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247화
“왜 날 보냐? 그건 네가 결정해야지.”
“내가 안 돌아가도 된다고?”
“네가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 건데 왜 얘기가 그렇게 돼?”
“말해 봐. 오라버니 생각은 어떤지. 내가 없어도 돼?”
“당연히 네가 있는 게 낫기는 하지만 너한테 네가 꼭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그걸 못하게 할 수는 없는 거 아니야?”
“그래?”
그래?
아진은 그게 무슨 의미일까 했다.
마음이 좀 허허롭기는 했다.
하지만 각자에게 자기가 가야 할 길이 있다면 헤어짐이야 견뎌내야 하는 게 아닌가.
참기 힘들어도 그래야 했다.
선이남이나 남이천이나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 다수와 그랬던 것처럼.
그러다가 다시 기회가 돼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무척이나 반가우리라.
요리가 나올 때를 맞춰 마두들이 내려왔다.
급한 대로만 축기를 하고 갈무리를 한 듯했다.
“와아…… 냄새가 좋은데요?”
섬마대주가 말하며 다가오자 다른 이들도 코를 킁킁거리면서 의자에 앉았다.
커다란 접시에 가득 담긴 요리가 게눈 감추듯 사라졌다.
도중에 위기의식을 강하게 느낀 위도가 먼저 음식을 추가로 주문해 두었으니 망정이었지 안 그랬으면 굉장히 마음 상하는 일이 생겨날 뻔했다.
역천마의만이 린린과 아진 사이의 불편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 일을 촉발한 소청조차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검은 야행복을 입은 복면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사대 마가의 담을 넘었다.
패월악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퍼지는 동안 혼란을 틈타 상대 마가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패월악이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단리서언을 응징하기만 하고 자기가 직접 신교로 돌아오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신교 복귀를 미룰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사대마가는 단리서언의 사후를 대비하고 있었다.
누구도 단리서언을 위해 나서 주지 않았지만 그것은 단리서언이 원망할 일이 아니었다.
일이 그렇게 되도록 만든 이가 바로 단리서언 자신이 아니었던가.
자신의 가문을 지워 버리기 위해 그가 들인 공은 결코 작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 쥐새끼들이 여럿이 몰려다녀 봤자 쥐새끼지. 용기 내서 덤비면 겁이 덜 나나?”
담장에서 내려서자마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세가의 무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들을 포위했다.
‘처음부터 들켜 버릴 줄은 몰랐는데.’
웬만하면 기습을 하자고 생각했지만 들킨다고 해도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들키면 들키는 대로 정면승부를 벌이면 그만이었다.
그때부터 서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수십 합이 이어져 나가도록 승기는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백중세가 이어졌다.
그것이 백 합, 이백 합을 넘어서면서 딱 고만고만한 인간들이 힘만 빼고 있었다.
한번 쯤 누가 확실하게 기세를 잡아서 싸움을 끝내 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이 이 사람 저 사람의 머릿속에 들 때쯤이었다.
누군가 갑자기 힘을 내고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습관적으로 휘두르던 검이, 변칙적으로 들어온 검에 잠시 길을 잃었고 그때를 시작으로 분위기가 급변했다.
목표가 된 자의 몸이 길게 갈라졌다.
참혹할 정도로 수치스러운 부상이었다.
너무나 어설프게 당했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만회해 보려고 했지만 가끔은 눈먼 칼에도 죽는 사람이 나오는 법이었고 그때가 딱 그런 경우였다.
실력은 그만그만한 사람들이 너무 지쳤고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 더 버틴 자가 버티지 못한 자를 쓰러뜨리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단리서언이 그곳을 지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조금 멀리까지 산책을 하다가 이상한 소리에 그곳까지 왔다.
그리고 열 명이 넘는 무인들이 달밤에 서로를 향해 검을 휘두르며 검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다.
단리서언은 귀찮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고 그곳에 있는 이들을 하나씩 죽여 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냐.”
처음부터 그가 한 말은 그 한 마디였다.
“……!”
그들은 그 자리에 나타난 사람이 교주라는 사실을 보고도 쉽게 믿지 못했다.
어떻게 그가 그 자리에 있는 건가 하면서 한편으로 이 일을 어떻게 고해야 할까 걱정했지만 그런 걱정을 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더 이상 삶에 속한 존재가 아니게 되었던 것이다.
“아직 말을 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군.”
단리서언이 거침없이 손을 휘두르자 누군가 바닥에 엎드리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패, 패월악이 돌아왔다는 소, 소문에…… 저희는 지존을 향한 충성심으로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처단하고 있었습니다.”
“뭐?”
단리서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미리 입단속을 했기에 그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패월악이 살아 돌아왔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더라도 그것은 유언비어이니 흔들리지 말고 그런 말을 한 사람을 고발하라고 하자 효과가 나타났다.
처음에 패월악이 살아 돌아왔다는 말을 먼저 들었다면 충격이 컸을 텐데 나중에는 패월악이라는 이름을 듣고도 사람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자들이 하는 말이 다 뭐라는 것인가.
단리서언은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꿇어앉은 자를 재촉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사실대로 고하여라!”
그는 주저하다가 단리서언의 검이 목을 찌를 듯이 들어오자 급히 입을 열었다.
“천, 천, 천상천면이 교전에서…… 교전에서 사람들에게 그 말을…….”
단리서언의 검이 그의 목을 찔렀다.
단리서언조차 놀라서 퍼뜩 힘을 주어 검을 빼려고 했지만 검이 더 빨랐다.
단리서언은 놀라서 검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는 그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검이 스스로 움직였던 것이다.
단리서언의 검미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놀라운 것은 천상천면이 그런 짓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눈앞의 무인이 그 말을 고할 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히려 단리서언의 의지를 거스르고 검이 달려가 그의 목숨을 거두었다는 사실이 더욱 놀라웠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계속 마신이 떠올랐다.
단리서언은 그대로 교전을 향해 달려갔다.
그때 갑자기 천둥 번개가 그를 노린 것처럼 내려치지 않았다면 그는 교전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러나 무시무시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단리서언의 주변으로 벼락이 떨어졌다.
“……!”
아무 것도 두렵지 않던 단리서언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겁이 났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동안 믿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믿음이 갑자기 생기기도 하는 법이었다.
단리서언이 그랬다.
그는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자기가 교전에 가는 것을 마신이 원하지 않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왜 하필 지금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전대 교주를 죽였을 때는 침묵하던 마신이 왜 지금 그러는 것인지.
‘설마 패월악 때문에?’
그 생각에 단리서언은 질투로 눈이 멀었다.
그러나 교전으로 가고 싶은 마음은 다시 들지 않았다.
빨리 돌아가지 않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벼락이 위협적으로 그의 몸에 떨어졌다.
단순히 가까이에 내리꽂는 것으로는 성이 차지 않는다는 듯이 단리서언의 머리 위에 직격으로 내리꽂힌 벼락은 그의 몸속의 핏방울 하나까지 다 말려 버리는 것 같았다.
단리서언은 비명을 지르고 몸을 던졌다.
그것은 경고였다.
단리서언을 죽이는 것이 어려워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신교의 교주 자리에 앉아 있는 그를 죽이는 것이 마신의 명성에 해가 되어서 더 이상은 손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 같았다.
단리서언은 도망치듯이 교주전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흠뻑 젖은 옷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단리서언은 몸이 벌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들여 설인정을 죽이라고 명했다.
설인정을 잡아 오라고 할까 했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어서였다.
교주의 명을 받은 이들은 충성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들의 앞에 정해진 결과는 한 가지였다.
* * *
비가 많이도 내렸다.
몇 개의 촛불은 커다란 교전의 내부를 밝히기에 턱없이 모자랐다.
설인정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섭게 퍼붓는 빗줄기에 전각마저 쓸려 내려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되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 동안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최대한 말하자고 생각했다.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주어졌다.
벌써 사람들이 찾아와 자기를 죽여야 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벌써 단리서언에게 소식이 들어갔을 것 같은데, 그가 사람을 보냈어야 할 텐데.
이상한 일투성이였다.
온통 이해되지 않는 것들뿐이었다.
창밖을 보던 설인정은 다시 마신상의 앞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묵상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따라 상념이 많았고 묵상을 하는 동안 그녀의 생각은 패월악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었던 때로 돌아갔다.
설인정은 빗속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이들이 갑자기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쓰러져, 바닥에 빠르게 차오르는 빗물 때문에 숨이 막혀 죽은 것을 알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을 때 사람들은 오직 교주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무력대의 무인들이 수도 없이 쓰러져 죽은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모두 교주전이 있는 곳으로 향하던 중에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그것은 한 가지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었다.
설인정이 마신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그런 설인정이 하는 말이라면 거짓이 아닐 테고 그렇다면 패월악 교주가 살아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는 의미였다.
‘교주님이 살아계신다. 지존께서 돌아오시는 거야!’
일단 그런 생각이 든 이후에 그들의 마음속에서 교주는 패월악이었다.
폭우가 말갛게 씻고 지나간 대기는 투명하게 빛났고 사람들은 한 사람을 떠올렸다.
무인들의 시신을 본 이들은 평범한 신교도와 전사들만이 아니었다.
단리서언의 측에 붙어서 그동안 기득권을 누려 오던 자들.
단리서언과 함께 마신이 존재하지 않는 듯 탐욕을 만족시켜 오던 이들 역시 간밤에 일어난 일을 보았다.
그들은 교주전으로 달려가 서로 그 소식을 전하려 했다.
단리서언은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지만 소식이 들어오자 깊은 충격에 빠졌다.
마신이……
마신이 나를 버린 것인가.
자신은 쉽게 버렸으면서도 정작 마신이 자기를 버릴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그는 충격에 빠졌다.
“어떻게 하실 것인지요. 지존. 빨리 명령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신교도와 일반 전사들의 동요가 심해지면 그때는 손을 쓰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수석 호법의 말에 단리서언은 생각에 잠겼다.
평소라면 단리서언을 똑바로 보고 말을 하지도 못할 자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말투는 마치 추궁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단리서언 역시 그것을 느꼈지만 지금은 말투를 두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천상천면을 죽이십시오. 교전을 불태우시더라도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백 명이 죽게 되어 있다면 천 명을 보내시고 그들마저 전부 죽으면 그때는 만 명을 보내십시오.”
그러다 보면 몇 명은 교전에 이르러 천상천면을 죽일 수 있을 거라는 말에 단리서언은 가서 시행하라고 명을 내렸다.
어차피 설인정을 죽이기는 해야 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은 마신의 비호를 받는 설인정을 추앙하고 있었다.
그것은 좋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단리서언은 과연 몇 명이나 교전에 도착할 수 있을까 했다.
마신의 비호를 받는 천상천면에게 누가 다다를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