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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43화 (243/470)

제243화

243화

아진은 위도가 무슨 생각으로 그 이야기를 꺼낸 걸까 했다.

이제는 위도에 대해서 나쁘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 가주에 대해 안 좋게 말을 하고 자신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는 건가 해서 아진은 잠시나마 기분이 나빠지려 했다.

“그게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어? 나는 올무를 풀어 주신 것 같은데. 용기 내도 된다고 알려주시려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뭐가요?”

“린린 말이야. 좋아하잖아.”

“에에?”

아진은 깜짝 놀라서 위도를 바라보았다.

입에 뭔가가 들어 있었다면 그대로 뿜었을 것이다.

“형님.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린린은 제 동생이에요.”

“그래. 동생이지. 그런데 진짜 동생은 아니잖아. 내가 만약에 그런 무인도에서 눈을 뜨지 않았고 가족들이 많은 곳에서 태어났으면 나는 예쁜 여자들이랑도 잘해 보고 싶었을 거야. 정말 운이 나빠서 무인도에서 눈을 뜨기는 했지만.”

“그건 비도덕적이고 반인륜적이에요.”

“그래? 내가 쓰레기인 건가? 내가 이런 놈인 걸 알고 무인도에 처박아 놓은 거였을까? 그런데 나는 내 생각이 잘못된 것 같지 않아. 음마가 되겠다는 건 아니잖아. 나도 순정을 갖고 있다고. 한 여자에게만 잘해 줄 거야. 그런데 내가 내 마음을 전부 바치고 싶은 사람이 이곳에서 만난 여동생이라면 그 점 때문에 제약을 받지는 않을 거라는 거지.”

“그래도 저는…… 저는 린린이 태어나는 것까지 봤는데요? 린린은 제 동생이에요.”

“린린은 패월악이야. 린린은 천마라고.”

위도는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아진은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이랑 그런 얘기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냥 일어나버렸다.

린린을 두고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것만 해도 린린에게 미안해져서 더 이상은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정말 멍청한 것 같아.”

“제가요? 형님이 아니라요?”

아진은 정말 억울했다.

“가주님이 술에 취해서 실수로 그런 말씀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해?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그런 분은 아니지만 분위기에 휩쓸리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하게 될 수도 있는 거잖아요. 실수하신 거겠죠.”

“아들의 중대한 문제를 가지고 실수를 하실 분이라고? 가주님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면 아진이 너는 가주님을 정말 잘못 아는 거야.”

확신에 차서 하는 말이 어째 이상하게 들렸다.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

아진은 그 말에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했다.

확실히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왜 그러셨을까.

왜 그러셨을까.

그 생각을 솔직히 속으로 한 두 번을 한 게 아니었다.

평소의 아버지와 너무 다른 행동이어서였다.

그런데 정말 위도가 하는 말이 맞는 걸까?

“누가 보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정말 잘 어울려. 그런데 남매라는 이유로 제한받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아. 물론 지금은 린린이 어리지. 그러니까 당장 혼인을 하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자연스럽게 감정이 쌓이게 될 때 그때 두 사람이 남매라는 이유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그걸 알게 해 주시려고 가주님이 아진이 너에게 그 얘기를 해 주신 것 같다는 거지.”

“…….”

아니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려 했는데 위도가 한 말을 바탕으로 이해를 하자 아버지가 했던 말이 전부 이해가 됐다.

그리고 그 모습은 그동안 아진이 알아왔던 아버지의 모습과 완전히 들어맞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 모두 두 사람을 응원하고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나중에 린린이 자라서, 그리고 아진이 네 마음도 더 자라게 되면 그때 서로 부담 갖지 말고 다가가라는 뜻일 테니까.”

아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곳을 도망치듯 나와 버렸다.

‘뭐래?’

그러면서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린린은 어리고, 태어난 이후에 자기가 줄곧 키워 온 거나 다름이 없었다.

가주나 가모가 들으면 기함할 이야기이겠지만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나 린린이 구음절맥에 걸려 있어서 그런 생각은 더욱 강했다.

구음절맥을 고쳐주려고 린린과 함께 다니면서 겪었던 그 눈물 없이 말 못 할 이야기들을 생각하면…….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래도 사고방식이 너무 자유분방한 것 같아. 이런 얘기가 오간 걸 알면 린린이 얼마나 기분 나빠 할까? 으으으. 린린 앞에서는 절대 그런 소리 못하게 해야지.’

하필 그때 린린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고 아진은 잘못한 것도 없이 찔려서 다른 곳으로 도망쳐버렸다.

* * *

가모의 뜻에 따라 산본의가에 철방이 만들어지고 북리세가의 야장들이 대거 이동해왔다.

산본의가에서 산본철방을 냈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전국의 유명한 야장들이 구름떼처럼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실력 하나는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그곳에서 꿈을 펼쳐 보고 싶어 했던 것이다.

그들은 산본의가가 아주 견실하게 커나간 것을 알고 있었고 산본뿐만 아니라 중원 전체의, 중원을 넘어서 나라 전체를 아우르는 아주 거대한 가문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이라면 자기들의 꿈을 넉넉히 실현하게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꿈이라는 것은 별것이 없었다.

그들은 일종의 예술혼을 가진 창작가와 비슷했다.

원하는 재료를 마음껏 공급받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은 채워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일에 매달려서 며칠이고 몇 달이고 풀무를 놓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일견 제선문주와 닮은 면도 있었다.

마침내 철방이 문을 열었을 때 가주와 도종은 비슷한 시선으로 아진을 바라보았다.

어머니를 말리라고 했더니 일을 이렇게 만들었냐며 잘하는 짓이라는 듯한 표정을 지었던 것이다.

일이 이렇게 커진 데에는 아진의 힘이 컸기에 아진은 할 말이 없어서 슬그머니 그들의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모에게서 피어나서 벽예월에게 옮겨붙은 불꽃이 아진에게까지 번지는 바람에 다른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일단 시작만 하면 잘될 거라 망할 자신이 없는데 어쩌라는 건가.

아진은 기회가 되면 만년한철을 구해 와야겠다는 생각까지 품고 있었다.

‘토번. 그래. 토번에 가서 사람들을 데려오거나 그곳의 제련 기술을 배워오거나 하자.’

“정말 나중에는 본가가 어떻게 될지 상상도 안 된다. 상상도 안 돼.”

아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 채로 도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샹샹도 안 댄다아. 샹샹도 안 대애.”

도종의 손을 꼭 잡고 서 있는 랑랑도 제 아빠를 따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도종의 붕어빵.

닮을 거면 엄마 좀 닮지 왜 꼭 아빠를 닮아서 그렇게 해적같이 생겼…….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고 마음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 집안 여자들은 어렸을 때 숯검정 눈썹에 무서운 인상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 특징인 듯했다.

랑랑을 보고 있으려니 어렸을 때의 린린이 떠올랐다.

“랑랑. 숙부님이랑 놀자.”

랑랑은 그러기만 기다렸다는 듯 팔을 활짝 벌렸는데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린린이 랑랑을 잽싸게 채갔다.

“나랑 놀아. 랑랑.”

랑랑은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렇게 평화로우면 그냥 아, 평화롭다 하고 생각하면 될 텐데 어떻게 된 게 마음속 한구석이 불안하고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어디선가 그들의 평화를 해치려는 이들이 꿈틀거리며 음산한 준비를 하는 듯했던 것이다.

“이것도 병이야. 좋으면 다 된 건데.”

아진이 말하자 도종과 린린은 왜 그러냐고 묻는 대신 정말 그렇다고 했다.

그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십만대산에 이르는 수많은 길.

그 길 중 하나에 실로 오랜만에 그곳을 찾은 한 여인이 들어서고 있었다.

정찰을 맡고 있던 신교의 무사들은 그 기척을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오래 탐색을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

“귀호대의 천상천면 설인정이다.”

그 말을 듣고는 바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있었어도 홍성루의 루주라는 설명을 듣고는 모두 길을 열었다.

귀호대는 패월악 교주 시대에 역천마의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무력부대였지만 지금은 조직이 와해되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역천마의가 신교를 배신하고 중원으로 갔다는 말이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나갔다.

그들에게 배신이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는 큰 죄였기에 설사 귀호대에 속해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도 스스로 귀호대를 부정했을 것이다.

신교 내부에 있던 귀호대는 스스로 귀호대를 탈퇴했고 외부에 나가 있던 자들만 아직 자신들의 소속을 귀호대로 밝혔는데 설인정이 그랬던 것이다.

천상천면 설인정이 신교에 돌아왔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퍼졌다.

개인적으로 그녀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먼저 찾아와 인사했다.

반가움과 호기심이 공존하는 시선을 보며 설인정은 자기가 드디어 신교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돌아오고 싶었던 곳.

그곳을 그립게 만들었던 패월악은 더 이상 이곳에 없지만 설인정은 이전보다 더 확고한 이유를 가지고 그곳에 서 있었다.

패월악이 아끼고 사랑하던 신교를 자신의 몸으로 막고 지켜내겠다고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그녀는 수많은 사람의 환영을 받으며 단리서언을 보러 갔다.

신교는 그사이에 더욱 크고 웅장해져 있었다.

저런 곳에 어떻게 전각을 만들 수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절묘하게 전각들이 들어서 있었다.

전에 없던 전각이 적어도 열 채가 넘게 새로 생겨난 것을 보며 그녀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것들을 하나하나 보았다.

단리서언은 설인정이 왔다는 보고를 듣고도 대수롭게 여기는 눈치가 아니었다.

지금의 단리서언은 한가하게 그런 것에나 신경을 쓰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섬마대에 있으면서 패월악을 보필해야 했던 이후 최악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패월악이 사라져 이제야말로 걱정할 것 없이 제 뜻대로 신교를 주무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단리서언은 이제 세상이 모두 제 생각대로 움직일 줄 알았다.

계획은 완벽했다.

그중 몇 가지가 틀어진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이 성공하면 그의 생각대로 될 터였다.

그런데 어떻게 모든 계획이 전부 다 수포로 돌아갈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것 하나하나가 실패하기도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나 버렸던 것이다.

단리서언이 받은 충격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컸고 위도에게 이상한 패배를 당한 후 도망치듯이 신교로 돌아온 그는 제 광분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는 신교도를 무참히 학살하며 그들에게 분풀이를 하려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폐관수련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영체이혼대법을 성공했다.

대법의 소재로 쓴 것은 오래전에 잡아 가두어 제 몸에 복속시켜 두었던 사십 대 초절정의 고수였는데 그의 영혼까지 복속시키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고수는 희한한 마공을 익혀 다른 이들의 공력을 흡수해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였는데 이제 그것은 단리서언의 능력이 되어 있었다.

폐관수련 후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바깥 일을 보지 않았지만 설인정의 알현을 받는 것으로 공무를 재개해도 좋을 듯했다.

설인정은 공손한 얼굴로 단리서언의 앞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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