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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34화 (234/470)
  • 제234화

    234화

    “그러면 그곳으로 함께 가 보시는 것은 어떠실지요. 폐하. 총관에게 보고를 받고 제가 갔을 때 총관은 그사이에 황금 하나가 더 변했다고 했습니다. 여기로 가져온 후에 변하는 것이 더 생길지도 모르니 가서 보시는 것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변색이 일어나는 것을 직접 볼 수도 있겠군. 루주가 그렇게까지 해 준다면 고마운 일이다.”

    상대가 아무리 황제라고 하더라도 자기 집 곳간까지 활짝 열어서 내보일 생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지만 설인정은 그렇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한다면 자신의 충성을 보여줄 수 있을 거라는 계산이었고 황제 역시 설인정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짐작했다.

    그들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서둘렀다.

    염빈과 정빈은 그런 일이 처음이었다.

    그녀들도 그것이 나라에 심각하고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한편으로는 흥분이 되기도 했다.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한가운데에 황제와 함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설인정을 따라 금고가 있는 방으로 간 이들은 그녀의 배려로 금고 안을 볼 수 있었다.

    기루의 금고에 그렇게 많은 황금이 들어 있다는 것도 인상적인 일이었지만 그들이 놀랄 것은 따로 있었다.

    “그 사이에 또…….”

    설인정이야말로 놀란 채 황금 몇 개를 들고 당황해했다.

    “이것은…… 이것은 괜찮았습니다. 폐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나가기 전까지 여기에서 총관과 함께 이것들을 살피고 있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변색이 일어난 것은 이 세 개가 전부였습니다. 처음에 총관이 봤을 때는 두 개였고 저와 같이 와서 총관이 이걸 보면서 이건 괜찮았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변색이 일어난 순서가 정해졌다.

    처음 두 개는 어떤 것이 먼저 변색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후에는 순서를 알 수 있었다.

    “아진아. 저것도 지금 변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

    황제가 눈부시게 빛나던 황금 하나를 가리키며 말했고 설인정은 핏기가 완전히 사라져 그대로 쓰러져 버릴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이게…… 이게 어찌…….”

    이 정도의 손해라면 홍성루도 휘청일 만했다.

    “루주님. 지금 어떤 조처를 내리셨습니까.”

    아진이 묻자 설인정은 황제의 기색을 한 번 살핀 후에 벌벌 떨리는 소리로 솔직히 이야기했다.

    “겁낼 것 없다.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고 그때 생긴 피해는 처음에 위조된 금자를 받은 이들이 고스란히 떠안았다는 것을 짐도 알고 있다. 루주도 그 일을 기억하고 있다면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겠지. 나라의 백성으로는 잘했다고 할 일이 아니지만 인지상정이다. 이건 금자도 아니고 황금이 아니더냐.”

    황제가 설인정의 마음을 이해해 주며 그렇게 말하자 설인정은 감격해서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아니다. 네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결정들을 내렸는지는 다 이해 가 되니 지금부터는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말을 하도록 하여라. 네 잘못을 감추겠다고 사소한 거짓말이라도 했다가는 일을 쉽게 해결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예. 폐하.”

    일단 면책을 받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설인정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모두 말했다.

    아진은 설인정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좋은 대처를 하기는 어려웠겠다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황금을 쓰고 간 이들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들이 그것을 누구에게 받았는지 알 것이고 그건 중요한 정보가 될 겁니다. 그래야 처음에 유통하기 시작한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아진이 말하자 설인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법이 이러니 그 사람들은 잡아떼려 할 것입니다. 저도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황제도 그 고충을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범인은 잡아야 하고 누가 그것을 유통했는지는 알아야 하지만 일단 대금을 결제하는 과정에서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황금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출처를 따지기가 힘든 구조였다.

    그때 아진이 말했다.

    “황금을 주고 간 이들을 찾아 가 그 황금을 어디에서 받았는지 물으면서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중량이 조금 다르더라고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혹시 자기들에게 손해 가 난 것은 아닌가 하면서 먼저 이리로 오려고 할지도 모릅니다. 자기들이 준 황금이 중량이 더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올 겁니다.”

    “아니면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해도 좋겠구나. 황금이 중량이 더 나가더라고 말이다. 아주 미세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은자 스무 냥 정도의 차이는 있는 것 같다고 말이다.”

    황제도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듯 말했고 설인정 역시 그 방법은 통하겠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마음이 급했던지 그녀는 황제에게 양해를 구하는 것도 잊고 밖으로 나가 총관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총관도 반색하며 그런 방법이 있겠다고 말하고 사람들을 보냈다.

    “앞으로는 다른 황금들이 변색하지 않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겠구나. 그런데 이것들이 전부 오늘 하루 만에 들어온 것들이냐. 루주.”

    “예. 폐하. 본루에서는 루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의 자격을 제한하며 입회비를 받고 있사온데 요즘 입회비를 내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하루 들어온 것만 해도 적지 않습니다.”

    “루주와 앞으로 친하게 지내야 하겠구나.”

    황제가 말하자 설인정이 웃었다.

    겉으로는 그저 웃고 있었지만 그녀는 황제의 배포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일어난 일은 절대로 쉽게 볼 일이 아니었다.

    나라를 휘청이게 할 수도 있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황제는 그 걱정을 이미 전부 덜어낸 것처럼 웃음을 짓고 있었다.

    표정을 그 정도로 관리하는 것은 아무리 설인정이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설인정에 비해 그 절반도 살지 못한 황제가 그러는 것을 보며 내심 감탄을 했던 것이다.

    “염빈. 정빈. 짐이 뭐라 했더냐. 홍성루에 가면 재미있는 일이 있을 거라 했지.”

    황제가 말하자 염빈과 정빈은 어두운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폐하. 유통된 황금의 양이 한두 관이 아닐 텐데 이러다가는 문제가 커질 수도 있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 이것을 만들어 유통한 놈들은 꼭 잡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여러 곳이 흔들리고 몰락할 것이다. 이런 일은 연쇄 작용을 가져오지. 금자가 위조되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아진은 위조범이 노린 것이 이거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황실의 재정 파탄.

    이전의 황제라면 피해자를 구제하는 조처를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의 황제라면 다른 결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로 인해 나라의 살림이 어려워지면 세금을 더 거둘 수밖에 없고 그것은 각계각층에서 커다란 반발을 초래할 것이다.

    강력한 황권을 기반으로 승승장구하던 황조가 순식간에 멸망을 맞이한 것은 그런 식으로 시작된 내부의 분열이라는 이유가 컸다.

    동창과 구문제독부.

    그게 아니라면 황후나 다른 후궁들과 결탁한 권문세가들.

    어디라고 해도 이 일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다.

    “…….”

    설인정이 갑자기 뭔가를 떠올린 듯 얼굴이 하얗게 질리자 아진이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당분간 황금은 받지 말고 전표로 받아 두도록 해라.

    단리서언이 떠나기 전에 툭 던지듯이 했던 말이었다.

    툭 던지듯 한 말이건 몇 번이나 강조해서 한 말이건 지존이 하고 간 말이면 당연히 그것을 새기고 제대로 수행했어야 옳았는데 아진이 다녀가고 그에게 들은 이야기가 너무 큰 풍파를 남긴 바람에 까맣게 잊고 있었다.

    “폐하. 잠시.”

    “그래. 괘념치 말아라. 루주. 이제 우리는 방으로 돌아갔으면 하네.”

    “예. 페하.”

    황제는 자연스럽게 아진과 루주만이 남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염빈과 정빈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편하게 얘기를 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루주님.”

    “교주님이 돌아가기 전에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설인정은 뒤늦게 떠올린 말을 이야기했고 아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가 북궁세가의 만전에 돈을 주었으니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겠군요. 만전이 일시에 돈을 갚았을 테니 거기에서부터 흐름을 추적하면 되겠습니다.”

    교주를 그자라고 칭하는 것을 들었다면 기분이 상하는 것이 당연할 텐데도 그런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그런 거였나 봐요. 본루의 입회비는 한 번에 마련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싼데 며칠 동안 입회자가 많은 것을 이상하다고 생각했더니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만전에서 돈을 갚아서 돈이 생긴 곳이 많아진 거죠. 오늘 새로 입회한 사람들도 만전과 거래하면서 받을 빚이 있던 사람들이었던 것 같아요.”

    용의자를 특정하기 전에는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어려워서 그야말로 사막에서 바늘 찾기였지만 일단 추측을 하고 나니 그 수수께끼가 저절로 풀렸다.

    “고맙습니다. 루주님.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루주님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단리서언이 루주님을 주목할지도 모릅니다.”

    설인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설인정은 이제 아진이 누구인지 알았고 원하기만 한다면 지존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이 있으니까.’

    이번 일만 해도 자신이 홍성루의 루주라서 운 좋게 일찍 알 수 있었던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흐뭇해했다.

    “루주님. 반드시 어떤 것보다 루주님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합니다.”

    “네. 소협. 반드시 안전하게 있다가 지존을 뵐 거예요.”

    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설인정이 고개를 숙였다.

    아진은 황제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전음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황제는 설마하니 그 일에까지 단리서언의 손이 미쳤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이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리서언은 생각보다 훨씬 더 주도면밀하구나. 그리고 이 일을 확실히 끝내려는 생각인 것 같다.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한두 가지 방법만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흔들어 대다니. 거참. 아니. 황금을 위조할 생각을 하다니. 기가 막히는군. 그건 술법을 사용한 거였겠구나.

    -그런 듯합니다. 간도 큰 자입니다. 그래도 하늘이 폐하의 편인 것 같습니다. 오리무중에 빠져 있어야 할 일들이 수면으로 저절로 속속 나오고 있지 않은지요.

    그것은 아진의 진심이었다.

    단리서언이 비밀스러운 곳에서 일을 모색해도 그것이 얼마 안 가서 환히 드러나고 있는 격이 아닌가.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몸을 조심하도록 하여라.

    -예. 폐하. 선 부정을 이곳으로 보내겠습니다. 선 부정이 오면 함께 돌아가시지요.

    -그래. 그러겠다.

    아진은 먼저 선이남을 찾아 가 그에게 그간의 일을 설명한 후 그를 먼저 홍성루로 보내놓고 북궁세가로 향했다.

    선이남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질문을 퍼부으려 했지만 황제에게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자기가 더 서둘렀다.

    북궁세가의 수십 채 전각에는 희미한 달빛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월과 직접 대화를 해본 지는 오래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을 피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오는 길에 선이남에게 이야기를 해 두어 이미 향화문에도 위조 황금에 대한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고 필요한 이들이 정보를 공유했을 거였다.

    하월이 아직 황금을 가지고 있다면 지금 아진이 가지고 있는 정보는 하월에게 황금 수천 관에 이르는 가치를 가질 것이다.

    아진이 기척을 감춘 채 하월의 처소에 찾았을 때 하월은 수많은 서류 더미 속에 파묻히다시피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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