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231화
그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며 조금이라도 도망치려 애썼다.
몸이 벽에 붙었는데도 계속 뒤로 물러서려 했던 것이다.
“나는 정의맹의 무인이오.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왔소. 밖에 있는 자들이 저지른 짓이오?”
북리의천의 말에 한두 사람이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밖에 있는 놈들은 모두 왜구들이오?”
“예. 대협. 저놈들이 창루와 기루를 관리합니다. 사람들을 앵속에 중독시키고 억지로 도박을 하게 해서 돈과 집을 뺏고 저희 같은 여자들을 팔았습니다.”
처음에는 감정을 절제하며 얘기를 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서러움이 북받치는 듯 눈물을 쏟아 냈다.
북리의천의 곁에 있던 흑주가 먼저 빠져나갔고 북리의천이 여자들을 도와 그곳을 나오게 했을 때는 앵속에 취해 있던 이들이 모두 진기를 흡수당한 채 쓰러져 있었다.
여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구슬이 떠 있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설마하니 구슬이 벌인 짓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구슬이 떠 있는 것도 무위가 뛰어난 고수가 무공으로 허공에 띄운 거라고만 생각을 했으니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상상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정의맹이 항주에 와 있고 우리는 왜구를 토벌할 것이오. 그 시작이 여기요. 우리도 도울 것이지만 소저들이 스스로 살아나갈 기회를 쟁취하지 않으면 안 되오. 나와 내 사손은 이곳을 떠나 다른 곳에 있는 왜구도 소탕할 것이오. 우리가 떠난 후에 덤벼드는 자들은 소저들이 해치워야 하오. 할 수 있겠소?”
할 수 있겠냐고 물었지만 북리의천은 실현 가능성이 있기는 할지 조금 의문이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여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왜구의 시신 곁으로 다가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왜검들을 전부 가져왔다.
그들이 입고 있던 옷을 벗겨서 각자가 자기들의 몸을 가렸는데 죽은 사람들이 입었던 옷이라고 망설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괴롭히려는 놈들이 있으면 죽일 거예요. 저희가 다 같이 힘을 합치면 두세 놈은 죽일 수 있을 거예요.”
“맞아요. 대협. 아무것도 해 보지 못한 채로 당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위협하고 겁을 준다고 해도 그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고요. 처음부터 그게 무섭다고 굴복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처음에 포기해서 결국 저희 힘으로는 빠져나오지도 못할 구렁텅이에 처박혔어요. 이제 다시는 그 속으로 안 들어가요.”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얼굴로 여자들이 말했다.
북리의천은 그들이 용기를 내 준 것이 가상했다.
“이곳에 있는 자들을 전부 해치우고 나가서 기루와 창루에 있는 사람들을 이곳으로 보낼 생각이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조용히 숨어 있는 게 좋을 것 같소.”
“이제……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건가요?”
“그럴 거요. 소저들이 그 날을 여시오.”
북리의천은 말을 마치고 밖으로 나갔다.
소청은 처음에 들어갔던 전각을 전부 끝마치고 다른 곳으로 간 듯 그곳이 소란스러웠다.
북리의천도 이제부터는 사손과 함께 다니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소청의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향했다.
“사조님.”
소청은 잠깐 좀 놀고 있었다는 듯이 순진한 얼굴을 하고 북리의천을 불렀다.
온몸에서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 웃음을 짓는 소청을 보고 있자니 북리의천도 웃음이 나와 버렸다.
웃으면 안 될 텐데 다른 반응은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여기에서 너무 오래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속도를 내보자.”
“네. 사조님.”
두 사람의 검이 다시 불을 뿜기 시작했다.
그것은 중심에 있던 전각에서 한 남자가 표표히 걸어 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지금껏 느껴지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기운.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분위기를 가장 먼저 알아차린 것은 흑주였다.
그때까지 스스로 공격을 시작하고 마무리 짓던 흑주가 갑자기 소청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소청과 북리의천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전각에서 걸어 나온 그가 장주인 것 같다는 것에 두 사람은 생각을 같이했다.
“웬 놈들이냐.”
왜구 특유의 복장과 머리 모양을 한 이가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손은 검파 위에 올려져 있었고 작은 체구에서 기운을 끌어올렸다.
장원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도 초조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간만에 호적수를 만나게 됐다는 기대감.
그 정도의 흥분이 얼굴에서 읽혔다.
특이한 안광을 뿜는 눈이 북리의천과 소청을 오갔다.
“나는 총대장이다. 네놈들은 누구냐.”
북리의천은 설마하니 그곳의 장주가 총대장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그런 자를 일찍 만난 것도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아아.”
소청도 그 정도의 소리로 감회를 나타냈다.
“아아? 나에 대한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는 모양이군. 하긴. 내 장원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이미 네놈들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뜻이겠지.”
그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제부터 눈앞의 사냥감을 어떻게 요리할까 하고 기대하는 눈이었다.
그 눈빛만 보고도 다리에서 힘이 풀려 주저앉을 사람이 수두룩할 것 같았지만 북리의천과 소청에게는 그런 해당 사항이 없었다.
“총대장이면 높은 거죠. 사조님?”
소청이 묻자 북리의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것 같구나.”
“그 아래에 대장이 있는 건가요? 총 부대장이 있나? 대대장은 그 아래인가?”
“나도 이런 체계는 잘 모르겠구나. 총대장 위에 총총대장이 있고 그 위에 총총총대장이 있고 그런 건 아니겠지? 그러면 여기에서 힘 뺀 게 아깝지 않으냐.”
“아아!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사조님. 대장 위에 대대장이 있고 대대대장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총대장은 둘이 뭘 하자는 건지 알지도 못했고 알 생각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두 사람이 전음으로 작전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돌풍같은 장력을 쏘아 냈다.
급히 몸을 날려 피했지만 북리의천의 옷자락이 휘말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는데 장력에 휘말린 옷자락이 형체도 없이 조각나서 사라졌다.
총대장은 별것도 아니라는 듯이 웃었고 마치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그의 얼굴에 지어진 것과 비슷한 웃음이 두 사람의 얼굴에도 떠올랐다.
총대장은 흠칫하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위력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것인가.
그러면서 그는 연거푸 장력을 날렸다.
“검파에 손을 얹고 있어서 검술을 선보이려나 했더니 그건 속임수였던가 보군. 그런데 이제는 본 실력을 보여야 할 때가 아닌가? 장법도 대단한 것 같지는 않은데.”
북리의천이 말을 하는 동안 소청이 총대장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총대장은 비열하다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헛숨을 들이쉬었다.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막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
두 사람의 사이에서 가공할 두 기운이 부딪혔다.
총대장은 열 살도 안 된 것 같은 아이에게서 그런 공격이 펼쳐진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소청은 말이라도 거는 것처럼 공격했고 총대장은 황급히 거기에 대응했다.
공방이 이어지는 짧은 시간 동안 그 주위가 순식간에 폐허로 돌변했다.
전각 하나는 거기에 휘말려 우지끈 소리를 내고 옆으로 기울었고 정원에 있던 나무는 뽑혀나가 창과 비수처럼 날아다니더니 어느 순간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총대장은 북리의천이 나서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싸움은 백중세였다.
이렇게 어린아이가 자기와 대등한 양상을 이어나가고 있다는 것도 이상했지만 여유 있게 이기는 것도 아닌데 북리의천이 나설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무시하고 있군.’
총대장은 7할의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것은 제대로 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의미였다.
소청은 소청대로 기대하는 바가 있었다.
왜검을 들고 싸우는 사람 중에 가장 강한 사람.
소청의 머릿속에서 총대장은 그 정도의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 올라왔다는 것은 다른 이를 압도하는 실력이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그와 공방을 주고받는 동안 배우는 게 생길 거라고 여겼던 것이다.
총대장은 소청의 눈이 반짝 빛나는 것을 보고 확 기분이 나빠졌다.
‘언제까지 그런 눈을 하고 보는지 어디 한번 보자.’
그때부터 총대장은 빈틈을 주지 않고 소청을 몰아세웠다.
그는 검을 휘둘러서 소청의 팔을 부러뜨리려 했다.
그 공격에 소청은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베려고 하지 않고 몽둥이를 휘두르는 것처럼 부러뜨리려 해서 그런 거였는데 소청은 표정을 바꿨다.
잘만 했다면 그 공격이 그대로 성공을 거두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도 해 볼 수 있기는 하겠네. 그런데 왜 이렇게 하지? 이렇게 하는 게 저 사람한테는 더 편한가?’
소청은 생각만 하느니 자기도 직접 해 보기로 했고 검을 지금까지 잡았던 것과 각도를 달리해 쥐었다.
그리고 총대장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정강이를 노렸다.
그러나 그다음에 미련을 두지 않고 그 시도를 포기해 버렸다.
검기를 불어넣어서 공격하면 훨씬 더 쉽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는데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어서였다.
총대장이 죽일 듯이 소청을 노려보더니 검을 휘둘렀다.
챙강-.
소청은 급히 검을 막았고 허공에서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맞부딪친 검 중 총대장의 것이 잘려나갔다.
가슴 앞에 드리우고 있던 검이 부러지면서 그의 몸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반 토막 난 검밖에 남지 않았다.
총대장은 말도 되지 않는다는 듯이 소청을 바라보았다.
이제 여유를 가질 만도 하지만 소청은 조금 전보다 오히려 더 집중하며 그의 검을 때렸다.
“으윽!”
검을 잔뜩 움켜쥐고 있던 총대장의 손아귀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찢어졌다.
소청은 그를 보고 한 번 쌩긋 웃고는 텅 빈 가슴에 검을 휘둘렀다.
“……!”
총대장은 고개를 숙이고 제 가슴에서 솟구치는 피 분수를 보았다.
무언가가 맹렬히 그곳에 날아가 박히는 바람에 총대장이 뒤로 비척거리다 결국 바닥에 넘어졌는데 그는 반질거리는 구형에서 빛이 일렁이는 것을 보았다.
제 안의 진기가 서서히 빨려들어 갔다.
“안 돼…… 이건 말도 안 돼. 어떻게…… 이게 어떻게……!”
“그게 맞는 것 같아요. 사조님.”
소청이 북리의천의 옆으로 달려가며 말했다.
“총대장 위에 총총대장이 있고 그 위에 총총총대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래.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구나. 너무 많이 있지는 말고 그냥 총총총총대장 까지만 있으면 좋겠다.”
“총대장만 막 열 명이 있고 그럴까요? 총총대장은 한 다섯 명 있고요.”
“글쎄다. 그런데 그 정도씩은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자가 왜구의 우두머리는 아닐 것 같지 않으냐.”
“그러게요. 그런데 전각이 쓰러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다. 조심해야 한다.”
“네. 사조님.”
두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총대장에게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더 이상 그는 그들의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벼락같이 찾아든 죽음이 그의 세상을 부순 탓이었다.
* * *
내내 볕이 좋더니 구름이 간간이 태양을 가렸다.
“그런데 나는 구름이 태양을 가렸을 때의 이 정도 어둠이 좋은 것 같아. 마음이 편해.”
십만대산의 문턱에서 린린이 말하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별 것 아닌 말이었다.
그러나 영원히 모를 수도 있었던 사실을 알게 됐다는 것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