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244화
“그래. 홍성루는 어찌하고 여기에 왔느냐.”
“잠시 쉬고 싶어서 돌아왔습니다. 지존. 오래 머물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달포는 있었으면 합니다.”
“네가 교를 떠난 지 정말 오래됐지.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단리서언은 설인정의 생각을 읽으려 하다가 아차 싶었다.
그것은 위도에게 패배해서 버려 버린 몸이 가진 능력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몸으로 영체이혼대법을 하며 이제는 그 능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몸이 그 점에서는 꽤 쓸모가 있었는데 아쉽게 됐다고 생각하며 단리서언은 속으로 혀를 찼다.
신교를 이렇게라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 능력의 효과가 컸다.
뇌혈검에게서 패월악의 계획을 읽어 내지 못했다면 그는 아마도 지금쯤 신교에서 쫓겨 신교의 추살조를 피해 다니는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패월악이 다시 태어났다니.’
단리서언은 지금도 그 일을 다시 떠올릴 때마다 치가 떨렸다.
그러면서 그는 지금 설인정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얼굴을 하게 될지 궁금해했다.
설인정이 패월악을 연모했다는 것은 많은 사람이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숨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단리서언은 설인정을 괴롭히고 싶어서라도 그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지금의 신교는 든든한 반석 위에 있다고 할 수 없었다.
위태로웠고, 당분간은 조심해야 했다.
신교 내부의 결속을 다지면서 힘을 키워야 하는 때였던 것이다.
“황금에 대해서는 왜 내가 시킨 대로 하지 않았느냐.”
“죄송합니다. 지존. 변명의 여지 없는 실수였습니다.”
“지금껏 그런 실수를 한 적이 없던 너이지 않으냐. 무슨 일이라도 있었느냐.”
“그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갑자기 입회비를 내고 입회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서…….”
“변명이 궁색하다는 생각은 너도 이미 하고 있을 테니 더 이상 추궁을 하지는 않겠다. 홍성루에 손해가 생긴 것도 아니고 네가 스스로 근신하기로 하면서 신교에 봉헌하기로 한 것도 있으니 말이다.”
설인정은 단리서언이 그 일로 책임을 물을 것을 대비해 스스로 자신이 받을 급봉 6개월 치를 미리 신교에 봉헌하기로 했다.
단리서언에게는 그것도 적은 돈이 아니었고 설인정은 여전히 쓸모가 많은 패였기에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것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여기에 네가 아는 사람이 남아 있기는 한 것이냐.”
“가족은 모두 죽었지만 마을 사람들은 있습니다. 사람이 그리워서 온 것이 아니고 오랫동안 떠났던 신교가 그리워서 온 것입니다. 교에 머무는 동안에는 교전에만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이라면 그렇게 하도록 하여라.”
단리서언은 금세 지루해져서 손을 내저어 설인정을 내보냈다.
설인정은 단리서언의 앞에서 자신의 증오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 온갖 애를 써야 했는데 다행히 그 마음을 들키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을 놓았다.
설인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몰려왔고 잠시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설인정은 자기가 말한 대로 교전으로 갔다.
그리고 교전에서 마신의 신상 앞에서 예를 올렸다.
‘마신이시여. 지존을 뵐 수 있게 해 달라는 간청을 들어 주셨으니 약속대로 마신께 목숨을 드리기 위해 왔나이다. 이곳에서 목숨을 드릴 것입니다.’
설인정이 마신상을 올려다보며 맑은 얼굴로 기도했다.
결심이 선 듯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기도가 끝나자 호교사자가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천상천면.”
“계셨습니까.”
“교의 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들었다.”
“저는 그랬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있는 분들도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서 그곳에서 충성할 수 있었던 것인데 실망입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이에게 다가와 한가롭게 얘기나 좀 나눠 볼까 해서 왔던 호교사자는 갑작스러운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눈가에는 살짝 노여움도 보였다.
“그것이 무슨 말인가.”
“단리서언에 대한 얘기입니다.”
“……!”
호교사자는 깜짝 놀라 혹시 그 말을 다른 이가 듣지는 않았는가 해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지만 그는 설인정이 단리서언의 이름을 부른 것을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죄책감을 느꼈다.
누가 우연히 이 모습을 목격한다면 그가 설인정과 뭔가를 함께 도모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어서였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교를 떠나 있었다고 해서 마음까지 떠나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단리서언은 마신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입니다. 마신님을 섬기는 본교의 교주가 마신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는 호교사자님께서 지금껏 단리서언을 바른길로 인도하려고 말씀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호교사자의 얼굴에서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처…… 천상천면,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것이냐!”
“호교사자님을 위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단리서언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죽이는 것뿐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한 번 죽으면 끝입니다.”
그러다가 설인정은 역천마의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렸다.
단리서언이 자신을 몇 번이나 죽였다가 다시 살려냈다는 말.
그러나 그런 것이야 사소한 차이에 불과했다.
그녀가 말하려는 것은 단리서언이 할 수 있는 것과 마신이 내릴 수 있는 벌이 차이가 있다는 거였다.
호교사자는 점점 설인정의 말을 듣는 것이 부담스러워졌다.
처음에는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사실이 단리서언에게 들어갈까 봐서였는데 나중에는 마신의 앞에서 느껴지는 두려움 때문에 그랬다.
“호교사자님. 많이 아는 사람은 더 많은 책임을 추궁받게 됩니다. 호교사자님은 마신님에 의해 이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호교사자님을 임명한 분은 패월악 교주셨습니다.”
“그 이름은 입에 담지도 말아라!”
그는 이 일이 정말 안 좋게 치닫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저는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호교사자는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의도적으로 설인정과 거리를 벌리고 싶어 그랬던 것이다.
그러나 설인정은 그대로 말을 이었다.
“패월악 교주께서는 살아계십니다. 역천마의님도 그분과 함께 계십니다.”
“……!”
호교사자는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을 듣고 진노 어린 눈으로 설인정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설인정은 후련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하려고 온 것이니 이제는 죽어도 한이 없을 터였다.
그래도 죽기 전에 좀 더 많은 사람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싶기는 했다.
“그것은 유언비어다. 지존께서 이미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릴 자가 나타날 거라는 사실을 경고하셨다. 설마하니 그런 짓을 할 자가 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가요? 단리서언이 머리를 쓴 것 같지만 잘 쓴 것은 아니군요. 왜 단리서언이 그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시나요?”
“……무슨 말이냐.”
“단리서언이 왜 그 말을 했냐고 묻는 것입니다. 단리서언이 언제 문제를 그런 식으로 해결하는 자이던가요? 신교도들이 죄를 지을까 걱정하며, 신교도들이 잘못된 길로 갈까 염려하며 그리 하지 말라고 어르던 자인가요? 죄를 지으면 목을 치는 자였지 그 길로 가면 안 된다는 말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 같은데. 호교사자님께서 생각하는 단리서언은 다른가요?”
“천상천면!”
“그것은 단리서언답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런데도 그가 그렇게 말을 했다는 것은 그 말이, 그 진실이, 언젠가는 퍼지고 퍼져서 신교에까지 들어오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겁니다. 그래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사람들이 의심하도록 그런 거예요.”
“그런 말을 하고도 네가 무사할 거라고 생각했더냐!”
설인정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저 웃은 것뿐인데도 호교사자는 그 자리에서 다리에 힘이 풀려 비틀거렸다.
무형지기를 폭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웃고 있는 것뿐인데도 진실을 알고 있는 자가 눈을 마주한 채 짓는 웃음은 그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
호교사자는 반박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결코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이어졌다.
“전대 교주의 시신이 신전 앞에 매달려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전대 교주를 살해한 자가 누구인지 호교사자님께서는 밝혀내셨습니까.”
“…….”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자는 한 사람뿐이었다.
단리서언.
그리고 그가 지존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그를 단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누가 감히 신교 내에서 단리서언에게 죄를 물을 수가 있다는 것인가.
호교사자는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며 말했다.
그러나 설인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호교사자님은 호교사자님이 해야 할 일이 뭔지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아니. 그보다. 호교사자님은 마신님이 두렵지 않은 모양입니다. 마신님을 두려워한다면 단리서언이 한 짓을 보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단리서언에게 벌을 받는 것이 두려우시던가요? 그런 분이 마신님의 벌은 두려워하지 않으십니까?”
“그만해라.”
그가 단호하게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것이 설인정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계속 문제를 만들면 설인정 자신도 위험해질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그녀가 이미 죽음을 도외시한 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지 못했다.
“저는 그분을 뵈었습니다. 호교사자님.”
“……!”
누구를 말하는 거냐는 질문이 나오려고 했지만 그는 입을 다물었다.
듣고 싶지 않았다.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는 이미 그 이야기를 설인정이 오기 전에 수많은 사람에게서 들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한 사람들을 빠짐없이 죽였다.
그것이 마신의 뜻이며 신교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제 마음을 조금만 더 들여다보자면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그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혼란을 상상하는 것이 싫었다.
단리서언은 신교를 강력하게 만들 수 있을 만한 인물이었고 호교사자의 뜻에 부합하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단리서언에게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호교사자의 임무는 마신을 섬기고 신교도들에게 마신의 가르침을 가르치는 거였지만 그는 세속적인 권력을 수호하는 일에 오히려 더 적합하고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설인정의 맑은 눈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 같아 그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죽고 싶은 게로구나. 천상천면.”
“충분히 살지 않았습니까. 그분이 돌아오셨다는 말을 전하고 죽을 수 있다면 기꺼운 일이지요.”
그녀가 맑게 웃으며 말했다.
지나치게 맑아서 부숴 버리고 싶은 웃음이었다.
얼굴에서 그 웃음을 사라지게 하고 고통과 두려움에 질식하는 모습으로 살려달라 외치게 만드는 법을 그는 천만 개도 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녀에게도 통할까 하면.
그것은 자신이 없었다.
“호교사자님. 호교사자님이 침묵한 탓에 그 시간 동안 괴물이 자란 것입니다. 호교사자님은 언젠가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호교사자님의 잘못입니다.”
“닥치라고 하였다!”
설인정은 그의 말대로 했다.
이미 할 말은 마친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