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229화
“그 말은 지금 그 작전을 우리 둘이서 수행하자는 얘기구나.”
“흑주랑 셋이요.”
“그래. 소청아. 좋다. 아주 좋은 생각이다. 그러는 동안 흑주가 놈들의 진기를 흡수한다면 도움이 많이 되겠지. 항주 전역을 돌면서 하자. 우리가 적어도 만 명은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자.”
“네. 사조님.”
소청이 밝아진 얼굴로 대답하자 북리의천이 낭왕을 바라보았다.
“맹주. 우리는 잠시 다녀오겠네. 내일 아침까지 분타로 감세. 그때까지 푹 쉬고 있게. 다들 긴 여정에 힘이 들었을 테니 오늘은 좋은 걸 먹도록 하고.”
“정말 두 사람으로 괜찮은 것인가.”
낭왕은 두 사람이 얘기하는 동안 옆에서 그 대화를 전부 들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한 질문이 그거였는데 북리의천은 대답을 하는 대신 웃었다.
‘자네는 부족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그의 얼굴에는 그런 표정이 맺혀 있었고 낭왕은 부러운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검신과 그의 사손이라면.
거기에 흑주까지 함께 한다면 승산이 있을 듯했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해 주었는데 자기가 망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낭왕은 뒷일을 성공적으로 이어받기 위해 정의맹의 무인들과 함께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예감이 좋군. 그동안 왜구 토벌을 몇 번이나 실패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겠어. 그때는 우리가 이곳에 없었을 뿐이야.”
“그 말이 맞네. 낭왕. 이번에는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싸움의 판도는 달라질 거네.”
낭왕과 함께 있던 정의맹의 정예들은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떨어진 이삭을 줍는 것처럼 승리를 당연하게 챙기는 사람들.
그 검신과 사손이 적진의 한가운데로 향하며 의욕을 불태우는 것을 보자 그들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들을 떠나 왜구의 사업장이 집중적으로 몰려 있는 곳으로 향하는 동안 북리의천과 소청은 서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흑주가 몸이 달아서 급하게 서둘렀다.
소청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웃었다.
흑주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소청은 알고 있었다.
흑주 이전의 검은 구슬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들었던 것이다.
“흑주야. 너도 조심해야 해. 안전할 때만 가서 진기를 흡수해. 네가 먼저 가면 안 돼. 알았지?”
소청이 말하자 흑주가 멈칫하더니 다시 날았다.
소청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느라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항주에 얼마나 있게 될지 알지 못했고 작전이 어느 정도나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최대한 일반 백성들이 다치지 않도록 하면서 왜구만 토벌하기 위해 그들은 각자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북리의천도 그랬지만 소청의 눈빛도 절대로 예사롭지 않았다.
지형도 꼼꼼하게 봐 두었고 만일의 일이 생길 때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지도 머릿속으로 그렸다.
향화문을 통해 항주의 환락가는 꿰고 있었는데 그 중심지로 가면서 북리의천은 소청을 데리고 이런 곳에 와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고 있었다.
그곳은 기루와 창루가 밀집된 곳이었고 반쯤 벗은 여자들이 길을 가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돈 좀 있는 사람들이 가는 고급 창루의 여자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지는 않고 위층에서 교태로운 웃음을 흘리며 사람들을 유혹했고, 그보다 좀 더 급한 사람들은 거리로 나가 몸을 비비며 직접적인 손님 공략에 나섰다.
“어른들 노는 동안 너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당과 하나 줄게.”
그런 소리를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되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북리의천은 고개를 저어댔다.
그 여자들이 스스로 그곳에 오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기가 막혔다.
“사조님.”
소청이야말로 화가 나는 것 같았다.
소청도 억울하게 그런 곳으로 이끌려온 사람들의 사정을 짐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고 싶으냐. 소청아.”
북리의천이 묻자 소청이 그를 바라보았다.
“도망치게 해 드리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면 금방 사람들이 따라가겠죠.”
“그래. 그럴 것이다. 그들을 먼저 해치우지 않으면 문을 열어 준다고 해도 스스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미 그런 수에 넘어간 적도 있을 것이고. 문을 열어 주거나 다른 사람이 도피를 도와주려고 해도 도망치면 안 된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겠지.”
다른 이들을 잡아 가두는 이들에게 그것은 흔한 방법이었다.
순진하고 친절한 손님으로 가장해 여자들에게 접근해서 탈출을 돕는 척하다가 정말 따라나서면 본색을 드러내고 폭력을 행사하는 식이었다.
소청은 창루 주변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빠져나갈 곳을 봐 두는 것 같았다.
그 후에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여자들을 감시하고 있는 자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했다.
“그냥 도망가게만 해서는 안 되고 임시로 모여 있을 거처라도 마련해 줘야 할 것 같아요. 사조님.”
“그래. 그러는 게 좋겠구나. 도망치다가 길에서 위험을 만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이곳에 오래 있을 수가 없을 테고.”
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포기하는 것이 나았다.
그것은 향화문을 통해 확인한 내용이기도 했다.
관은 썩을 대로 썩어서 이미 왜구와 깊이 결탁해 있었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왜구의 돈을 받지 않는 이들이 없었다.
어느 정도 지위에 있는 자들은 녹보다도 훨씬 더 많은 돈을 왜구에서 받고 있었으니 그들에게 말을 한다는 것은 왜구에게 이제부터 쳐들어갈 거라고 사전에 경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폐하께서 나중에 그자들도 응징해 주시겠지요?”
소청이 그것만 바란다는 듯이 말하자 북리의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지금의 황상에게 기대할 것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싶었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자기 앞에 놓인 길이 절벽으로 향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닫는 대신 희망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북리의천은 알고 있었다.
무림맹에 있을 때만 해도 구조적인 부패를 발견하고 절망한 일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때는 자기 손으로 무엇을 고쳐 보려고 해도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무력감만 느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이곳에서 땅을 파고 나가다 보면 저쪽에서 아진과 황상이 마주 나와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게다가 옆에는 든든하기 짝이 없는 사손까지 있지 않은가.
“근처에 왜놈들이 지내는 숙소가 있을 것 같은데 그곳을 먼저 비우면 어떻겠느냐. 소청아. 그러고 나서 일을 시작하자. 몸을 피할 사람들은 그곳에 있도록 하고. 우리가 떠날 때는 정의맹의 무인들에게 지키라고 하면 될 것 같다만. 그렇게 시작해서 점점 영역을 넓혀 가며 수복하는 것이다.”
“좋아요. 사조님. 강한 자들을 해치워 놓으면 다른 사람들이 힘을 뭉쳐서 싸울 수 있을 거예요.”
감히 덤빌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한 자들은 자기들이 맡고 나머지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을 것 같았다.
절정 이상의 고수들, 거기에서 좀 더 움직여 일류 이상의 고수들까지만 해치워 놓는다면 이류나 삼류들과는 다른 사람들도 힘을 합쳐서 싸워 볼 만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간단하지는 않겠지만 자신들의 삶을 되찾기 위해 그 정도의 의지는 다지면서 덤벼야 하는 일이었다.
북리의천과 소청은 한 번 눈빛을 나눈 후에 그들이 봐 두었던 곳으로 향했다.
전부터 왜구들이 드나들던 곳이었다.
겉모습도 심상치 않게 화려한 장원 안으로 들어가자 고루거각이 즐비했다.
그저 단순히 창루를 감시하는 자들만 있는 곳이 아니고 지부 정도의 위치는 차지하는 듯했다.
향화문을 통해 그곳에 대해 들은 것이 없어서 조금 긴장이 되기는 했지만 그런 곳일수록 더 확실히 처리해 놓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직 향화문에서 정보가 넘어오지 않았다는 것은 향화문도 그들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었는데 그런 상태로 있다가는 오히려 향화문이 그들에게 역습을 당할 수도 있어서였다.
북리의천과 소청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것들을 같이 깨달아 갔다.
“향화문에서 이곳을 놓친 것 같다.”
“예. 사조님. 여기를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에요.”
앞뒤로 길게 설명을 하지 않은 채 툭 자기 생각을 말한 건데도 소청이 이미 그의 머릿속을 다 읽고 있는 것처럼 그리 대꾸를 하는 걸 보며 북리의천은 웃음이 나왔다.
꼭 제 속으로 낳은 핏줄을 보는 것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준비됐느냐. 소청아.”
“네. 사조님.”
흑주 역시 자기도 준비됐다는 듯이 소청의 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 나올 때가 아니었는데도 그런 것은, 자기가 있다는 걸 잊지 말고 먹을 걸 남겨 달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싸움에 취해서 흑주를 잊은 적이 종종 있었던 그들은 뜨끔한 채 흑주의 경고를 되새겼다.
장원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 앞을 지키는 이들은 따로 없었다.
수시로 드나드는 곳이라 그런 건지, 믿는 구석이 대단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방심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기습하는 입장에서는 수월했다.
정원은 일본식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런 장원이 익숙하지 않은 소청은 주의 깊게 그 모습을 살폈다.
모든 구조물에는 그렇게 설치가 된 것에 다 이유가 있겠지만 닌자들이 머무는 곳은 특히나 그랬다.
그리고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무와 한 몸을 이루고 있던 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습을 드러낸 것과 암기를 날린 것이 거의 동시였지만 북리의천과 소청은 그들이 움직이기 전부터 기척을 느끼고 대비하고 있었다.
북리의천은 소청이 품에 손을 넣는 것을 보고 소청에게 양보를 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날아온 암기는 쳐 내려고 하지도 않고 그대로 닌자들의 사혈만을 노려 침을 날렸다.
암기는 분명히 정확한 궤적으로 날아왔지만 두 사람에게는 다가오지도 못했다.
검막을 칠 필요도 없이 그저 간단히 몸을 움직이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실로 대단한 안력이었다.
북리의천과 소청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되어 버렸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눈에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날아오는 암기를, 겨우 몸을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 전부 다 막아낸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던 것이다.
북리의천과 소청은 가던 길을 멈추지 않았다.
다른 이가 남아 있지는 않은지 따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의 기감은 완전히 열려 있었다.
‘오늘은 제자 덕에 올려놓은 내공을 마음껏 써 봐도 되겠군.’
북리의천은 그런 생각을 하며 흐뭇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바깥에 있는 전각일수록 하급 무사들이 지내는 곳일 터였다.
전각의 배치를 볼수록 드는 생각은 상당히 수비에 적합하게 지어놨다는 거였다.
일단 이곳을 완전히 비워 버리고 사람들을 이곳에 숨게 하면 적은 인원으로 효과적으로 장원을 지켜나갈 수 있을 것 같아 북리의천과 소청은 처음부터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장주인 총대장은 말도 못 할 음마였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여자를 품고서 잠이 들었다.
그게 가능한 것은 아무래도 사파 쪽의 무공 때문인 것 같았는데 창루의 여자들이 수시로 그곳에 불려왔다.
총대장에 대해서는 북리의천도 향화문을 통해 보고 받은 것이 있었지만 총대장이 그곳에 있는 것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소청의 솜씨가 워낙 깔끔하고 죽은 자들이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당해서 그들이 전각으로 향하는 동안 장원은 완벽한 평화에 잠겨 있었다.
유일하게 화가 난 건 흑주였는데 소청의 앞을 알짱거리면서 자기에게 그럴 수가 있냐는 듯이 건들거렸다.
소청도 이미 반성하는 중이었기에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의미로 흑주를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