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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33화 (233/470)
  • 제233화

    233화

    “당장 관에 알려라. 이건 우리끼리 알고 말 일이 아니다. 우리가 떠안을 수 있는 피해도 아니고 하니 말이다.”

    “그렇지만 루주님. 관에 고하면 이걸 가져가서 조사를 하고 폐기한 채 손해는 우리에게 전가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

    설인정도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는 황금이 아니라 금자가 위조됐는데 금자를 위조한 게 누구인지는 끝끝내 밝히지 못하고 그것을 다시 유통하는 자만 엄벌하겠다고 했었다.

    당연히 설인정은 그냥 넘어가지 않았고 홍성루의 장한들은 오랜만에 자기들의 본 실력을 드러냈다.

    위조범 패거리들은 위조 기술도 탈탈 털리고 위조한 돈을 유통해서 벌어들인 수익도 홍성루에 전부 뺏겼다.

    그런 후에 흔적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이 되어 야산에 파묻힌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렇구나. 우선은…… 앞으로는 전표로만 받아야 하는가? 일단 위조된 황금에 대해 샅샅이 살피고 알아낼 수 있는 건 전부 알아내라. 황금을 가져온 이들이 있으면 지급을 일단 연기해 주도록 해라. 그리고 차용증을 받는 식으로 하면 되겠지. 가짜 황금이 유통되고 있어서 지금은 황금을 받지 않는다고 하고 일주일 후에 돈을 다시 가져오라고 해라.”

    그렇게 하는 편이 손해를 줄이는 방법이 될 듯했다.

    돈을 갚지 않고 도망치지도 못하겠지만 설사 도망치려 한다고 해도 그 경우에는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총관도 그리하면 되겠다고 생각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기는 먼저 그 내용을 전하고 오겠다며 사라졌다.

    설인정은 금고에 있던 황금을 전부 꺼내 확인을 하며 문제가 생긴 게 최근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누가 이런 거지? 무슨 목적으로?’

    전과 같았다면 그녀는 가장 먼저 천마신교가 입을 수 있는 피해에 대해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교주가 이 일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웬만해서는 십만대산에서 나오는 일도 없을 뿐 아니라 황도에 오는 일은 더더군다나 없는 교주가 갑자기 왔다는 것이 퍽 이상했던 것이다.

    ‘황상의 부름을 받고 왔다고는 했지만 일정이 이상하기는 했지.’

    패월악 교주의 오라버니라는 남자가 다녀가지만 않았다면 설인정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단리서언이 아주 자연스럽게 용의 선상에 올랐다.

    다른 것도 아닌 황금을 위조할 수 있는 사람.

    그 정도의 일을 꾸밀 수 있는 것은 결코 개인이 아닐 것이고 그녀에게 그 말고는 떠오르질 않았던 것이다.

    ‘그분이 다시 오시려나? 오시면 얘기를 해 보고 싶은데. 어디에서 찾아야 하지? 그분이라면 아실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설인정은 아진이 오면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다시 온다면 그에게서 패월악 교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을 하는 동안 왜 그렇게 가슴이 뛰는지 모를 일이었다.

    ‘주책이야. 이게 무슨 일이야?’

    만약 역천마의가 그녀를 봤다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설인정은 자신의 얼굴을 두 뺨으로 감쌌다.

    당사자인 린린이 알았다면 기겁을 했을 일이었지만 설인정의 사막처럼 메말랐던 감정에 훈풍이 불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아래층으로 내려갔던 총관이 급히 올라왔다.

    “말은 전했느냐.”

    설인정은 얼른 얼굴색을 바꾸고 물었다.

    “예. 루주님. 그런데 그보다 빨리 밖으로 나가 보셔야겠습니다. 지금 밖에 황상이 와 계십니다.”

    “황상이?”

    황상이 오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던 일도 아니었기에 설인정은 크게 놀라지 않고 명경 앞에서 자신의 차림을 간단히 확인한 후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루주 본연의 모습이 나왔다.

    황금이 위조된 사건을 제대로 조사도 못 하게 하필 이럴 때 와서 귀찮게 됐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표정은 얼굴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가짜 황금을 주고 간 자들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요. 루주님?”

    그녀의 곁에서 보조를 맞추며 총관이 물었다.

    “우선은 가만히 있어라. 잘못 하다 일을 그르치면 안 된다.”

    “예. 루주님.”

    설인정은 빨리 황제를 보내고 그 문제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황제와 함께 온 이들 중에 반가운 모습이 보였다.

    아진이 함께 왔던 것이다.

    황제를 향했던 시선이 순식간에 아진에게로 옮겨갔다.

    미처 황제에게 인사를 올리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찌나 반가웠는지 웃음까지 지어졌는데 그것을 황제가 알아차렸다.

    “루주를 아는 모양이구나. 아진아. 황도에는 잘 오지도 않는 줄 알았더니 여기에는 많이도 온 모양이다. 하긴. 루주가 천하일색이라 한 번 보고 나면 자연스레 빠져들 수밖에 없지. 아진이도 남자였구나.”

    황제가 짓궂게 말하고 웃자 아진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아진이야말로 억울했다.

    설인정이라고는 딱 한 번 본 것이 다였는데.

    더군다나 아진은 설인정의 실제 나이를 어느 정도 가늠하고 있었기에 공경하는 마음이라면 모를까 이성으로서의 관심은 전혀 없었다.

    “아진에게는 특별히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여기가 그 유명한 홍성루다. 홍성루에서 대접을 받아야 제대로 대접을 받았다는 말은 그대들도 들어 봤겠지?”

    황상이 말을 거는 상대들은 신분 높은 부인들 같았는데 아무리 설인정이라고 해도 그들이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염빈 마마와 정빈 마마이십니다. 루주는 예를 갖추십시오.”

    아진이 말하자 설인정은 깜짝 놀라며 그들에게 예를 갖추어 올렸다.

    황상이 요즘 그 두 사람에게 극진하다는 것은 설인정도 들어서 알고 있었기에 특히나 그 놀라움이 더 컸다.

    황상이 갑자기 그러는 이유가 뭔지 몰라서 모두 궁금해했는데 소문의 주인공들을 보았으니 설인정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어서 오시지요. 염빈 마마, 정빈 마마. 황실의 귀하신 분들을 뵙게 되어 지극한 영광입니다.”

    “홍성루와 루주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다. 나도 루주를 보게 되어 기쁘다.”

    염빈과 정빈의 얼굴에서는 여유가 넘쳤다.

    권력자의 총애를 받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장 좋은 방으로 안내하고 가장 좋은 것들로만 내 오너라. 이 시간은 아주 소중한 시간이다. 평생 오늘 이 시간이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도록 준비해 보도록 해라. 아니. 흠잡을 것 없는 것으로는 안 된다. 가장 좋은 것으로만 준비하거라. 알겠느냐. 루주.”

    황상이 말하자 설인정이 공손히 고개를 조아렸다.

    “그러겠습니다. 폐하. 마침 신선하고 좋은 재료가 잔뜩 들어왔으니 가장 뛰어난 숙수들을 시켜 실력 발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두 분 마마께서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는지요?”

    “아니다. 가리는 것이 없으니 루주가 알아서 준비해 주는 게 좋겠구나.”

    “예. 마마. 평생 잊을 수 없는 시간으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황상 폐하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으시는 두 분께서 함께 찾아 주셔서 얼마나 감격스러운지 모릅니다. 지내시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정성을 다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염빈과 정빈의 마음은 이미 최고의 것을 받은 것과 같았고 얼굴에는 흐뭇함이 가득 묻어났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황상이 자기들을 아끼는 듯 말해 주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저…….”

    설인정은 밖으로 나가 지시를 내리고 돌아와 아진에게 다가갔다.

    아진은 몰래 설인정을 찾아와 비밀스러운 얘기를 전했을 때와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이제 와서 새롭게 엮이거나 말을 나눌 일은 없다는 듯이 거리를 두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설인정은 마음이 급했다.

    “소협. 잠시 드릴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은 황상 폐하를 모시는 중이라 어려울 듯합니다만.”

    “들으셔야 할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황상께서도 아셔야 할 것 같아요.”

    설인정은 자신만만했다.

    처음에 총관에게서 위조된 황금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짜증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던 것이다.

    지금 그에게 당당히 말을 걸 수 있는 게 그것 때문이 아닌가.

    설인정이 조용히 말을 한다고 했지만 황상이 미리 그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무슨 일인가. 루주. 아진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이해가 간다만 아진에게는 아주 무서운 여동생이 있어서 함부로 접근하지 않는 것이 좋다.”

    황제가 재미있다는 듯이 말을 하더니 염빈과 정빈을 먼저 자리에 앉게 하고 설인정도 가까이 앉도록 했다.

    “내가 루주를 본 것은 처음이 아니지. 루주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실수의 여지조차 없는 사람이고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이지. 그런데 그런 루주가 아진에게 그러는 것을 보면 지금 꼭 들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구나.”

    루주는 황제가 자기의 말을 들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하니 황제가 내공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탓이었다.

    “하오나 그것이…….”

    루주는 염빈과 정빈이 같이 있는 자리에서 해도 괜찮은 말인가 해서 말끝을 흐렸는데 황제가 용케 그것을 알아차렸다.

    “괜찮다. 염빈과 정빈은 그 일을 함께 들어도 된다. 그리고 괜찮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너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말을 해라. 무슨 일이냐.”

    루주는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 것인지 알 듯했다.

    “폐하…… 중요한 일이라면 소첩들은 듣지 않겠습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소첩들이 없어야 긴한 얘기를 나누기가 더 편할 것 같습니다.”

    염빈과 정빈은 걱정이 되는 듯 말했지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이 시간은 내가 그대들에게 주는 선물이다. 어떤 불편함도 그대들의 마음에 남지 않게 할 것이다. 루주는 말을 하도록 하라.”

    “예. 폐하. 실은 본루에 들어온 황금이 위조되었다는 것을 조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관에 고해야 하나…….”

    이렇게 된 이상 설인정은 더 이상 그 일을 숨길 수 없다고 생각했다.

    황제는 기민했고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자기가 왜 바로 관에 고하지 않았는지도 알고 있을 터였다.

    “가져와 보도록 하라.”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에 여유가 넘치던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황금이 위조됐다는 것은 절대로 쉽게 넘길 일이 아니었다.

    그 가치 자체도 크고 해결 방법도 어려웠다.

    황금을 받은 사람들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황금의 진위를 판별하고 받는데 홍성루에서 그 절차를 허투루 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고도 속아서 받았다면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속임수라는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기루 하나가 사기를 당하고 손해를 입은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황제 역시 가짜 황금이 유통됐을 때 그 문제가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고 있었다.

    피해의 구제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부당하다는 것은 황제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나라의 부담으로 떠안는 것도 벅차서 특별히 방법을 취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일을 당한 곳은 버티기가 힘들었고 그런 일에 한 번 휘말리고 나면 사업을 영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가 되곤 했다.

    ‘잘못하면 나라 전체의 경제 흐름이 경색될 수도 있는 일이다.’

    아진은 그것이 생각보다 훨씬 중대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설인정은 총관을 시켜 황금을 가져올까 하다가 황상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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