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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38화 (238/470)

제238화

238화

위조된 황금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였지만 그 뒤에 다시 엄청난 문제가 생겨나서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해 버리는 바람에 마음이 놓이는 순간이 없었던 것이다.

설인정은 모르고 있었지만 황제는 이제 염빈과 정빈을 그들의 나라로 데려다주기도 해야 했고 앞으로 할 일이 쌓여 있던 참이었다.

그것도 모르면서 겉으로 보이는 것만 가지고도 그들의 삶이 평탄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으니 실제로 황제의 삶이 얼마나 고달픈지는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황제는 염빈과 정빈을 바라보았다.

하월을 황후의 태감으로 넣겠다는 말을 하는 동안 황제는 일부러 두 사람을 그 자리에 있게 했다.

그들이 토번과 토욕혼에 돌아갔을 때 행여라도 그곳의 군주들이 전쟁을 일으키려 하면 두 사람이 나서서 전쟁을 막아 주기를 바라서였다.

아진은 어떤 군주도 쉽게 가질 수 없는 책사였고 그런 책사 한 사람이 있으면 거대한 조직이 세운 계책도 한순간에 수포가 되는 법이었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황조를 흔들려던 계획이 아진에 의해 파해되는 것을 두 사람이 직접 보게 하면 나중에 두 사람이 두 나라의 군주를 잘 막아 줄 거라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다.

황제는 지금의 이 시기가 그동안 지내 왔던 어느 때보다 더 즐겁다고 생각했다.

문제가 생겨도 좌절하기보다 기대감이 더욱 커졌던 것이다.

* * *

염빈과 정빈은 황제와의 시간이 얼마나 좋았던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질 정도였다.

그러면서 두 사람이 그 마음을 황제에게 슬쩍 내비치기도 했는데 황제는 그동안 기울여왔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까 봐 화들짝 놀라며 그때마다 열연을 펼쳤다.

“짐이라고 왜 그대들을 보내고 싶겠느냐. 하지만 궁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이번에 그대들도 더 깊이 깨닫지 않았느냐. 그것은 짐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서 짐을 무너뜨리기 위해 공격을 해 대는데 그대들을 여기에 두어서는 아무래도 짐이 마음을 놓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서 두 사람을 데려다주기로 한 날을 오히려 더 앞당겨 버렸다.

염빈과 정빈은 아쉬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염빈과 정빈이 궁을 떠나던 날.

황후와 후궁들이 모두 나와 그들을 배웅했다.

그러면서도 그런 일에 왜 굳이 황제까지 함께 나서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었다.

황후의 곁에는 하월이 서 있었다.

한때 황상의 총애를 등에 업고 기고만장하던 그가 태감이 되어 황후를 수행하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뒤에서 하월을 업신여겼지만 하월은 그런 냉대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황상의 ‘특별한’ 총애를 받는다는 소문이 나고는 황후도 하월을 아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궁에 들어오기 전 며칠 동안 그는 사람이 절대로 소화할 수 없을 것 같은 일정을 소화해냈다.

염빈과 정빈에게서 궁중 예법을 배우고 궁중 어른들의 습관과 기호에 대해 듣고 누구를 조심해야 하는지, 누가 괜찮은 사람인지도 들었다.

그 일이 끝나면 아진에게 집중적인 훈련을 받았다.

내공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참기만 하면 되는 거라서 크게 어려울 것이 없었지만 생전 익힐 일이 없던 심법과 검법을 익히는 것은 이야기가 완전히 달랐다.

게다가 아진이 그를 오랫동안 가르쳐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며칠 동안 잠을 일각도 재우지 않고 계속 가르치는데 하월은 나중에 진지하게 살인 욕구가 치솟기도 했다.

당연히 사람이 지치면 쉴 시간을 줄줄 알았는데 아진은 하월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다고 생각되면 마나를 불어 넣어서 강제로 회복을 시키고 계속 가르쳤다.

상단전에도 제멋대로 기운을 불어넣고 습득 능력과 기억력도 향상하게 만들어 버렸다.

신체와 정신력까지 개조해 버리고 내공과 무공을 때려 박는데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하월도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서 입을 꾹 다물고 버티기는 했지만 정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한두 번이 드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아진이 휘두르는 검을 한 번도 막지 못하다가 나중에는 수천 번의 공격 중 몇 번은 막기도 하고 자기가 아진의 틈을 찾아 공격하기도 했다.

성공하라고 아진이 일부러 그렇게 해 준 것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좋다고 웃었다.

웃음이 나온다는 것이 하월 자신에게도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비참한 상황에서도 웃음이 나온다는 게.

염빈과 정빈이 궁을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하월은 그 일이 언제부터 계획돼 있었을까 했다.

“황제의 누이에 봉하시더니 이제는 직접 데려다주시기까지. 도대체 황상이 무슨 생각으로 저러시는 건지. 그래도 직접 손 쓰지 않아도 되도록 눈앞에서 치워 주시는 건 좋구나.”

황후는 기다란 수행행렬을 이끌고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며 말했다.

황후가 말하는 것을 보면 황제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것 같았는데 말을 하는데 거리낌도 없었다.

황후는 자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황제가 어찌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하월은 속으로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황후는 황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시간은 잘 갔다.

아진이 말한 것을 다시 떠올리면서 축기를 하고 검술과 권술의 초식을 연습하다 보면 하루가 모자랐다.

태감으로서의 일을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특별히 황후의 총애를 받을 필요도 없고 남들에게 성실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이제 적당히 동창에만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하월은 자기에게 이로운 대로 시간을 사용했고 그것은 정해진 반발을 일으켰다.

새로 들어온 태감을 훈육하는 자들이 그를 찾아와 몇 마디 따끔하게 경고를 했지만 하월은 적당히 듣고 흘렸다.

이제 궁에 갓 들어왔어도 황궁의 실세라 할 수 있는 황후의 태감이었고 게다가 황제의 총애까지 받는 사람이었다.

가문 내에서 천덕꾸러기라고는 하지만 북궁세가주의 이공자에 구문제독부의 하나뿐인 동생.

그 후광 때문에라도 하월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월이 하는 짓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제 사람을 다른 사람이 야단치는 것을 그냥 보아넘길 사람은 많지 않았다.

황후는 하월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얼마 동안 파악한 바에 의하면 그녀는 구문제독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북궁천영이 제 동생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설마하니 정말 태감으로 만들어서 보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어느 날 명단에 그가 있었다.

갑자기 사라진 하월이 황후전의 태감이 되어 모습을 나타낸 것에 놀란 것은 북궁세가의 위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하월을 얼마나 찾아다녔던가.

갑자기 사라져서 무슨 일인가 하고 걱정을 하다가 황금이 위조되었다는 소식을 접했고 그것이 만전의 돈을 갚아 준 남자가 벌인 짓이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에 이런 망신이 또 있을까 하면서 다시 이자를 약속하며 돈을 빌리고 있었는데 어디로 사라진 건지 알 수 없던 하월이 황후전 태감이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설마하니 제 발로 찾아 가 스스로 환관이 되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지만 하월이 살려고 별 발악을 다 하는가 보다 했다.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제 손으로 하월을 죽여 옥에 갇힐 뻔한 일을 면케 해 주어서였다.

서로 정확히 대화를 나누지는 않고 오해와 추측을 이어나가는 동안 하월은 황후전에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아나갔다.

* * *

모든 일이 순조로웠다.

계획에서 어긋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제는 혹시라도 토번이나 토욕혼의 군주가 염빈이나 정빈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면 일이 조금 귀찮아지고 일 처리에 시간이 더 걸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염빈과 정빈이 나서서 상황을 설명하자 그들은 황제에게 크게 고마워했다.

딸들을 향한 마음이 각별했었는지 그들은 염빈과 정빈이 하는 말을 들으면서 감격하는 눈치였다.

황제는 염빈과 정빈을 끝까지 보살피지 못하고 데려온 것에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회한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들 스스로가 주변 왕국을 복속시키고 나라를 세운 군주들로, 황제가 느끼는 것과 비슷한 위협을 수시로 느끼고 있었기에 황제가 내린 결정에 더욱 고마워하는 듯했다.

“이것은 얼마 되지 않으나 짐의 선물이오.”

황제는 직접 가져온 선물을 주며 앞으로 자기를 대신해서 염빈과 정빈을 잘 보살펴 달라고 당부했다.

선물은 풍족했고 그 가치만 해도 상당했다.

염빈과 정빈이 그곳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편안히 지내기를 바라는 황제의 마음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여 두 군주는 흡족해했다.

돌아올 때 황제는 자기가 준비해 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선물을 받았고 염빈과 정빈이 너무 우는 바람에 안타까워질 정도였다.

두 군주는 황제에게 앞으로 형제의 우애로서 함께 하자고 말했고 황제는 긴 여정의 노고가 보답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차후에 일이 어찌 될지는 모르는 것이라 일이 잘 해결됐다고 미리 마음을 놓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우리로서는 단추를 잘 끼운 것 같구나. 아진아.”

“그렇습니다. 폐하. 두 분 마마께서 폐하께 마음을 완전히 여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나도 내가 이렇게까지 잘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조금은 진심이 있지 않으셨습니까, 폐하?”

그러자 황제가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처음에는 네가 제안해서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했는데 하다 보니 염빈과 정빈의 처지가 이해가 되면서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더구나. 짐과 혼인하고 짐에게서 완전히 잊힌 채 좋은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느냐. 며칠간 함께 했던 시간이 짐에게도 유익하고 즐거웠던 것 같다.”

“그런 것 같았습니다. 두 분 마마도 폐하의 진심을 느껴서 마음을 여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황제는 어색한 듯이 말했다.

웬만해서 솔직한 심정을 드러내지 않는 그였다.

그런 황제에게 이번 일이 새로운 기분을 느끼게 해 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도 조금은 신기해하고 있었다.

“이제 단리서언의 계획을 어느 정도는 흔들어 놓은 것 같은데 다른 곳의 사정은 어찌 돼 가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모두 무사해야 할 텐데 말이다.”

“그럴 것입니다. 모두 무사히 맡은 소임을 다 할 것입니다.”

아진도 슬슬 다른 사람들이 걱정되던 참이라 이제 황제를 황궁까지 호위해 준 후에는 빨리 항주와 십만대산에 가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황성을 떠나오기 전에 항주의 일은 소식이 전해져서 어느 정도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십만대산의 일은 어떻게 진행되어 가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경공을 펼치고 싶으면 그리 하여라, 아진아. 걱정되는 모양이구나.”

그 말이 나온 후부터 아진의 마음이 급해진 것을 알아차린 듯 황제가 말했다.

“그러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업히시지요.”

황제가 아진에게 업혔고 그들의 신형이 빠르게 사라졌다.

* * *

그들이 돌아온 것을 가장 반가워한 사람 중 한 사람은 하월이었다.

어느새 그렇게 되어 버렸다.

하월 자신도 황제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그렇게 기쁠 줄 몰랐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고 멍해져서 헛웃음을 지어 버렸다.

그래도 아진이 조만간 산본으로 돌아갈지 모른다는 생각에 시간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아진에게 검법을 지도받고 싶어 했다.

심법은 자기가 생각해도 성취가 뛰어난 것 같았다.

권법 중에는 잘 안 되는 부분이 많았는데 권법을 꼭 같이 익혀야 하는 건지 그 시간에 그냥 검법에만 집중하면 안 되는 건지 그것도 꼭 나누고 싶은 얘기 중 하나였다.

아진 역시 그렇지 않아도 하월을 한 번 본 후에 떠날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자기가 먼저 하월을 찾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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