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240화
설인정은 그런 지존을 볼 때마다 가슴이 울컥했다.
눈물이 나올 것 같기도 했다.
역천마의가 린린과 함께 홍성루에 왔을 때 설인정은 갑자기 찾아온 그들을 보며 조금은 놀랐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던 설인정의 시선은 린린을 본 순간 그대로 멈췄고 그때는 심장이 터져 나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
역천마의가 말을 하기 전부터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설인정의 눈시울이 부풀고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 역천마의는 처음에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니 피식 웃어 버렸다.
-보셨죠. 지존? 아직 포기하시면 안 돼요. 설인정도 지존을 알아보잖아요.
-정말 나를 알아본 것이냐.
린린의 말에 설인정은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목이 메어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지존.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그 말이 나오기까지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설인정은 그때까지 십만대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기에 자기가 한 말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됐는지 알지 못했다.
단리서언이 한 말 때문에 더 이상 사람들이 린린의 말을 믿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던 차에 설인정이 스스로 린린을 알아보아서였다.
나중에야 아진이 찾아와서 미리 설인정에게 린린에 대한 얘기를 해 주어서 그런 거라는 것을 알게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설인정이 린린을 알아보는 것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홍성루의 다른 마도들에게도 린린에 대해 알리는 것이 좋을까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그러지 않는 편이 좋다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역천마의는 설인정이 처음부터 워낙 특별했다고 말했다.
-지존을 정말 존경했으니까요.
그러는 동안 아진이 도착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됐다.
설인정은 역천마의와 섬전대, 비고의 경비 무사들이 전부 린린과 함께 다닌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부러워했다.
역천마의는 설인정이 금방이라도 기루를 두고 자기들을 따라나서겠다고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역천마의는 설인정이 남모르게 패월악 교주를 연모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지금의 감정도 다르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사실 패월악이었을 때도 린린은 음양인이 아니라 여자였고 모든 이들이 그녀의 말에 속았을 뿐이었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설인정.
린린이 물었을 때 설인정은 가슴이 요동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녀는 결국 고개를 저었다.
지존을 위해 자기가 뭘 해야 할지 알 것 같았던 것이다.
단리서언에 의해 거짓이 되어 버린 전설.
자기라면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신교에 돌아가서 설명할 수 있을 듯했다.
믿어 주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에게라도 더 그 말을 전하고 사람들이 단리서언에게 속지 않게 하고 싶었다.
지금 지존이 가장 바라는 일이 뭔지 그녀는 알 수 있었고 지존이 바라는 것을 해 주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지존께서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야.’
설인정은 아진이 온 후에 지존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는지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설인정은 린린이 패월악이었을 때부터 패월악의 얼굴을 지켜볼 기회가 있으면 그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정말 열심히 봐 왔었다.
그래서 지금 지존이 얼마나 행복한지 알 수 있었다.
지존이 그런 모습을 한 것은, 그리고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은 한 번도 알지 못한 일이었다.
그런데 지금 완전한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설인정은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래도 다른 일들이 완벽하리만치 다 잘돼서 당분간은 마음을 놔도 될 것 같아. 루주에게서 황금 얘기는 들었어, 린린?”
“황금?”
린린은 처음 듣는 말이라는 듯이 아진과 설인정을 보았고 아진은 설인정을 바라보았다.
린린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설명을 할 수 있게 하려고 아진이 일부러 시간을 준 거였는데 설인정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아차리고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고작 그러는 것 하나로도 감격하는 것 같아서 아진은 설인정이 좀 안타깝게 느껴졌다.
패월악이 사라진 후,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면서 얼마나 괴롭고 슬펐을까 해서.
“사실은 본루에 입회비를 내러 온 사람들이 있었는데.”
설인정은 거기에서부터 시작해 길게 이어지는 이야기를 했고 린린은 신기해하며 설인정의 이야기를 들었다.
설인정이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그녀를 바라보는 것이 당연했지만 설인정은 그 사실만으로도 감격스럽고 흐뭇한 듯 몇 번이나 말을 멈췄다.
역천마의만은 그 마음을 알고 있어서 아진이 느끼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다행이구나. 그러면 루주는 피해를 본 것이 없는 거구나.”
“예. 지존.”
“다행이다. 하마터면 큰 손해를 입을 뻔했다.”
그러자 설인정이 가만히 웃었다.
“왜 웃지?”
“지존은…… 그런 분이 아니셨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많이 달라지셨어요. 화재가 나서 불을 끄고 사람들을 구했다는 말씀을 하셨을 때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설인정은 말을 하고 나서 자기가 무례했나 하는 듯 역천마의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그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았다.
설인정이 실수하고 역천마의의 표정을 살피는 것이.
그러면 역천마의가 무섭게 눈을 뜨고 설인정을 훈육하는 모습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었다.
“지존은 정말 많이 변하셨다. 그래서 지존도 자주 당황하시지.”
역천마의가 웃자 설인정은 역천마의 역시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설인정. 너도 산본의가에 같이 가 보면 좋겠구나. 거기에는 신기한 것들이 많아. 가장 신기한 게 뭔지 알아? 나를 변화시킨 사람들이지.”
린린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곳에서 처음에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그러니까 내 부모님들이 나를 어찌나 예뻐했는지. 내가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들이 정말 신기했었다. 나보다 별로 크지도 않은 오라버니들도 그랬고 말이야. 아. 나한테는 오라버니가 한 명 더 있어. 혼인을 했지. 아기도 있어. 랑랑이라고. 그러고 보니까 그 녀석도 보고 싶네.”
린린의 이야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아무렇게나 나오는 것 같았지만 설인정은 린린이 그런 이야기를 자기에게 해 주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저도…… 꼭 가 보고 싶습니다. 지존.”
“그래. 가 보자. 어렵지 않더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거. 그냥 시작되던데? 나는 운이 좋았어.”
이야기 끝에 린린의 입술에 걸리는 웃음의 의미를 아진은 알 것 같았다.
린린이 그렇게 말할 수 있도록 자기가 기여한 게 많은 것 같아서 흐뭇하기도 했다.
설인정은 린린과 아진의 끈끈한 유대를 알아보았고 벅찬 기분을 느꼈다.
지금도 지존을 연모하는 마음은 과거에 비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예전처럼 절벽에 서서 찬 서리를 홀로 맞고 있는 것 같은 허허로운 기분이 아니었다.
지존이 행복한 것을 깨달으며 진심으로 기뻤다.
“폐하를 뵙고 가는 게 좋겠어. 신교의 일은 오라버니가 잘 말씀드려줘. 단리서언이 하는 일로 신교를 벌하지 말아 달라고.”
“그건 이미 말씀드렸는데 걱정이 되면 한 번 더 말씀드릴까?”
그러자 린린이 한참이나 망설이더니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오라버니라면 잘 말씀을 드렸겠지. 돌아가자. 오라버니. 어머니 보고 싶어. 다들 무사하신지 봐야겠어.”
“그래. 그러자.”
설인정은 이제 곧 지존이 떠날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살점을 베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지만 설인정은 태어나서 지금처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정확하게 알게 된 적이 없었다.
“설인정.”
떠날 채비를 마치고 린린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설인정의 눈에서는 속절없이 눈물이 흘렀다.
늘 무심해 보이던 지존이었지만 마치 설인정의 마음을 아는 것 같았다.
“신교가 너의 노고를 기억하고 있다. 마신의 축복이 너와 함께할 것이다. 염마를 만나거든 말해. 패월악의 부하라고. 그러니 다음 생에는 좋은 자리로 잘 좀 마련해 달라고.”
“지존의 조카가 되면 좋을 텐데요.”
설인정이 애써 웃으며 말하자 린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해. 아. 우리 작은 오라버니도 혼인해서 자식을 낳기는 할 테니까. 아니다. 안 되겠다. 그래도 너무 일러. 그렇게 빨리 죽지 마. 오래 살아. 아주 오래. 이렇게 오래 사니까 다시 보게 되잖아.”
“저를 보셔서 좋으세요. 지존?”
감히 허락되지 않는 질문이었다.
역천마의도 그 생각을 한 듯 설인정을 보았다.
그녀도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은 듯했고 설인정의 입술이며 어깨며 손이 전부 바들바들 떨렸다.
그런 설인정의 어깨를 린린이 꼭 잡아 주었다.
“그래. 좋구나.”
“……저도 좋습니다. 지존. 바라지 못했던 것을 얻은 기분이 듭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마도 천하를 꿈꾸고 있다. 설인정. 황실을 전복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마신님의 은총이 천하에 가득해서 내 신교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행복해 보니까 좋더구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이러면 좋겠고. 너도 그렇게 되어라.”
“예. 지존. 예…… 지존…….”
설인정은 북받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마침내 돌아서서 린린이 걸음을 옮겼다.
린린의 모든 것을 설인정은 각막에 새기는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 * *
한 사람 한 사람 산본의가로 돌아오며 그곳은 다시 예전의 떠들썩함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제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혈천방주와 비룡채주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좋은 일로 그러는 것이라서 다들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이었다.
“스승님. 항주에서의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까?”
뒤에 남은 문제까지 처리하느라고 남들보다 한참 늦은 북리의천을 맞이하고 아진이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작 다른 것은 어려울 게 없었는데 썩지 않은 관료를 찾아내는 일이 어려웠다. 어차피 똑같은 인물이 자리에 앉으면 왜구는 다시 몰래 들어앉을 수 있고 썩은 관료가 비호를 해 주는 동안 잡초처럼 자라 버릴 수도 있는 일이니 말이다.”
그래도 결국 심지가 굳은 인물을 천거하기는 했다며 북리의천은 후련한 빛을 했다.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진은 북리소은이 웬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것을 보고 한동안 어리둥절하다가 그 아이가 랑랑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아보고 비명을 질렀다.
“랑랑? 랑랑이 이렇게 컸다고?”
“랑랑아. ‘랑랑도 못 알아보시고. 랑랑 속상해요!’라고 해.”
북리소은은 랑랑에게 말을 시키는 것을 가장해서 자신의 서운한 마음을 드러냈다.
“‘숙부님은 랑랑이 보고 싶지도 않으셨죠?’ 그래. 랑랑아.”
아이를 사이에 두면 대화하는 방법이 참 다채로워지는 듯했다.
“무사히 돌아온 것 같아서 기쁘다.”
위도도 내내 기회만 노리고 있었던 듯 아진에게 인사를 건넸다.
“형님. 그렇지 않아도 형님을 한참 찾았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형님이 단리서언을 이기셨다고요. 정말 잘 하셨습니다.”
아진은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고 위도는 그게 그렇게 공격이 잘 먹힐지 몰랐다고 했다.
아진은 그 정도에서 그만둘까 하다가 위도도 알기는 알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단리서언은 변했고 이전의 모습이 아니라고 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단리서언 정도는 자기가 나서서 얼마든지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던 위도가 깜짝 놀라며 되묻자 아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 주었다.
“영체…… 이혼대법이라고?”
“예. 살아 있으면서 전생을 한다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나 때문에 더 강해진 건지도 모르는 거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그렇게 말을 해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듯했다.
모두가 최선을 다했고 상상하기 어려운 성공을 거두고 그 자리에 모였으니 이제는 서로 축하하고 그 시간을 누려도 좋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