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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30화 (230/470)

제230화

230화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소피를 보러 나온 이가 있었다.

소청은 일부러 사혈을 피해 침을 날렸고 흑주는 아주 잘했다는 듯이 반갑게 달려나갔다.

쓰러진 왜구는 작게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소리를 듣고 나오는 이는 없었다.

그러나 전각 내부에서 소리 없는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었다.

누구냐고 큰소리로 외치며 시끄럽게 다가와 일을 망치는 대신, 침입자가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끝내려는 계획인 듯했다.

“알아차린 모양인데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소청아.”

“저는 괜찮습니다만 흑주가 한 번 포식을 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사조님. 흑주의 눈치를 보면서 싸우는 게 가장 힘이 듭니다.”

“허허. 내 사손이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구나. 그래.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자.”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다가 북리의천이 돌연 걸음을 멈추고 소청을 바라보았다.

“소청아. 여기에서는 이렇게 한번 해 보자꾸나. 아진이가 언젠가 했던 얘기가 있었는데 아진이 싸우던 곳에는 작은 개체들이 모여서 커다란 몸집을 이루는 괴수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아아. 저도 들은 적 있어요. 사조님. 그런데 스승님이 그 이야기 하실 때 아마 사조님이랑 저랑 같이 들었을걸요?”

“아. 그렇구나. 맞다. 너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안에 있는 사람들을 그 괴수의 개체처럼 생각해 보자고 하시는 거죠? 뭔지 알았어요. 스승님이 그렇게 생각하고 싸우셨던 전투도 생각이 나요.”

초조해하며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생각은 하지도 않고 두 사람은 느긋하게 대화만 나누고 있었다.

기수식을 취하고 금방이라도 왜검과 함께 빛살처럼 폭사할 준비를 하고 있던 이들의 긴장감은 찰나의 시간이 흐를수록 미칠 것 같이 쌓여갔다.

“너도 기억나는 모양이구나. 나는 아진이가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하면서도 아무도 놓치지 않았지. 오히려 가장 중심이 되는 공격을 계속 놓치지 않았고.”

“맞아요. 사조님. 정말 신기했어요. 스승님은 앞의 상대는 보지도 않으셨어요. 계속 다른 사람들을 보셨죠. 아니. 다른 사람을 본 것도 아니고 그 사람들이 이룬 대형을 보신 것 같았어요.”

“이런. 내 사손이 천재라는 건 알고 있었다만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구나. 그래서 나는 그때 아진이 진을 파해하려고 그러는 건 줄 알았었다. 진은 없는데 아진이가 왜 그러는 건지 이상했었지.”

“그 자리에 사조님도 계셨어요?”

“당연하다. 이 녀석아. 네가 당할 뻔했을 때 내가 네 뒤에서 검을 이렇게 내밀어서 구해 줬는데 그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할 셈이냐?”

“아아……! 기억나요. 사조님.”

그들이 의도한 것은 그게 아니었을지라도 그들에 의해 야기된 상황은 실로 엄청났다.

극도의 긴장감으로 인해, 안에서 기다리자고 마음먹었던 이 중 몇몇 성질 급한 이들이 먼저 밖으로 나와 버린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들의 지위가 결코 낮지 않음을 의미했고 그런 곳에서의 지위는 대부분 무공의 수위와도 연결이 되어 있었다.

“성질 급한 놈들이군. 어쨌든 이번에는 그렇게 해 보는 거다. 소청아.”

“네. 사조님. 제가 안에 있는 자들을 맡을까요?”

“그러자꾸나.”

북리의천은 소청의 말이 재미있었다.

6층짜리 전각이었다.

아래층에서의 소란은 곧 위층에도 전해질 것이고 그곳 사람들 대부분은 이미 침입 사실을 알고 있다고 보는 게 옳았다.

그러나 북리의천은 걱정하지 않았다.

“힘들면 밖으로 내몰아라.”

“네. 사조님.”

소청은 말을 마치고 안으로 들어갔다.

밖으로 나오던 이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가 하면서도 우선 밖에 있던 북리의천을 공격했다.

북리의천은 기꺼이 그 공격을 받아 주었다.

흐릿해지던 신형 여러 개가 그의 앞에서 동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왜검이 그의 목을 노리고 득달같이 덤벼들었지만 이미 북리의천의 모습은 그 자리에 없었다.

빠른 것으로 따진다면 북리의천이 절대 그들에게 질 실력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연륜으로 인한 노련함이 더해져 있는 상태였다.

“그동안 네놈들이 본 적 없었을 것을 보게 해 주겠다. 그러면 세상이 정말 넓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삶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생각하자면 너무 늦은 깨달음이 되겠지.”

쇄애애액-.

채채챙-!

그의 목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여기저기 흩어지고 번지며 들려왔다.

한 사람의 신형이 어떻게 그렇게 빠른 순간에 이동할 수 있는 건지, 왜구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북리의천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원래 싸우는 동안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닐 텐데 왜 이번에는 유난히 말이 많은지 의구심을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북리의천의 목소리를 듣는 이들이 그 자리에서 어떤 느낌을 받고 있는지를 생각하자면 쉽게 알 수 있는 일들이었다.

‘빠르다! 어디에 있지? 사라졌어?’

그런 생각들이 끝도 없이 그들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북리의천을 놓친 채 몸을 돌려 그를 찾는 사람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북리의천은 단순히 빠르게 도망치는 것만이 아니었고 매번 신중하게 검을 휘둘렀다.

거대한 괴수를 이루는 작은 개체들.

나무에서 눈을 떼고 숲을 주시하며 그는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어느덧 나무마다 그의 검선을 몸에 안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부상자들을 향해 흑주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흑주의 움직임을 보면 얼마나 행복해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고 북리의천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네가 기분이 좋은 모양이구나. 흑주야.”

북리의천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말했다.

“소영. 보고 있느냐.”

북리의천의 얼굴에 부드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그곳에 독고소영이 함께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며 그는 점점 고양되었다.

적들의 생명을 뺏으려는 목적을 떠나서 그 순간 그는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끼고 있었다.

휘두른 검이 정확히 자기가 의도한 궤적을 따라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북리의천은 그것이 당연한 게 아니라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말인가.’

크게 다쳤거나 죽었다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었다면, 힘을 잃었다면, 이 자리에 올 수 없었다면 모두가 불가능했을 일들.

그는 신명이 났다.

흑주는 더욱 날뛰었고 북리의천의 웃음은 더욱 환해졌다.

“지켜보아라. 소영.”

북리의천은 말을 하고 다시 검을 휘둘렀다.

허공을 가른 검격으로 인해 왜구들이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찰나의 순간에 검이 몇 번이나 허공을 베어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자가 대체 누구라는 말이냐!!”

누군가 끔찍한 비명을 외치며 쓰러졌다.

“모두 나와라! 우리를 도우란 말이다!!”

안을 향해 외치는 자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안에서 몇 사람이 나왔지만 안쪽의 사정도 여의치 않은 듯했다.

북리의천은 어느덧 무아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다.

생과 사에 동시에 한 발씩을 딛고 있는데 그 고양감이 감당되지 않았다.

‘죽으면 그곳에는 네가 있고, 살면 이곳에는 아진과 소청이 있으니 어느 곳으로 가건 두려울 게 없겠구나. 소영.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리고 있어. 이 녀석들이 나를 놔 주겠다고 허락하면 그때는 너에게 가겠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 버린 북리의천의 검은 신비로웠다.

미운 마음이나 원망도 없이 처연하게, 아무런 사사로운 감정도 없이 판결을 내리는 심판자의 그것처럼 단호했다.

초극쾌의 검이 지나간 자리에 수많은 신형이 쓰러지며 쌓였고 흑주는 이리저리 돌아다닐 것도 없이 여러 부상자에게서 진기를 흡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리의천의 팔에서 힘이 빠졌다.

그렇다고 검격이 약해지는 것은 아니었다.

북리의천도 그동안 자신의 움직임에서 쓸데없는 힘이 그렇게 많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의 신형은 이제 특별히 보법이나 신법을 펼치려 하는 것이 아닌데도 공기의 저항을 받지 않는 것처럼 가볍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민들레 홀씨가 된 것처럼 표홀했다.

“소청아. 사조가 심심하구나. 스무 놈 정도 보내보아라.”

눈앞에 있던 놈들이 모두 쓰러지자 북리의천이 안을 향해 소리쳤다.

“예. 사조님.”

안에서도 즐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음의 저주가 깃든 정원에서 전혀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빨라지고 더욱 가벼워지는 북리의천은 이미 자신이 속해 있던 경지를 조금 더 벗어나 있었다.

무공의 수위를 잘게 더 세분화한다면 북리의천은 분명히 그 순간 한 단계 더 상승의 경지로 올랐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흑주야. 더 이상 놈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소청이는 조금 밖에 내보내 주지 않고 말이다. 우리가 먼저 다른 곳을 처리하고 와도 되겠지?”

흑주는 어디로 가면 되는 거냐는 듯이 무턱대고 다른 전각을 향해 날아갔다.

추진력 하나는 누구보다 뛰어난 흑주였다.

북리의천은 흑주를 보고 웃으며 달렸다.

북리의천과 소청이 서로 기감을 열어 두고 있었기에 문제가 생긴다면 바로 알 수 있었다.

북리의천은 흑주를 자기가 데려가도 되는 건가 했는데 흑주는 자기가 북리의천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에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듯했다.

흑주는 지금껏 특별한 명령이 따로 내려지지 않으면 내공이 더 필요하고 더 약한 사람을 따라나섰다.

그런 흑주가 북리의천을 따라나선 것이다.

‘결국은 소청이 나를 앞섰구나.’

북리의천은 흑주의 행동을 보면서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조금도 서운하거나 슬프지 않았다.

저 나무는 순식간에 자라서 하늘을 덮고 태양을 가리고 상상하기도 어려울 만큼 넓은 그늘을 만들어 줄 것이다.

바람이 불면 그 그늘 밑에서 평화로운 단잠을 이룰 수도 있을 터였다.

벽예월이 말하지 않았던가.

소청은 천살성을 품고 태어난 아이라고.

그러나 그 운명을 스스로 훌훌 털어 버렸다고.

천하를 피로 물들이고 그 속에 우뚝 설 괴물.

그 운명을 갖고 태어난 아이가 제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그 생각을 하고 웃음을 짓던 북리의천은 흑주가 기다리고 있던 전각의 문을 발로 박찼다.

“나와라. 이 멍청한 놈들아! 언제까지 나를 기다리게 할 셈이냐. 아무리 예의가 없어도 그렇지.”

그가 먼저 안으로 들어가며 소리쳤다.

그때까지도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거나 침입자가 그곳까지 올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앞의 경우는 말이 되지 않았으니 아마도 뒤의 경우인 듯했다.

느리게 움직이며 북리의천을 바라보던 자들의 눈이 희한했다.

“……?”

북리의천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눈을 본 적이 있었다.

아진이 없는 동안 산본의가의 가주가 전신에 극심한 화상을 입은 사람을 치료할 때.

환자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며 가주가 그에게 마비산을 처방했을 때였다.

‘이 자들…… 혹시 앵속(罌粟)에 중독된 건가?’

북리의천에게는 행운일 수도 있었다.

그가 검을 들고 다가가는데도 사람들은 눈이 풀린 채 저항하지 못했다.

“장주는 어디에 있느냐.”

정신을 차리도록 그들 모두를 향해 거대한 검의 폭풍을 날렸을 때도 그들은 비척거리며 허둥대기만 했다.

그 전각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그랬다.

저항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것이 난감해 잠시 멈칫하다가 다른 방에서 울음소리가 나서 들어가자 나체의 여자들이 피투성이가 된 채 앉아 있다가 북리의천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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