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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21화 (221/470)
  • 제221화

    221화

    린린만이 어렴풋이 위도의 감정을 알아차렸다.

    “오라버니하고 비교하려고 하면 한도 끝도 없어요. 오라버니는 그냥 괴물이에요. 그러니까 나하고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지 않으면 못 견뎌요.”

    갑자기 린린이 그 말을 하자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서서히 위도가 왜 그렇게 정신이 없어 보이는지 깨닫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서 소협께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포기해 버렸는데. 우리는 포기하는 게 훨씬 쉬웠죠. 지존이 꼼짝을 못 하시는데 감히 우리가 뭘 어쩌겠냐고 생각했거든요.”

    역천마의가 시원스레 말하자 린린이 눈을 흘겼다.

    “꼼짝을 못 하긴 누가 꼼짝을 못 해? 기 펴고 살라고 그냥 봐주는 거지.”

    린린이 말했지만 그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아직 할 얘기가 남은 것 같았지만 아진은 계속 그들의 말을 들어줄 시간이 없었다.

    그는 북리의천에게 황제의 황금패를 건네고 가장 먼저 그곳을 떠났다.

    그러자 린린이 마두들을 소집했고 북리의천은 소청을 챙겼다.

    뇌혈검은 위도의 곁으로 왔고 위도는 심호흡을 했다.

    그들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 이곳 산본의가였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하고 큰일을 하러 가는 이들이 가장 걱정하는 곳이 산본의가인 것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어떤 결정이 이루어졌는지도 알지 못한 채 곤한 잠을 이루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새벽같이 일어나 진료를 준비하고 의가로 찾아드는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할 터였다.

    위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맡기에는 너무 중대한 일인 것 같았지만 어차피 이제는 다른 방법도 없었다.

    다들 자신을 믿고 떠나 버렸으니 이제는 우직하게 버티고 모든 공격을 제 몸으로 막아 내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래. 다 덤비라고 해. S급 탱커 조 위도가 나다!’

    그는 실로 오랜만에 자신의 전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북리의천이 고심 끝에 여러 가지 심법 중에 골라서 가르쳐준 심법은 위도의 몸을 전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바꿔 놓았다.

    북리의천은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탁기는 처음 봤다면서 신기해했고 위도는 몸에 끼인 엄청난 양의 때를 들키고 그 때를 다 밀리는 사람처럼 창피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 순간은 길지 않았고 인내의 보상은 달콤해서 지금의 위도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몸으로 바뀐 채 열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 * *

    아진이 올 즈음 황제는 선이남과 함께 있었다.

    선이남이 아침 일찍 탕약을 가지고 황제를 찾는 것은 누구에게도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선이남은 황제가 먹는 모든 것을 직접 관리했다.

    가짓수가 지나치게 많을 필요는 없지만 안전한 식재료가 안전한 방법으로 안전하게 조리되는 것을 일일이 확인했던 것이다.

    선이남과 황제가 모두 내공을 가지고 있었기에 음식에 독이 들어 있어도 내공으로 그것을 어느 정도 해독하는 것도 가능했고 만에 하나 내공으로 해결할 수 없는 독이 체내에 들어온다면 제선문주가 직접 제조해서 보내준 해독제를 먹어도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모든 과정을 선이남이 직접 관리함으로써 황제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과정을 사단에 차단하려 하고 있었다.

    북진무사가 돌아와서 기습당한 사실을 보고한 후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하면서 모두 길길이 날뛰며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했다.

    북진무사와 아진의 목을 요구하고 나섰던 것이다.

    황제는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을 바라보고 웃다가 그들을 가두었다.

    -짐이 죽음을 피해 상심이 큰 듯하니 감옥에서 화를 가라앉히도록 하라.

    -폐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짐의 수급을 내놓으라 요구하면서 충심까지 가장하다니 너무 뻔뻔한 것이 아니냐. 하나만 하여라. 하나만.

    황제는 생각만큼 일을 키우지는 않았지만 다른 식으로 변화를 모색했다.

    그 결과 선이남이 그의 모든 활동에 함께 하게 됐던 것이다.

    황제는 선이남이 가져온 탕약을 아무 말 없이 마셨다.

    오랫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러는 것은 이제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동창과 모종의 밀약을 맺은 밀영들은 황제가 말없이 있는 동안 선이남과 전음을 나누고 있는 거라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채 황제의 생각이 복잡해서 그런 거라고만 생각했다.

    -아진과 얘기를 나눠 봐야 할 것 같다. 선 부정. 남이천을 보내 아진을 데려오게 하라.

    -예. 폐하.

    -그래도 이럴 때 남이천이 옆에 있어 주어 든든하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향화문에서 다녀갔습니다. 북궁세가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포착됐다고 합니다. 세가에서 나오는 일이 없던 하월 공자가 나왔는데 웬 수상한 마차를 타고 홍성루로 갔다고 합니다.

    -홍성루?

    황제는 놀라운 얘기를 듣고도 표정을 능숙하게 감추었다.

    -예. 향화문에서 잠복을 한 끝에 그곳이 천마신교와 연관된 곳이라는 것을.

    -그래. 기억하고 있다. 신교가 관리하는 기루였지.

    -예. 폐하. 그리로 같이 들어간 사람이 신교 내에서도 지위가 높은 사람인 것 같다는 것이 향화문의 보고였습니다. 잘못 하면 자기들의 기척을 눈치챌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이상의 첩보 활동은 포기했다고 합니다.

    -잘했군.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까지 알아내려고 했다면 위험해졌을 거야. 그럼 거기까지는 들키지 않은 건가?

    -정확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만 그런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 당분간 북궁세가와 북궁천영의 움직임을 주시해야겠군.

    그러다가 황제가 조용히 웃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혼자서 생각을 하다가 재미있는 일이 떠올라 웃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북궁천영이 하월을 황후의 태감으로 만들려고 했었다지. 그렇게 해도 좋았을 텐데 그랬으려나? 아! 북궁천영을 태감으로 만드는 것도 좋겠어. 확실히 재미있겠군.

    선이남은 깜짝 놀라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도 의원으로 잔뼈가 굵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게 됐지만 그 말에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 버렸던 것이다.

    -선 부정. 표정 관리가 이렇게 안 되어서야. 아직 나를 따라오려면 한참 멀었군.

    -송구합니다. 폐하.

    -이제 나가서 남이천을 아진에게 보내도록 해.

    -예, 폐하.

    그러나 선이남은 남이천을 보낼 필요가 없었다.

    그 전에 아진이 황제를 찾아왔던 것이다.

    아진은 황제와 조용히 만나기 위해 황제가 침소에 혼자 들어가는 시간을 골랐다.

    황제는 북진무사 일행이 공격을 받은 후 여러 이유를 들어 밀영들에게 자신과 거리를 두도록 명했고 밀영들이 함께 들어오지 못하는 영역을 점점 넓혀나가고 있었다.

    그래도 밀영이 자신을 감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완전히 마음을 놓지는 않았는데 기감을 펼쳐 밀영들의 기척을 느끼는 것이 점점 능숙해져서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붙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아진아.”

    황제가 환한 얼굴을 하고 그를 맞이하자 아진 역시 그에게 밝은 얼굴로 화답했다.

    “평안하셨습니까, 폐하.”

    “짐이야 너로 인해 늘 평안하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보다 북궁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느냐.”

    “폐하를 뵙기 전에 이남 형님을 먼저 보았습니다. 형님에게 들었습니다.”

    “그렇구나.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북궁천영이 하월을 태감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던 사실을 알고 있느냐.”

    황제는 그 일이 너무 재미있어서 아진을 보면 꼭 얘기해 주려고 벼르고 있었다.

    “정말입니까? 아무리 그래도 자기 동생인데…….”

    그러나 아진은 곧 그들 사이에서 그런 말은 별로 의미가 없겠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먼저 손을 쓴 사람은 하월이었다.

    북궁마영을 죽인 것이 그였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말하며 아진이 모르는 정보들을 전부 채워 주었고, 아진은 제선문주와 역천마의가 영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나도 들어서 알고 있다. 혈천방주와 비룡채주에게 영약을 복용시켜 준 것은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 황제는 그들을 완전히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 아진도 흐뭇하게 웃었다.

    “폐하. 폐하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천마신교주 단리서언에 대한 것입니다.”

    아진은 단리서언이 이민족들을 충동해 황실을 위기에 빠뜨릴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런 일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가능성을 열어 두고 있던 황제였지만 아진이 하는 말은 큰 충격이었다.

    설마하니 단리서언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벽예월이 천기를 보고 한 말이라는 얘기를 듣고 그 말을 믿었다.

    “그래도 아직 희망은 있는 것 같습니다. 폐하. 벽 소저가 알려 준 것은 단리서언의 계획이지 그 일이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확언은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구나. 그러면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 아진아.”

    “스승님께서 항주의 왜구를 토벌하기로 하셨습니다.”

    “검신이 말이냐. 고마운 일이구나. 항주에 있는 왜구에 대해서는 짐도 여러 차례 얘기를 들었다. 그곳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초가 크다는 말을 듣고 장군들에게 군사를 주어 토벌을 하도록 명한 적도 있었다만 번번이 실패했다.”

    “왜구와 밀착이 된 자들이 먼저 정보를 흘리고 내부에서 왜구를 돕는다면 토벌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 짐도 그리 생각했다. 토벌을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다시 시도하는 것이 어려워서 그 일이 매번 흐지부지되다가 종국에는 지금에 이르렀구나.”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군사를 내주겠다. 검신이 혼자 싸우는 것보다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불순한 것이 끼어 있다면 그 도움은 받지 않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스승님께서는 정의맹하고만 함께 하시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소수 정예로 하는 것이 승산을 높일 방법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긴. 검신이라면 믿어 볼만도 하지.”

    황제는 적은 수의 정의맹 무인들이 왜구의 본거지를 들쑤시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

    “그래도 만일을 위해 폐하께서 저에게 주셨던 황금패는 스승님께 드렸습니다.”

    “그랬구나. 잘하였다. 그렇지 않아도 나도 지금 막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밤이 깊도록 계속되었다.

    “단리서언이 충동할 이민족은 토번과 토욕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들과 함께 왜구까지 준동한다면 황군이 전부 다 막기에는 벅찰 것입니다.”

    “…….”

    황제는 아진의 말을 들으면서 분을 참느라 애썼다.

    단리서언이 황실을 능멸하고 아예 무너뜨리기 위해 그런 계획까지 세웠다는 사실에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황군의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각자 자신들의 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황제는 토번과 토욕혼의 공격에 방비하기 위해 병력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생각하며 말했다.

    “폐하. 싸움을 일으키려는 것은 단리서언의 생각입니다. 하지만 전쟁을 일으키면 토번과 토욕혼에도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두 곳의 군주는 성정을 베푼다고 알려진 자들입니다. 무리한 전쟁은 그들도 원하지 않을 것입니다.”

    “단리서언이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런데도 국경을 치도록 충동질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 아니냐.”

    “예. 폐하. 하지만 단리서언이 그들을 찾아가 회유할 때 그들이 미리 그런 상황에 대비할 수 있으면 어떻겠습니까.”

    아진의 말에 황제가 그를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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