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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35화 (235/470)

제235화

235화

무엇을 그렇게 열심히 살피는 것인가 하면서 아진은 잠시 하월을 구경했다.

“흥. 내가 변제 기한을 조금만 미뤄달라고 그렇게 통사정을 했는데도 모른 척하던 놈이었지? 어디. 그렇게 하고 얼마나 잘 사는지 보자. 우선 이놈도 손을 봐 줘야 하고. 아니. 이게 누군가. 내가 어떻게 이놈을 잊을 수가 있었던 거지?”

가관이었다.

단리서언에게 받은 돈으로 빚을 갚고 이제 좀 살만해졌다 싶으니까 그동안 자기에게 섭섭하게 굴었던 자들을 찾아내서 혼을 내주려 하고 있었다.

“여기에 차용증이 이렇게 버젓이 있는데 본가가 힘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안 주고 버텨?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만 이제 이자까지 다 물어내야 할 것이다.”

하월의 말을 들으며 아진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북궁세가가 곧 몰락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면서 세가에 빚을 진 자들이 돈을 갚지 않고 버틴 듯했다.

조금만 있으면 몰락할 것 같은데 그런 곳에 돈을 꼭 갚아야 하는 거냐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곧 몰락할 거라고 생각했던 북궁세가는 죽지 않았고 기사회생해서 이자까지 계산하고 있었다.

하월로서는 제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평소에 바르게 살아오지도 않았으면서 화를 내는 걸 보니 실소가 나왔다.

아진은 오래 생각할 것 없이 그 자리에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으아아……!!”

하월은 은잠술을 펼친 사람을 처음 보았는지 아진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아진이 날린 지풍에 아혈이 짚여 소리가 끝까지 나오지 못하고 멈췄다.

“반갑지, 하월? 그래. 나도 반갑다. 오래간만이야? 꼭 다시 볼 필요는 없었는데. 굳이 이렇게 찾아오게 만드나?”

아진은 하월의 책상에 걸터앉아 말했다.

절대로 보고 싶지 않은 얼굴.

아니. 아진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닐 것이다.

동원할 수 있는 살수를 다 동원해서 죽이고 싶은 사람 중에 1순위일지도 모르는 인물.

하월은 아진을 보고 분하고 놀라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내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랐을 거고 지금 엄청나게 겁이 나겠지만 너를 죽이려고 온 건 아니야. 결국 죽기는 하겠지만 그 전에 너를 사용할 곳이 있을 것 같거든.”

“…….”

하월은 정신없이 눈을 굴렸다.

이게 무슨 일인지 알아내느라고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는 듯했다.

“내가 어떤 것들을 좀 알아냈는데 말이야. 너도 내 얘기를 들으면 흥미가 생길 거야. 너는 아직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 네가 아주 위험한 걸 밟았거든. 이것도 모르는 것 같은데 사실 네 몸에 이미 불이 붙었어. 몸이 타고 있는데 아직 뜨겁지 않아서 네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지.”

하월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냐는 표정을 짓는 걸 보고 아진은 씩 웃었다.

“헛소리다 싶지? 그런데 헛소리가 아닌데? 네가 만난 자. 천마신교의 교주 단리서언. 그자가 너를 괜히 도와줬을까? 너한테 괜히 그 돈을 주었을까? 네가 받은 황금. 네가 갚은 돈. 그게 지금 어떻게 됐는지 알려줄까?”

하월의 표정은 급속도로 변했다.

처음에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아진을 만나 그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던 것이 시간이 가면서 뿌리 깊은 증오로 바뀌었다가 이제는 상상도 못 했던 충격에 휩싸였다.

아진이 어떻게 그것들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것들은 하월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그게…… 그게 어떻게…… 아니다. 그럴 수는 없어. 다 거짓말이야!”

하월은 정신이 없어서 자기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깨달았는지 아진을 보았다.

아혈이 풀린 것 같은데 소리를 질러도 되는가 하는 것 같았다.

“밖에 있는 놈들이 나를 죽이고 너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소리를 질러도 된다.”

그러면서 아진은 하월의 책상 위에 빼곡히 쌓여있던 문서들을 대충 구경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던 얘기를 마저 끝내라!”

하월은 절박한 주제에 건방지게도 말을 했다.

그러나 일일이 그런 걸 따질 필요도 없어서 아진은 자기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 주었다.

호기심이란 얼마나 위험하고 무모한 감정인가.

앞에서 기다리는 진실을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지 확신도 하지 못한 채로 그저 더 알고 싶다고 탐욕을 부리는 것은 아닌가.

하월도 그런 인물이었다.

그래서 아진은 기쁜 마음으로 하월을 진실로 인도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떤지 제대로 목도하는 순간 하월이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히게 될지 알고 있는 아진은 그 재미있는 구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네가 갚은 돈을 사람들이 신나게 쓰고 돌아다녔는데 그 황금이 변색하고 있지. 아마 술법에 의해 만들어진 가짜였던 모양이야? 그걸 폐하께서 아시게 됐다. 지금쯤 황도의 병사들이 곳곳마다 다니면서 방을 붙이고 다닐 거야. 당분간 황금의 유통을 금지할 거고 지금 유통된 황금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찾으려고 하겠지.”

“……그, 그건…… 그건 말도 안 된다. 아니야. 그게 무슨 말인지는 몰라도 나하고는 상관이 없어.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분명히…… 아니. 네가 말하는 건 내가 가지고 있던 것과 다르다. 그러니 나한테 말을 할 필요도 없어. 내가 갚은 돈이라고? 그게 같은 거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지?”

“너한테 받은 거니까.”

그러나 하월은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그 달콤한 꿈에서 이렇게 냉정하게 내쫓겨 버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짓말이라고 소리 지르며 말하고 싶지만 왠지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신음하듯 외쳤다.

“나한테는 아무 잘못이 없어. 그자가 그냥 와서 나에게 준 거라는 말이다. 호의를 받은 게 왜 잘못이라는 거냐! 아니. 아니야. 분명히 황금이었어. 그게 어떻게 변한다는 말이냐! 내 앞에서 받은 사람들도 전부 확인을 했어. 전부 황금이 맞다면서 가져갔단 말이다!!”

하월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했다.

고집을 부리며 부정하려 애쓰기는 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제 목으로 날카로운 대작두가 떨어지는 것을 상상한 것 같았다.

지금껏 믿기지 않는 운으로 번번이 죽음을 피해왔지만 어쩌면 이번에는 정말 운이 다했는지도 몰랐다.

정말 일이 그렇게 된 거라면 누가 자신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 것인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생각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냥 차라리 형님이 말했을 때 황후의 태감으로나 들어가 버릴 걸 그랬어.’

어느덧 어깨가 흔들리며 눈물이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서러울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 몰랐다는 말이다. 나는…… 나도 처음에는 믿기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서…… 내가 너무 불쌍해서 누군가 나를 동정했나보다고 생각해서…… 내 인생이 여기에서 이렇게 끝나지는 않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흐흐흐흑……!”

하월은 탁자에 머리를 박고 울어 댔다.

볼썽사나운 모습에 아진은 탁자에서 일어섰다.

“자, 잠깐. 어딜 가는 것이냐.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줘야 하는 게 아니냐! 여기에 왔으면 나한테 시킬 일이 있어서 온 게 아니냐는 말이다!”

하월은 아진이 그대로 가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제가 안으로 들어가겠습니다.”

밖에서 세가 무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월의 목소리를 듣고 이상하게 생각한 듯했다.

“닥쳐라! 네놈이 왜 들어온다는 말이냐!”

“제가 들어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아무 일도 없는 것인지요.”

“무슨 일이 있으면 네놈이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건방진 놈!!”

하월은 화가 나서 소리를 질렀고 세가 무인의 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속으로야 욕을 해 대겠지만 일단 겉으로는 조용했다.

무인도 하월이 미쳐서 혼잣말을 한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컸지만 하월의 말에도 불구하고 안으로 들어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만일의 경우 몸을 숨길 채비도 해 두었다.

“부탁이다.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 주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다. 너라면 빠져나갈 구멍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진은 흥미롭다는 듯 그를 보았다.

“빠져나올 구멍은 있지만 빠져나오라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은데.”

“헛소리하지 말고 말을 하라는 말이다!”

하월은 학습능력이 상당히 좋지 않은 자였다.

그동안 그런 일을 그만큼 겪어 왔으면 이제 성질머리를 고칠 때가 될 때도 된 것 같은데 물불을 가리지 못하는 성미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성질이 더 나빠진 것 같기도 했다.

아진은 빙긋 웃었다.

하월은 그를 한 대 치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지만 아진이 괴물이라는 것은, 그리고 제 주먹으로 아진을 때렸다가는 주먹만 박살 날 거라는 것을 그도 이미 알고 있었다.

저만큼이나 아진을 싫어하는 사람이 수두룩하고 그런 자 중에는 무림 고수도 널렸는데 그들이 아진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 너에게 돈을 준 자는 천마신교의 교주다. 그건 너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만. 교주는 황조를 전복하려고 했고 너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

“교, 교주라는 건…… 아니. 황조를 전복…….”

그 사실을 알았다고 시인하는 순간 반역죄로 목이 잘려나가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라 그는 다급히 그 사실을 부정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말이 꼬였다.

그래도 일단은 부정부터 했다.

“아니다. 그건 거짓말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내가 왜 그런 짓을 한다는 말이냐! 나를 모함하지 마라. 나와 내 가문을 가만두라는 말이다!!”

“계속 거짓말을 할 생각이라면 나에게 도움받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하월.”

“…….”

하월은 여전히 강하게 자신의 주장을 계속해야 하는 처지였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 살 수 있는지 방법을 알려 줘. 그자가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사실은 정말 알지 못했다.”

“그자가 무슨 꿍꿍이를 가졌는지는 알고 있었다는 말로 들리는군.”

“…….”

하월이 고심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로 아진을 보더니 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내 목숨을 구해다오.”

“그보다는 더 정중하게 말을 해야 할 텐데.”

“살려…… 주십시오.”

아진은 그를 한 번 힐끔 보고는 말했다.

“내가 했던 말은 사실이다. 빠져나올 구멍은 있지만 빠져나오는 게 너에게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라. 개에게 물리지 않으려고 도망치다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꼴일 수도 있지.”

하월은 멍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진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솔직하게 말해라. 하월.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다.”

“……교주라는 것도 알았다. 홍성루에 갔을 때 교주라고 부르는 걸 들었어.”

“그리고?”

하월은 체념한 얼굴을 하고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 주었다.

“지금 네가 피하고 싶은 게 뭔가. 관에 추포(追捕)되는 것? 거길 빠져나오면? 교주가 너를 가만히 놔둘까? 네가 거기에서 빠져나왔다는 건 교주와의 거래를 다 실토했다는 말이 될 텐데. 어때. 내 말을 듣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 내가 오기 전까지만 해도 너는 행복해 보이던데.”

“…….”

하월은 그제야 진실을 어느 정도 이해한 듯이 망연자실한 표정을 하고 허공을 바라보았다.

발을 어떻게 내딛건 간에 깊은 수렁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때에야말로 알아차린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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