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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24화 (224/470)
  • 제224화

    224화

    단리서언이 떠난 후 루주 설인정은 몸이 다 녹아내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다가 이제야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였다.

    그래도 책 잡히지 않고 일을 끝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지금부터는 부지런히 돈을 마련해야 했는데 오히려 그것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신교에서 운영하는 도박장에서만 돈을 끌어모아도 그 일은 손쉽게 해결될 터였다.

    “잠시 쉴 테니 특별한 일이 아니면 찾지 말도록 해라.”

    “예. 루주님.”

    설인정은 안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태사의에 누워 눈을 붙였다.

    역천마의에게 배운 미혼술을 바탕으로 그녀가 황성에서 기루를 낸 건 80년 전이었다.

    그녀에게 내려진 임무는 고관대작들에게 미혼술을 써서 정보를 모으는 거였다.

    빼어난 미모에 천의 얼굴을 가진 그녀는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며 대상에게 접근할 수 있었고 그녀에게 부여된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해 냈다.

    다른 신교도들처럼 설인정은 맡은 임무에 충성을 다했지만 그래도 다시 천마의 부름을 받고 교단으로 돌아가 곁에서 천마를 보필하는 것이 가장 큰 소망이었다.

    감히 그런 마음을 품을 자격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설인정은 천마 패월악을 남모르게 연모했다.

    그 망나니 같은 성격 하며 내일 일은 모른다는 듯이 아무렇게나 저질러 버리고 부하들을 고통과 절망에 빠뜨린 채 외면하는 모습이 그렇게 취향일 수가 없었다.

    음양인이라는 말도 설인정에게는 조금도 흠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교주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설인정의 삶은 그대로 멈추었다.

    설인정은 그대로 죽을 생각이었는데 역천마의가 그녀를 찾아왔다.

    설인정이 죽으려 할 거라는 것을 알아서 그랬을 것이다.

    -너는 본교의 재산이다. 너를 만들기 위해서 내가 시행한 대법을 헛되게 하지 마라.

    그것은 신교의 엄한 명령이었고 설인정은 죽지 못했다.

    그래도 시간이 다 해서 죽는 것은 상관이 없겠지 했는데 대법의 영향으로 그녀의 몸뚱이는 늙지도, 병들지도 않았다.

    -저도 언젠가는 죽을 수 있나요?

    신교로 돌아가는 역천마의에게 했던 단 하나의 질문이었지만 설인정은 답을 듣지 못했다.

    단리서언이 교주가 될 때까지도 그녀는 신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는 신교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도 들지 않았다.

    설인정은 자기가 신교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천마 패월악을 곁에서 모시고 싶었던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그분은 정말 어떻게 된 걸까?’

    설인정은 이상한 소문을 들었다.

    역천마의가 신교에서 사라졌다는 거였다.

    사도련주를 괴멸시킨 정파 무림인들이 한 무리의 자색 나비 떼들을 따라가 사도련주를 찾아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설인정은 혹시나 했다.

    그녀는 역천마의의 추살접을 알고 있었다.

    본 적도 있었고 한 마리는 얻은 적도 있었다.

    관리를 잘못해서 죽어 버리기는 했지만 그 모습을 잊지는 않았다.

    생긴 게 예뻐서, 죽은 나비를 지금도 기념으로 갖고 있을 정도였다.

    ‘역천마의님이 정파를 도우신 건 아닐 텐데. 혹시 잡혀 계신 걸까? 그런 거라면 교주님이 이미 아실 텐데. 왜 교주님이 역천마의님을 구하시지 않는 거지?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감히 교주님을 내가 판단할 수는 없는 건데.’

    그런 의문들을 떠올리고 있을 때 갑자기 단리서언이 찾아왔다.

    그녀는 단리서언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천 개의 얼굴이 있었다.

    조금씩 생김새가 다른 천 개의 얼굴에는 각각의 기억이나 생각을 따로 주입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은 모든 모습의 생각과 기억을 전부 관장할 수 있지만 누군가 생각을 훔치려 시도한다면 다른 얼굴을 하나 내놓고 있으면 그만이었다.

    역천마의가 그것을 만들어 주었을 때 설인정은 이것처럼 쓸데없는 게 또 있을까 했다.

    천 개의 얼굴을 갖느니 그냥 때에 따라 구결을 외워 역용술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단리서언을 만나고 보니 그것이 상당히 유용했다.

    ‘한 20년쯤 후에는 나도 죽을 수 있을까? 역천마의님은 도대체 나한테 무슨 대법을 해 놓으신 걸까?’

    꿈결에 설인정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잠시 잠이 들었지만 날카로운 기감에 낯선 존재가 걸려들었다.

    그러다 설인정은 상대가 기감에 걸린 게 아니라 일부러 기척을 드러낸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만 먹으면 들킬 사람이 아닌데 자기가 온 걸 알아줬으면 해서 헛기침을 하는 것처럼 기척을 드러낸 느낌이었던 것이다.

    설인정은 깜짝 놀라며 태사의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놀란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누구시죠? 여기에는 어떻게 들어오셨습니까?”

    “놀라게 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필요한 이야기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눈앞의 남자는 지극히 평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이 그렇게 무념무상인 것은 처음 보았다.

    설인정이 모른 게 있다면 아진을 본 수많은 여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점이었다.

    “무슨 일이죠?”

    설인정은 소리를 지르거나 밖에 있는 사람을 부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 밖에 있는 수십 명의 사람들보다 그녀가 더 강했다.

    아진도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었다.

    비고를 지키는 경비 무사들 정도는 아니고 섬전대주보다도 무위가 떨어지지만 섬전대원들의 수준은 되는 것 같았다.

    특별하게 수련한 무공에 있어서만큼은 그 성취의 정도가 훨씬 더 높았고 역천마의의 섭혼술과 비슷한 것을 수련한 것 같은데 그건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말씀해 보세요.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지만 일단 오셨으니 이야기는 들어보도록 하죠.”

    “알겠습니다. 나는 몇 가지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중 몇 가지는 추측이고 몇 가지는 진실입니다.”

    “당신은 누구죠?”

    “그건 말을 못 하겠습니다. 상관이 없을 수도 있지만 루주님이 내 말을 믿지 못할 경우에 내가 속한 곳이 위험해질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아니. 위험해지는 일은 없겠지만 공격을 당할 수는 있어서. 그것 때문이라고 해 두죠.”

    설인정은 더더욱 깊은 의혹에 빠져들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어요.”

    “간단하게 말하겠습니다. 나에게는 동생이 있는데 그 녀석은 자기 주위의 사람들을 걱정하지 않는 것처럼 굴면서도 사실은 굉장히 걱정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중에 루주님도 포함이 됩니다. 그냥 갈까 했는데 그러다 보면 루주님은 그곳에서 벗어날 기회도 없이 죽임을 당하게 될 것 같고 그 사실을 알면 내 동생이 슬퍼할 것 같습니다.”

    “…….”

    설인정은 알 수 없는 말이 이어지는 동안 가벼운 두통까지 느끼고 있었다.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죠. 나는 이곳이 천마신교의 후원을 받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 교주가 다녀간 것도 알고 있고 교주와 북궁세가 공자가 연결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

    설인정은 크게 놀랐으면서도 표정을 가까스로 숨겼다.

    “동생이라는 분이 누구죠?”

    그녀는 다소 조급하고 초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데 왜 기대하고 있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패월악 교주라는 말이 나올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집요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보면서 아진은 루주가 패월악을 오랫동안 잊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 번의 죽음을 거치기 전 그 아이는 패월악이었습니다.”

    “…….”

    설인정은 그대로 쓰러졌다.

    “…….”

    아진은 자기가 크게 잘못한 것 같은 생각이 들어 그녀의 혈을 짚어 정신이 들게 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리고 린린이 부럽기도 했다.

    어떤 삶을 살았으면 패월악을 알던 모든 사람이 이런 반응을 보일까.

    ‘진짜 대단하네. 어떻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이러냐?’

    아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단리서언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싸움을 스스로 포기하고 싶어질 수도 있을까 생각했다.

    설인정은 정신을 차리고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인가요? 교주님께서 살아 계시는가요?”

    말을 하는 동안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회한과 슬픔이 눈물에 녹아서 흐르는 것 같았다.

    “교주님은 돌아가시지 않았는데 제가 다른 분을 교주님으로 받아들인 거군요.”

    “……왜 의심을 안 합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하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그러게요. 그러는 게 정상일 것 같은데 얘기를 듣는 동안 왠지 교주님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까 했던 것 같아요.”

    “신기하네요. 아. 제 동생은 여자입니다. 여자가 됐어요. 그 아이 말로는 얼굴도 변했대요.”

    설인정은 순간적으로 실망한 얼굴이 되어 멍하니 아진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너무 운다 싶어서 경고 차원에서 한 말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린린을 좋아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하려는 말은…… 우리는 단리서언이 황실을 전복하려는 걸 좌시하지 않을 거라는 겁니다. 단리서언의 명을 수행하고 함께 하는 자들은 다 함께 처리해야 할 거예요.”

    “그러니까 알아서 떨어지라는 말씀이네요.”

    “아뇨. 우리가 그럴 거라고 알려주는 거지 루주님에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아닙니다. 판단은 알아서 하시면 됩니다. 제 동생은 상관없다고 말해 놓고 뒤에서 슬퍼할 건 다 슬퍼하는 것 같아서 미리 말만 해 두는 겁니다.”

    설인정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패월악이 어떤 사람인지 자기도 안다는 듯한 웃음이었다.

    “제가…… 그분을 뵐 수 있을까요?”

    아진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동생에게 말을 해 두죠. 루주님에 대해서요. 그러면 동생이 보러 오겠죠. 사실 지금은 동생이 여기저기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어서 어디로 간다고 해도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를 믿으실 수도 없었을 텐데요……. 아니네요. 위험할 건 없을 테니까 말씀해 주시는 건 상관이 없었겠어요.”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설인정이 말했다.

    “저보다 먼저 그분을 보게 되면 말씀을 전해 주시겠어요? 감사하다고요. 돌아와 주셔서 감사하다고요. 그리고 정말 뵙고 싶었다고도…… 아니. 그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루주의 얼굴이 붉어졌다.

    소망이 없어 보이던 얼굴에 깊은 행복이 드리워졌다.

    “그러겠습니다. 제 동생도 루주님을 보면 반가워할 겁니다.”

    “주군께서 좋은 오라버니를 만나게 돼서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입니다. 주군께 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잘해 준 건 없는데…….”

    “주군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저를 찾아와 주셨잖아요. 그리고 하기 어려운 얘기를 해 주셨고요.”

    활짝 웃는 모습을 보면서 아진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

    얘기는 잘 통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인사를 하고 황궁으로 향했다.

    그곳에서의 일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 * *

    “역천마의. 저 사람들은 네가 처리하면 안 돼? 나 이 옷, 지금 막 갈아입었다? 계속 흙먼지에 꼬질꼬질해진 옷만 입고 있다가 이제 갈아입었는데.”

    “그렇게 말씀해 주시기만 기다렸습니다. 주군.”

    린린이 징징거리자 역천마의가 믿어만 달라는 듯이 앞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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