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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22화 (222/470)

제222화

222화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화친을 제의하십시오. 폐하. 대신 이번에는 확실하고 굳건한 약속을 해 주십시오.”

“확실하고 굳건한 약속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황제는 지난번에 황금 이천 관을 사용한 것을 떠올렸다.

급하게 그들의 발을 묶어 두기 위해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미봉책에 불과했다.

아진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법이 있는가 해서 물은 것이다.

“폐하의 후궁 중에 토혼과 토욕혼에서 오신 궁주님들이 계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 그들이 있다.”

황제는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보았다.

“폐하. 혹시 그분들을 좋아하시는지요.”

그러자 황제가 실소를 흘렸다.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아. 짐이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 좋아한 사람은 명빈 뿐이었다. 명빈도 결국 짐의 총애를 등에 업고 권력을 키워 나가려 애를 쓰며 짐이 알던 모습에서 점점 변해 버리기는 했지만. 그런데 그것은 왜 묻느냐.”

“그러면 그분들을 토번과 토욕혼으로 보내 드리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무슨 말이냐. 짐의 후궁이 된다는 것은 그들에게 큰 영광이니라. 이제 와서 그들을 돌려보낸다면 그것이야말로 두 후궁에게는 큰 오욕이 될 것이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냐.”

그는 진심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그럴 거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폐하께서 두 분을 황제의 누이에 봉하시고 돌아가는 길에 함께 해 주신다면 그런 오해는 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예. 폐하. 폐하께서 더 높은 곳에 계십니다. 그런데 그런 폐하께서 사신을 보내는 것도 아니고 직접 그분들과 동행해서 가신다면 토번과 토욕혼의 군주들은 폐하의 진심을 이해할 것입니다. 그들과 대립하는 것을 중단하고 서로 부족한 것을 돕는다면 더 큰 성장을 이룰 수도 있습니다.”

황제는 아진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 말을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염빈과 정빈.

그들은 각자 토번과 토욕혼 군주의 딸로 이른 나이에 시집을 와 외로운 시간을 버텨내고 있었다.

고향에서 함께 온 이들이 몇 명 있기는 했지만 타지에서 황제의 총애도 받지 못한 채 살아가면서 그들이 느낀 외로움은 상상 이상으로 컸을 것이다.

게다가 아진이 향화문을 통해 은밀히 입수한 사실에 의하면 그들에게는 각자 고향에 두고 온 정혼자가 있었다고 했다.

토번과 토욕혼은 화친을 위해 인질을 보내는 것처럼 두 공주를 보냈지만 그 후로 나라 간의 관계가 악화했고 언제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에 이르렀다.

다행히 정혼자들도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쪽에서 명예를 지켜 주며 돌려보낸다면 염빈과 정빈이 화해를 중재할 수도 있을 듯했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그래도 자신의 후궁이었던 이들을 보낸다는 것이 그리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동안 잠자리를 가진 것이 열 번도 되지 않고 자발적으로 자기가 찾아간 것은 그나마 세 번도 되지 않았기에 딱히 서운한 것은 없었다.

“다른 것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그렇게 함으로써 단리서언의 계획을 망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 그놈을 실망하게 할 수 있다면 그 정도를 못 하겠는가.”

만약 명빈이었다면 지금 아무리 마음이 식었다고 해도 도저히 그렇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염빈과 정빈에게는 마음을 정리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염빈과 정빈을 데려다줄 때 나와 함께 가겠느냐. 아진아.”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리서언이 그 기회를 놓치려고 하겠는지요. 기를 쓰고 이번에야말로 폐하를 공격하려 할 것입니다.”

“북진무사 일행을 공격한 것도 단리서언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구나.”

“그럴 것입니다. 구문제독부도, 동창도. 일을 그렇게 크게 만들 정도의 배포와 조직과 자금이 없습니다. 성공 가능성이 적은 일에 투입할 인재도 적고 말입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거겠지. 나도 비슷하게 생각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들이 손을 잡는다고 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어지간해서 손을 잡을 수는 없을 테고 말이다.”

황제는 말을 하다가 오래 생각에 잠겼다.

“우선은 그들에게 말을 해 보도록 해야겠다. 그래도 또 모르지 않느냐. 여기에 와서 사는 동안 짐을 연모하게 되었는지도.”

“…….”

아진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황제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아진을 노려보았다.

“왜 매사에 그렇게 불신이 가득한 것이냐. 짐 정도가 되면 어떤 사람이라도 애정을 느낄 만하지 않으냐.”

“…….”

아진은 꼭 자신의 의견을 표명해야 하는 자리는 아니라고 생각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짐이 무슨 말을 하겠느냐. 되었다. 나가거라. 짐은 이제부터 염빈과 정빈을 찾아다니며 그 일을 처리할 테니 내일이나 모레쯤 오너라.”

“예. 폐하. 저는 그동안 북궁세가에 가서 하월을 보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을 벌이려고 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되겠구나. 아진이 너라면 기척을 들키지 않고 정보를 모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황제는 잘 되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염빈의 처소에는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그것은 정빈도 마찬가지였다.

이민족.

그것도 적국.

그런 나라의 딸이라는 생각에 사람들이 미리 거리를 두었던 것이다.

다른 비빈에게는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유독 그들의 궁은 조용했다.

그곳의 궁녀와 태감들도 특별할 것 없는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황상이 그곳 궁에 발걸음을 하지 않은 것은 까마득히 오래전부터였고 이제 두 궁주는 어떤 기대나 희망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궁에 황상이 행차하는 것을 본 궁녀와 태감들은 그대로 까무러칠 뻔했다.

의복도, 태도도 불량하게 앉아서 떡을 나눠 먹고 있던 이들이 호들갑을 떨며 황상에게 예를 갖추자 황상이 피식 웃었다.

황상이 웃었다는 것은 저것들의 목을 모조리 치라는 말을 하기 전의 전조일 것이다.

그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면서 덜덜 떨었고 한 번만 살려 달라고 애걸복걸했다.

“염빈에게 짐이 왔다고 알리거라. 볕도 좋은데 함께 말이나 타러 가자고 하려고 들렀다.”

“……!”

궁녀와 태감들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궁에 들어온 지 꽤 되었지만 그동안 해 온 일이 정해져 있다 보니 황상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뭣들 하느냐! 지엄하신 황상 폐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느냐!”

그러다 그들은 황상을 모시는 태감의 추상같은 소리에 깜짝 놀라 낙엽이 휘날리는 것처럼 사라졌다.

“궁주님. 궁주님!!”

궁녀들은 염빈을 찾아 뛰어들어 갔다.

염빈은 안에 있다가 그렇지 않아도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끄러운 것이냐.”

“궁주님. 폐하가…… 폐하께서…… 이러실 때가 아니라……!”

궁녀들은 비로소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앞에 있는 염빈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황상의 방문을 받지 못한 후궁에게는 모든 긴장감이 사라져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황상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것을 저버린 것은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꼴이 너무 심한 게 아닌가 하면서 궁녀들은 이리 저리 뛰어다니며 분을 가져다가 발라 대충이라도 사람 몰골을 만들었다.

황제는 밖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염빈에게 미안한 마음을 크게 갖게 할수록 이 일은 성공 가능성이 컸다.

황제가 염빈에게 가겠다고 했을 때 그를 보필하던 이들은 염빈의 궁녀들만큼이나 놀랐다.

자기들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가 하는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황제에게 반문하는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일 것 같아 서로가 그렇게 의문 가득한 시선을 보내고 있을 때 황제가 다시 말했다.

“염빈의 처소에 들렀다가 그 후에는 정빈을 보러 갈 것이다. 그들과 함께 말을 타고 황도를 돌아볼까 한다. 오늘은 볕이 좋으니 오랜만에 그리 해 보는 것도 좋겠지.”

북진무사 일행이 공격을 당한 후에 외부 활동을 거의 하지 않고 있던 황제는 그날따라 이상한 말만 했다.

“좋은 말을 준비하거라. 아. 그리고 오늘은 구문제독의 호위를 받아야겠군. 금의위는 너무 못 미덥지 않으냐. 북진무사가 호위하던 마차에 짐이 없어서 화를 피한 것일 뿐 북진무사는 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이다. 마땅히 벌을 내렸어야 했는데 짐이 잊고 있었구나. 어쨌든 구문제독부에 알려 호위를 준비하도록 하게 하라.”

그렇게 벌어진 일이었다.

눈치 좋은 이는 몰래 빠져나가 정빈의 궁에 미리 가서 소식을 전해 두었다.

거기에서까지 황제를 기다리시게 한다면 기분이 좋은 듯했던 황제도 다시 날카롭게 변할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황제 폐하.”

준비를 마치고 나온 염빈은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며 황제를 바라보았다.

“염빈. 짐이 그동안 너무 무심하였구나. 날이 좋은 것을 보니 염빈이 떠오르더군. 그래서 함께 말을 타자고 왔다.”

“화…… 황제 폐하.”

“간 김에 뱃놀이를 해도 좋겠지. 풍등도 함께 날려 보겠느냐.”

“……폐하.”

염빈은 그가 왜 그러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감격스러웠다.

연모의 감정은 아니었다.

이미 궁에서 그 정도를 살아왔으면 그런 말랑말랑한 감정은 구경하려고 해도 찾아보기 어렵게 될 시기였다.

그래도 그동안 자신을 업신여기던 사람들의 앞에서 보란 듯이 황제의 곁으로 갔다.

황제가 그녀를 보고 웃었다.

“……!”

염빈은 자기가 지금 잘못 본 게 아닐까 하며 황제를 보았다.

그것은 염빈을 모시는 이들뿐만 아니라 황제를 보필하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황제를 수행하던 오십여 명의 궁인들이 모두 놀라서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비웃는 웃음도 아니고 오랜만에 본 것이 진심으로 반가워서 웃는 웃음 같았는데 어떻게 황제의 얼굴에 그런 표정이 지어지는 건지 궁인들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황제의 얼굴로 그런 웃음을 짓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이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그들은 오늘 참 여러모로 기이한 일들을 구경한다고 생각했다.

“햇볕은 좋으나 가끔 부는 바람이 쌀쌀하다. 겉옷을 하나 더 걸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다정하게 어깨에 손을 얹는 모습을 보며 염빈의 궁녀는 거의 쓰러질 뻔했다.

눈치 빠른 궁녀가 재빠르게 사라졌다가 피풍의를 들고 나타났다.

그들이 정빈의 궁으로 갔을 때 정빈은 준비를 마친 채 안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리 소식을 들은 것처럼 나와 있지는 않고, 황제가 찾아온 것을 뒤늦게 안 것처럼 급히 나와 맞았다.

“정빈. 오랜만에 보게 되니 기쁘구나.”

황제는 염빈에게 했던 것과 비슷한 말을 했고 정빈은 염빈에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려 달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염빈 역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살짝 고개를 젓기만 했다.

날씨가 좋아서 후궁들을 전부 데리고 말을 타러 가자고 하시는 건가 했지만 찾은 사람은 그들 둘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바로 궁을 나가는 것도 아니고 이곳저곳을 함께 거닐었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그 모습을 보이려고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염빈과 정빈은 감격스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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