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 의선되다-226화 (226/470)

제226화

226화

단리서언이 산본의가에 들어가도록 그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마을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거리에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돌풍이 불었다는 것 정도였다.

단리서언은 단숨에 산본의가에 이르렀다.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 앞에 길게 줄을 지어 선 사람들이 보였다.

‘뇌혈검.’

단리서언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그것은 분명 그의 마기였다.

‘비고를 지키라고 했더니 이곳에 와 있어? 그래. 여기에서 뭘 하고 있는지나 보자.’

추살접에 대한 소문이며 사도련주를 처리한 무리에 대한 이야기는 그도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단리서언은 그 소식을 다른 이를 통해 접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추살접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순간 바로 역천마의를 떠올렸고 그녀가 이 일에 관계가 된 건가 하면서도 이 일만큼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가 알아내겠다고 생각했다.

그냥 놔두기만 했어도 여러 곳에서 정보가 쉴 틈 없이 들어왔을 것이고 모든 조각이 빠짐없이 짜 맞춰졌을 테지만 단리서언은 그 작업을 스스로 하고 싶었다.

점점 숨통을 조이고 몰고 가면서 느끼게 될 쾌감이 기대되어서였다.

그는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환자 중에 가끔 새치기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줄을 유지하게 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 질서유지인조차 단리서언을 보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환자 중에도 새치기하는 사람을 관리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인데 그때는 모두가 조용했다.

단리서언의 기세는 그만큼이나 대단했다.

단리서언은 자신의 마기를 숨기려 하지 않았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사람들이 무인들에게 급히 신호를 보내자 그 일련의 신호에 맞춰 순식간에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흥.’

겨우 의가의 무인들이 그렇게 빨리 대열을 정비한다는 것이 놀랍기는 했지만 소회(所懷)는 그게 다였다.

모여든 자들은 한주먹거리도 되지 않을 것이다.

단리서언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을 터였다.

채영은 아무 말도 없이 단리서언의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단리서언은 풍경을 구경하는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 죽을 운명인지도 모르고 득실거리는 인간들.

여기에 온 것으로 인해서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하고 죽게 될 거라는 것도 모르고 이곳까지 몸을 이끌고 온 이들을 보고 있으려니 웃음이 났다.

아무리 아파도 그냥 참는 것이 생명을 하루라도 연장하는 길이 되었을 터였다.

단리서언이 피식 웃으며 채영을 바라보았다.

그저 생각만 하면 채영이 그의 뜻을 알아들었겠지만 단리서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말을 듣기를 원했던 것이다.

“놈들을 죽여라. 전부. 진료를 받으러 온 자까지 하나도 빠뜨리지 말고.”

“존명!”

채영의 입에서 목소리가 우렁차게 나왔고 그의 손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검을 빼 들었다.

“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수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이면서 소란이 일어날 수도 있었고 서로 엉켜서 넘어질 수도 있었지만 무인들이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채영은 아무리 설치더라도 일단은 그곳에 있는 무인들을 먼저 죽이지 않으면 양민의 학살을 시작할 수 없는 처지였다.

채영은 살점과 피가 난무하는 거친 살육을 좋아했기에 그것이 짜증스러웠다.

식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정갈한 음식에 난폭하게 젓가락질을 해서 헤집어놓고 싶은데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어서였다.

그 불만족이 채영의 몸에서 거친 기운으로 폭사하기 시작했고 단리서언은 이제부터 채영이 그려내는 한 폭의 아름다운 검무를 구경이나 할 작정이었다.

정작 제 손이 필요할 일은 없을 거라고 단리서언은 자신만만해했다.

그는 아진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진의 그 유명한 스승과 잘난 제자도 이곳에 같이 있다고 생각했고 절대의 경지를 넘어선 것 같다는 아진의 여동생도 이곳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도 채영에게만 그 자리를 맡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영이 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흥이 식으면 그때는 뇌혈검을 찾아 그를 죽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으로 단리서언이 채영을 바라보고 채영이 검을 빼 들었을 때 단리서언의 앞으로 흙먼지가 솟구쳤다.

흙먼지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뇌혈검이었다.

“……!”

그는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단리서언이라는 사실에 기함하며 눈을 크게 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날까 했던 것이다.

뱀을 만난 두꺼비가 반사적으로 그러듯이 그의 몸이 서서히 경직되었다.

단리서언은 뇌혈검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네놈을 어찌 죽이면 좋을까. 뇌혈검. 네놈이 말을 해 보아라.”

“…….”

단리서언은 싸늘한 시선으로 뇌혈검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오체투지 하고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판에 적을 대하는 것처럼 살기를 풍기면서 검을 뽑아 든 뇌혈검을 보자 기가 막혔다.

키웠던 사자 새끼가 저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발톱을 세운다고 해도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죽으려고 용을 쓰는군. 그래. 네놈이 그것을 원한다면 죽게 해 주지. 그간의 정이 있는데 그 정도를 못 해 주겠느냐.”

단리서언은 금방이라도 몸을 터뜨려 버릴 기세로 엄청난 무형지기를 발했다.

한 번에 고조시켜버릴 수도 있었지만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은 채 뇌혈검이 그 모든 과정을 생생하게 오래오래 느끼도록 했다.

뇌혈검은 억지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검으로 제 손등을 그었다.

손등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미약한 통증은 그에게 현실감을 조금씩 안겨 주었고 자기가 발을 붙이고 서 있는 그 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을 선명하게 느끼도록 해 주었다.

단리서언은 겨우 그것으로 뭘 할 수 있냐는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죽여라. 아주 잔인하게. 이놈들의 앞에서 죽음이 뭔지 보여 주어라. 이놈들의 앞에 펼쳐질 미래가 뭔지, 이놈들의 운명이 뭔지 눈을 뜨고 하나하나 보게 해라.”

단리서언이 말하자 채영은 단리서언과 닮은 웃음을 짓고 벼락같이 뇌혈검을 향해 달려갔다.

동시에 검강이 일었고 허공을 찢는 파공성과 함께 그것이 뇌혈검을 갈랐다.

뇌혈검은 채영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지만 그의 검격을 피하지 못했다.

보는 순간 이미 채영의 검이 뇌혈검의 머리에 닿아 그대로 가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입에 고인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영혼이 반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곳에 있던 이들은 뇌혈감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린린이 떠나면서 산본의가를 믿고 맡긴 자가 아니던가.

그런 뇌혈검이 손도 써보지 못하고 그대로 당했다.

도망칠 기회조차 없이.

단 일 초도 받아 내지 못하고 몸이 갈라졌다.

양단된 몸이 쓰러지자 단리서언이 그에게 다가갔다.

“아니지. 아니지. 이렇게 빨리 끝내라는 게 아니었잖아. 천천히 죽음의 공포를 맛보게 하라니까.”

단리서언은 쓰러진 뇌혈검의 위에서 손을 한 번 휘저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아진이 그러는 것처럼 몸에 손을 대고 마나를 밀어 넣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사람들은 단리서언이 한 말을 듣고도 설마 자기들이 들은 말이 그런 의미일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말 뇌혈검의 몸이 붙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을 때 몇 사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차원이 다른 괴물.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대한 두려움의 크기에 압도되어 한두 사람이 비틀거렸다.

단리서언은 재미있다는 듯 그들을 구경했다.

“이번에는 실수 없이 잘하도록 해. 채영.”

“예, 지존.”

채영은 뇌혈검을 보며 돌아섰다.

죽었다가 살아난 뇌혈검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차렸다.

덕분에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죽음을 경험한다는 것이 이렇게 불쾌하다는 것을 뇌혈검도 깨닫게 됐다.

그동안은 역천마의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상상이나 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자신의 경험이 된 것이다.

채영이 다시 뇌혈검을 덮쳤지만 그도 이전처럼 멍하니 당하지는 않았다.

그는 갑자기 눈을 감아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오히려 채영이 더 당황할 정도였다.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할 정도로 집중을 해야 할 텐데 아예 감아 버렸으니 황당할 만도 했다.

그러나 뇌혈검에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눈을 뜨고는 단리서언을 향한 공포를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단리서언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큰 부담이자 공포였다.

그래서 차라리 시각을 포기하고 다른 것들을 채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단리서언은 그 일을 채영에게만 맡기고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 있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뇌혈검의 시야에 자신이 정확하게 들어가도록 서 있었고 뇌혈검이 겁을 먹도록 조종하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자 단리서언은 뇌혈검이 웬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인지 짜증이 나서 환상을 보게 하는 진을 만들어 내고 뇌혈검을 거대한 공포에 질식시켜 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안 될 건 뭔가.’

단리서언이 그 생각을 하며 막 뇌혈검을 향해 다가가려 할 때였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졌다.

단리서언이 이해할 수 없는 무슨 일인가가.

갑자기 그의 뒤에서 엄청난 풍압이 느껴지고 단리서언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 일이 일어날 때까지 누군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단리서언은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리서언으로서 아주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내가 놓치다니. 내 기감을 빠져나가다니.’

단리서언은 크게 화가 나서 몸을 떨었다.

‘어떤 놈이 감히!’

그러나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도 그 존재를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바람은 뇌혈검을 다른 곳에 데려다 두고서야 돌아왔다.

난감해진 사람은 뇌혈검도 마찬가지였다.

뇌혈검에게 필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역시 위도처럼 산본위가를 지키라는 명을 받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지존으로부터 받은 명령이었다.

그런데 위도가 그를 얌전히 다른 곳에, 나름대로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곳에 두고 온 것이다.

뇌혈검은 뻘쭘한 표정으로 그곳에 다시 올 수밖에 없었다.

위도는 뇌혈검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줬다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단리서언을 마주 보고 섰다.

“어서 덤벼.”

위도는 단리서언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

“…….”

단리서언은 자신을 향해 그렇게 광오한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자가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놀랐다.

그리고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났다.

분노한 단리서언은 곧바로 표시가 났다.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펄럭이며 그가 서 있는 지표에서 강풍이 이는 것 같았다.

단리서언은 위도를 놓칠 생각이 없어 그대로 몸을 날렸다.

검을 빼 들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이 지독한 분노를 다스리려면 주먹을 휘둘러 분풀이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단리서언은 위도를 쫓아 가 그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위도의 고개가 무섭게 돌아갔다.

목뼈가 부러진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상황에 단리서언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자신의 속도를 믿고 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간단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상대는 허무할 정도로 단리서언에게 붙잡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