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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25화 (225/470)
  • 제225화

    225화

    “그래서 너희는 무슨 볼일로 그러는 거야? 죽고 싶다고 애원하는 중인 것 맞지?”

    “귀엽게 노네. 이 예쁜이가. 오라버니들이랑 놀아보자는 거잖아. 그 말이 뭐가 그렇게 어려워? 너. 제대로 남자 맛본 적 없지? 이리와 봐. 오라버니들이랑 놀고 나면 다른 놈들이랑은 재미없어서 못 논다?”

    “지랄 염병들을 하고 있네.”

    “예쁘게 생긴 게 입은 왜 이렇게 걸레 같을까? 그래도 귀여워해 줄 테니까 이리 와. 같이 있는 놈들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가 한눈팔았다고 너를 구박하지 못하게 내 동생들이 다 썰어줄 거야.”

    왈패들의 대사는 어디에서 배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천편일률적이었다.

    그들은 스무 명이 넘게 이동하던 중이었기에 머릿수를 믿고 있었다.

    언제나 문제는 상대방의 실력을 알아보지도 못할 만큼 실력이 없는 자들이 일으켰다.

    비고의 경비 무사들과 섬전대는 역천마의가 어떤 무공으로 놈들을 묵사발 내줄지 궁금해하며 지켜보고 있었다.

    린린도 역시 호기심이 생겨서 느긋하게 역천마의를 구경했다.

    역천마의는 조금 전까지의 모습은 다 지운 채 발을 뗐다.

    그러자 그녀의 신형이 잔상을 그리며 섬전처럼 폭사해 왈패들 앞에서 나타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팔이 수십 개는 된 것처럼 움직이더니 그 주위에 있던 이들의 혈을 거의 동시에 짚었다.

    뒤에 있던 사람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역천마의의 잔상뿐이었다.

    그러고 나서 역천마의가 뒤로 물러섰을 때 린린과 마두들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를 뜨려 했다.

    그러나 역천마의에게 당한 사람들은 멍한 상태일 뿐 피를 흘리지도 않고 그대로 서 있었다.

    뭐 한 거냐고 물으려던 린린은 역천마의의 목소리를 듣고 입을 다물었다.

    “너희는 잘 마른 낙엽들이다. 비질하는 소리가 들리지. 그 빗자루가 이제 곧 너희도 쓸어갈 거야. 너희는 그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듣지.”

    역천마의이 말하는 동안 린린이 마두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마두들 역시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지은 채 린린을 보았다.

    역천마의에 대해서는 그동안 숱한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런 모습을 본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설마 섭혼술을 펼치고 있는 건가 하면서 그들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은 채 역천마의를 지켜보았다.

    역천마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그녀의 앞에 서 있던 왈패들은 멍한 시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비가 옆으로 왔어. 빗자루에 너희 몸이 쓸려나가고 있어.”

    역천마의는 손을 움직인 것도 아니고 다른 무공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단지 그 말만으로 왈패들의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마두들은 신기하다는 듯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다른 곳에서 온 낙엽들에 뒤섞여서 너희는 한쪽으로 밀려가. 거기에는 모닥불이 타고 있지. 비질을 하는 사람들은 너희를 그리로 몰고 가. 뜨거워져. 점점 뜨거워. 그런데도 도망갈 곳은 없고 너희는 점점 모닥불로 가까워져.”

    “으아아악!!”

    누군가 비명을 터뜨리고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 소리가 다른 이들에게서도 이어졌다.

    그들은 정말 열기를 느끼는 것처럼 펄쩍 뛰었다.

    장난을 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얼굴을 보면 얼마나 겁에 질려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섬전대주가 말을 했지만 린린이 손가락을 입에 대고 막자 놀란 듯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불어. 불꽃이 모닥불을 넘어와. 불씨가 너희 몸에 붙어. 앗, 뜨거워! 바짝 말라 있던 몸에 불이 붙어. 화르륵 불길이 타올라.”

    “아아아악!”

    서 있던 이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들은 불이 붙은 낙엽이었다.

    몸에 붙은 불을 끄지 못해 안달이 난.

    겁에 질려 도망치고 싶은 낙엽들.

    “아아아악!!”

    분명 소리를 낼 수 있는 것 같은데 비명 외에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살려 달라고 외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낙엽이 됐다고 생각하는 거군.’

    린린은 역천마의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역천마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왈패들을 보았다.

    “불이 붙어 버렸어. 몸이 다 타 버렸네? 이제는 뜨겁지도 않아. 바람이 불어서 너희 몸이 날려가. 너희가 살아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너희는 재가 된 채 부서져 버려. 바람이 지나가고 너희 몸은 조각이 난 채 나뒹굴어.”

    설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몇 사람의 몸이 정말 조각이 났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만약 역천마의가 한 말이 그들의 몸에 이루어지는 거였다고 한다면 불이 붙었다고 했을 때 몸에서 연기가 나거나 불이 붙었을 것 같은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몸이 조각나 버리는 사람이 있었다.

    역천마의는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고 생각한 듯이 돌아섰다.

    린린과 마두들이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역천마의는 그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자신의 장난에 너무 몰두해서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도 못한 사람처럼 그녀는 놀란 듯 린린을 보았다.

    “마도 같아.”

    린린의 말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상황에서 웃음을 터뜨린다는 거야말로 정말 마도 같은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들은 부정할 생각도 없었다.

    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뼛속까지 마도였으니까.

    “어차피 죽일 거였잖아요.”

    역천마의는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좀 친절하게 죽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래도 재미있기는 하네요. 지존.”

    섬마대주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이 말했다.

    “그런데 역천마의 님. 저희한테도 저런 걸 하실 수 있습니까?”

    섬마대주가 묻자 역천마의가 웃었다.

    “아아…… 하하하. 그건 못 하시는 모양이네. 다행입니다.”

    섬마대주는 그 사실을 믿고 싶은 듯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내 대법이 안 통할 사람은 천하를 전부 다 뒤집어 턴다고 해도 스무 명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린린이 혀를 찼다.

    “제 위치를 설명하는데 손가락이 열 개가 넘게 필요하면 나는 자랑을 못 할 텐데. 역천마의는 역시 대단해.”

    “너무 하세요. 지존. 저는 그래도 꿈을 잃지 않을 거예요.”

    징징거리는 역천마의가 조금 전에 이십여 명의 왈패들을 낙엽으로 만들어 불태워 죽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마두들은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저렇게 가증스러울까 하면서.

    * * *

    붉은 노을이 사물에 온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길게 뻗은 그림자는 왠지 오래된 기억들을 미화시키는 듯했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단리서언조차도 그 순간에는 그런 기분을 느꼈다.

    바위 위에 앉아 강아지풀을 뜯어 물고 생각에 잠겨 있던 단리서언이 십만대산으로 향하다가 문득 걸음을 돌린 것은 어쩌면 그 노을 때문이었다.

    “지존.”

    그를 따라나섰던 비밀 호법 채영이 그를 보았다.

    다른 곳으로 가냐는 질문이었다.

    “그곳에 가 보자. 채영.”

    “산본의가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채영은 단리서언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단리서언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단리서언은 지금껏 그런 비밀 호법을 계속 두었다.

    그러다가 자신에 대한 비밀을 너무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하면 죽여가면서.

    채영도 언제 죽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일일이 말을 할 필요도, 전음을 보낼 필요도 없어서 편했다.

    단리서언이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지만 의문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으면 그때 가서 생각을 떠올려 주면 그만이었다.

    채영은 단리서언을 따랐다.

    단리서언이 전력을 다해 경공을 펼쳐도 그를 놓치지 않고 따라잡을 만큼 경공을 잘 한다는 것과 내공이 적지 않다는 것도 그를 비밀 호법으로 선택한 이유 중 하나였다.

    -그걸 알고 있느냐. 채영.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그곳에서 너는 죽을 것이다.

    “그렇습니까.”

    채영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천마신교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태도가 특별하지 않았다.

    교주의 명령을 수행하다 죽는다는 것은 곧 마신의 뜻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고 그러면 마신이 예비한 복을 누리게 될 테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곳에서 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할수록 예비된 복이 더 크다는 믿음을 가진 이도 있었다.

    단리서언은 겁에 질리지도 않는 채영을 보면서 재미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겁먹으라고 한 말이었는데.

    그들이 산본의가에 도착한 것은 두 시진이 지난 후였다.

    말을 타고 가더라도 열흘이 훨씬 넘게 걸릴 곳이었지만 단리서언에게 그 정도 경공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산본의가.

    아주 오래전부터 머릿속에서 떠오르며 그의 신경을 긁던 곳에 이제야 이르렀다.

    단리서언은 산본의가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서서 한참을 서 있었다.

    채영도 단리서언이 따로 명령을 내리기 전까지 그 옆에서 산본의가를 같이 구경했다.

    “가자. 멸문을 하기에 좋은 날씨 같지 않으냐.”

    단리서언이 드물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예. 지존.”

    채영은 멸문이라는 말이 주는 흥분감을 좋아했다.

    그들이 서 있던 언덕에서 키 작은 풀들이 한쪽으로 휘며 몸서리를 쳤고 두 사람의 신형이 산본의가 쪽으로 폭사했다.

    * * *

    위도는 제선문주의 옆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위 대협. 힘들지 않으십니까? 여섯 시진 동안 쉬지도 않고 계속 팔로 솥을 젓고 있는데 이건 정상적이지 않습니다. 아무리 내공이 많다고 해도 이건 불가능할 겁니다. 아진이라도 이런 건 못 할 텐데…….”

    가주는 그 옆에서 위도를 보며 걱정을 하고 있었다.

    제선문주는 그 말을 듣고 클클거리며 웃었다.

    어디에서 이런 괴물 같은 위인이 온 건지 모르지만 제선문주는 위도가 좋아서 죽을 것 같았다.

    약초를 배합할 때 열이 골고루 닿을 수 있도록 뒤집어 주면 좋다고 했더니 그때부터 쉬지도 않고 이러고 있었다.

    그만하라고 할까 했지만 힘들면 알아서 그만두겠지 하고 그냥 두었다.

    그만하라고 하기에는 그가 너무나 유용했다.

    이렇게만 한다면 약효를 3할 정도는 더 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다 돼 갑니다. 위 대협. 본격적으로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이게 다 만들어져서 다행입니다. 빨리 만들어서 항주에 보내야지요. 이게 있으면 우리가 그곳에 가지 못해도 어느 정도 안심하면서 싸울 수 있을 겁니다.”

    제선문주가 만든 것은 금창약보다 세 배는 효과가 좋은 신약이었다.

    “팔아서 돈을 벌면 돈방석에 앉을 텐데.”

    제선문주가 아쉽다는 듯이 입맛을 다시며 말하자 가주가 그를 달랬다.

    “문주님께는 반드시 보상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냥 해 본 말이오. 가주는 이래서 재미가 없소.”

    핀잔을 주든 말든, 가주는 그 말을 자기가 정말 지킬 거라면서 계속 제선문주를 다독였다.

    “……!”

    그때까지 단 한 번도 쉬지 않던 위도의 팔이 갑자기 멈췄다.

    고개를 든 그가 허공을 바라보았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듯했다.

    “피하셔야 합니다. 약에 미련을 두지 마시고 여기를 떠나십시오. 그자가 온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남기고 위도의 모습이 사라졌을 때 제선문주와 가주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뭘 보고 서 계십니까. 가주님. 빨리 저으세요. 이대로 굳으면 다 망하는 겁니다.”

    제선문주가 불의 세기를 일정하게 유지하며 말하자 가주가 주걱을 들었다.

    “문주님은 가셔도 됩니다.”

    그러자 문주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사람들이 이걸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지 아는데 어떻게 그럽니까.”

    가주도 웃으며 열심히 배합물을 저었다.

    그것은 그들 몫의 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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