겠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단리서언은 미칠 것 같았다.
그는 그대로 달려가 천상천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크헉!”
천상천면의 몸이 위로 튕겨 올랐다가 가라앉았다.
“젠장!”
죽였다가 살려낼 수 있는 능력이 아직 남아 있으면 좋을 텐데 그것은 다 쓰고 버렸다.
그 능력을 나중까지 아껴두는 게 좋았을까 했지만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상대를 갖고 놀기에, 지독하게 농락하기에 좋은 능력이었지 정말 목숨을 걸고 대해야 할 때는 별로 효율적이지 못했다.
“센 척도 적당히 해라. 천상천면.”
“센 척? 내가 세 보이나? 무서운가 보지? 크크크큭.”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가 됐으면서 천상천면이 웃었다.
소름 끼치고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렇게 맞았으면 이제 비굴한 모습을 보일 때도 됐으련만 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뭔가. 패월악에게 네 시신을 보여 주기라도 하려고 그러나? 그래서 죽지 못해 안달하는 건가? 패월악이 네년의 시신을 보면 눈이 돌아가서 나를 공격할 것 같아서? 그래서 패월악이 다시 신교의 주인이 되기를 바라고 이러고 있는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자꾸 이렇게 제 신경을 긁을 이유가 없을 것 같았다.
“그것도 제법 괜찮은 생각이네.”
천상천면은 단리서언을 한껏 무시하는 듯 말했다.
왜 이렇게 화가 나는 걸까.
제가 이 자리에 서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전부 다 안다는 듯한 오만한 얼굴이 왜 이렇게 견디기 어려운 걸까.
단리서언은 이번에야말로 천상천면을 죽여 버릴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천상천면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그의 주위에 날카롭게 바람이 휘몰아쳤다.
주변의 기온이, 그가 걸음을 한 번씩 내디딜 때마다 급속도로 떨어지며 대기가 하얗게 얼어붙었다.
천상천면의 앞에서 그 힘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는데 끝까지 긁어대는 통에 그의 이성이 툭 끊어졌다.
허공에 만들어진 얼음조각이 바람에 흩날렸다.
소용돌이에 말려 휘돌던 얼음조각이 점점 형체를 이루었다.
천상천면은 상상하기 어려운 광경을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다는 얼굴이었다.
“잔재주를 가졌구나. 단리서언.”
“네가 기어이 미친 것이구나!”
단리서언은 이를 악물고 잇새로 소리쳤다.
그가 깨워서 새로 차지한 몸은 자연지기를 다스리는 능력을 가진 자였다.
지금 단리서언은 그가 가진 능력 중 바람과 물을 다스리는 능력을 펼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천상천면은, 그 모습을 눈앞에서 본 저 천상천면은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이를 딱딱 부딪치며 비명을 질러야 옳았다.
저런 얼굴을 하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