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9화
219화
천마신교에 대해서 그동안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직접 알 기회는 많지 않았다.
하월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가주의 머리에서도 생각이 분주하게 돌아갔다.
그는 갑자기 나타나 엄청난 돈을 주고 간 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문서에는 평범한 상회의 회주 이름이 적혀 있었지만 그가 느끼기에 그것은 대리로 내세운 사람일 뿐인 듯했다.
비밀에 휩싸인 남자가 무슨 이유로 하월에게 접근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일단은 숨통이 트였고 가주는 괜한 걱정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이런 삶이 당연하게 주어졌을 때는 몰랐는데 뺏겼다가 다시 주어지니 이게 얼마나 소중한지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아버님께 드리지 못한 말씀이 있었는데 어제 형님이 저를 부르셨습니다. 이 일을 해결할 방법이 있기만 하다면 형님은 소가주의 자리를 탐하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어차피 자신은 구문제독이기도 하고 북궁세가를 동시에 잘 다스릴 자신은 없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가주는 처음 듣는 얘기였기에 하월을 바라보았다.
천영이?
그는 속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영은 절대로 그럴 아이가 아니었다.
벅차다고 하더라도 그 자리를 결코 하월에게 넘길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제가 그 돈을 마련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기는 하겠지만 어쨌건 그 말은 사실입니다. 형님이 혈판장을 만들어 주셨으니 집으로 돌아가서 그것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혈판장까지?”
가주는 정말 놀라서 물었고 하월은 그렇다고 확언했다.
“소가주라는 것은 개인이 포기하고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고 해서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본가의 소가주라는 자리는 더더욱 의미가 깊지. 너희 두 사람이 합의했다고 해도 네가 자격을 갖췄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지 않으면 그 자리를 너희끼리 거래할 수 없다.”
하월은 가주를 보았다.
쉽게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더니 진짜 여우는 가주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께 돈을 좀 더 빌려 달라고 할까? 이게 한계였으면 어떻게 하지? 그래도 나를 한 번 정도는 더 부르시겠지?’
하월은 일단 단리서언을 만나야 이 일의 마무리를 지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 * *
마차는 한가롭게 황성의 관도를 달렸다.
황성의 경비 무사들은 긴장이 풀리지 않은 채 제법 눈에 힘을 주고 지나다녔다.
단리서언은 그 모습을 보면서 코웃음을 쳤다.
‘지금 그러고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뭔지 네놈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거다. 너희가 아무리 철저하게 방비를 한다고 해도 너희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은 얼마 되지도 않지. 하늘에서 벼락이 쏟아지면 이리저리 흩어져서 비를 피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말이다.’
단리서언이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의 곁을 따르는 천왕들은 서로 전음을 주고받았다.
-사형. 지존께서 왜 갑자기 만전에 돈을 주신 건지 아는 것 있소?
-나도 모른다. 지존께서 언제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일일이 설명하고 하셨냐?
-그런데 왜 만전인지 모르겠소. 거기는 그냥 놔두면 알아서 저절로 망할 곳이었는데 말이오.
-나도 안다. 그래도 지존께 필요한 일이었으니 그랬겠지.
-그런데 그것 말이오. 얼마나 오래 갈 것 같소?
그것이란 그들이 만전에 준 황금을 말함이었다.
궤짝에 있던 황금 사만오천 관은 진짜가 아니었다.
도금을 한 것도 아니고 술법으로 그 모습을 바꾼 것뿐이었다.
그래도 허술하게 만든 술법은 아니어서 적어도 달포 정도는 사람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그 시간 동안 황금이 이리저리 많이 돌아다녀서 도중에 누가 바꿔치기를 한 건지 걸리지 않기만을 바랐다.
-지존께서 하신 말씀 못 들었냐? 그 일이 터질 때는 아무도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을 거라고 하셨잖아.
-그러게 그게 무슨 일일까요?
-난들 아냐? 지존께서 말씀해 주지 않으셨는데.
그들이 전음을 주고받는 동안 말들은 딸각딸각 소리를 내며 유유히 관도를 빠져나갔다.
* * *
지극히 평화로운 날의 연속이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평범하고 평화로운 날이 계속되면 뭔가 재미있는 일이라도 하고 유흥거리라도 만들까 궁리를 할 테지만 아진은 그러지 않았다.
평화로운 시기는 전시를 대비할 수 있는 유일한 시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약은 성공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제선문주와 역천마의가 감격스러운 표정을 하고 영약을 만들었다고 했을 때 그 사실에 크게 놀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선문주만 있어도 그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일 것 같은데 거기에 역천마의까지 가세했다면 못 만드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제선문주와 역천마의는 이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거나 실력 발휘를 할 때는 앞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래 봐야 너무 늦은 깨달음이었다.
아진은 영약을 복용시키기 위해, 황도로 가 있던 혈천방주와 비룡채주를 다시 불러들였다.
선이남과 남이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처럼 산본의가를 대표해서 황도에 가 있는 사람들은 전부 소집되어서 영약을 복용했다.
영약은 만드는 방법도 까다롭고 약재를 구하는 것도 어려워서 명문세가나 거대 문파에서도 몇 알 보유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직접 영초를 구할 수 있는 사람과 그것으로 영약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함께 있다 보니 몇십 개는 기본적으로 만들어졌다.
몇십 개라고 해 봐야 영약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수에 비하면 충분하다고 할 수 있는 양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전선을 담당하는 사람들에게 우선하여 배분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아진은 그들 각 사람에게 진기도인을 해 주었고 그 덕에 영약의 공력은 조금도 손실 없이 무인들에게 들어갔다.
혈천방과 비룡채의 사람들도 산본의가를 돕는 동안 약초를 구해다 주고 의가를 들락거리며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있어서 인체의 혈도에 대해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때 도움이 되었다.
기혈을 타통하라고 하면 어떤 식으로 공력을 움직여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머리에 그려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영약의 복용을 끝낸 이들은 다시 황도로 돌아갔다.
그들은 이제야말로 진짜 싸움이 시작될 거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무관에 임관했다고 우쭐해서 잘난 척을 할 틈도 없었다.
그들 모두는 아진에게 이미 몇 가지 경고를 받은 상태였다.
피할 수 없는 천마신교와의 일전.
그동안 상대해 본 적 없던 단리서언이라는 인물.
그가 사용할 거라고 추측되는 여러 가지 계획에 대해서까지 말을 해 주자 감히 바람이 들어 있을 수가 없었다.
단리서언이 사용하려는 방법은 상상을 초월했다.
국경 지역의 평화를 깨뜨릴 거라니.
그래서 전쟁을 일으킬 거라니.
아진은 그 후에도 몇 명의 무인에게 무공을 전수하고 영약을 복용시켜 준비를 시켜두었다.
그러는 동안 머릿속으로는 단리서언이 어떤 식으로 작전을 세울지 그것을 예상하느라고 바빴다.
오히려 린린은 그 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단리서언? 섬전대주? 글쎄. 나는 잘 모르겠는데? 나는 그런 자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잘 몰랐거든. 내가 어디 돌아다닌다고 그런 자를 데리고 다닌 것도 아니라서.
그런 말이나 듣자고 물은 것은 아닌데 린린에게 나오는 말은 그런 식이었고 그때마다 아진은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나마 역천마의와 다른 마두들이 함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역천마의와 경비 무사, 그리고 섬전대원들.
그 세 부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단리서언은 각각 차이가 있었다.
역천마의는 단리서언에 대한 혐오감을 그 누구보다 강하게 갖고 있었다.
그녀는 단리서언을 찢어 죽여 버리고 싶지만 그래도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비 무사들은 단리서언을 두려워했다.
그것은 미지의 존재를 향한 두려움 같은 거였는데 단리서언에게는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무인은 힘을 전부 다 드러내고 싸워서는 안 된다는 말이 있는데 단리서언은 자기가 가진 힘의 오 할도 전부 다 드러내지 않은 것 같다는 게 그들의 말이었다.
그리고 단리서언이 드러낸 오 할만 가지고도 단리서언은 천마신교의 조사(祖師)와 패월악을 제외하고 천마신교 역사상 가장 강할 거라고 했다.
섬마대는 경비 무사들과 또 다른 관점에서 단리서언을 보았다.
교주의 명령에 따라 교주만을 위해 존재하는 섬마대는 다른 사람들보다 교주를 가까이에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특히나 단리서언의 성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줄 수 있었는데 그들이 말하는 단리서언은 천재였다.
거기에는 단리서언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는 점도 한몫했는데 그것 때문에 단리서언이 실수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이 반역을 꿈꾸고 있어도 단리서언은 그걸 알 수 있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그곳에 있는 누구도 단리서언을 교주나 천마라고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교주와 천마는 패월악이자 린린이었기에 단리서언을 교주나 천마라고 하는 것이 그녀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진은 그들과 수도 없이 토의했다.
가끔 향화문주 짱돌과 북리의천, 그리고 소청과 위도가 그 자리에 함께했다.
그 모임이라면 이제 아진의 최측근 중 최측근이라 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거기에 위도가 끼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지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은 아직 S급 탱커의 위력이 어떤 건지 볼 기회가 없었지만 아진은 위도의 존재가 단리서언까지도 당황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 많았다.
위도는 비무가 금지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아진이 데려온 위도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 아진은 위도의 비밀을 지켜 주었다.
아진이 그런다는 것을 알고 사람들도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아진은 위도를 개인 연무실로 데려가서 그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위도가 그동안 마구잡이로 익혔던 무공을 하나하나 다 바로잡아 주었다.
그 일에는 북리의천이 투입되기도 했고 소청도 자기가 배운 것을 열심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위도가 그것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됐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는 린린을 투입해서 천마신공까지 일부 전수했다.
린린은 아진에게 위도에 대한 얘기 즉, 위도가 자기와 같은 세계에 살던 사람이라는 얘기를 들은 후부터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마치 다른 대륙에서 와서 그곳에서는 생전 처음 보는 동물을 보는 것 같은 호기심이었다.
위도는 그런 표정이 달가울 리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일단 이곳으로 온 이상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겠다고 생각하며 열심히 그 일에 매달렸다.
그를 가르친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말은 위도처럼 습득과 성취가 느린 사람은 처음 본다는 거였다.
살상을 목표로 하는 무공에서만큼은 유독 위도의 힘이 제대로 나오질 못했다.
경공이나 허공섭물 같은 것은 해내면서도 공격력은 제대로 나오지 않고 그에 비해 호신강기만큼은 엄청나서 위도는 종종 사람들을 혼돈에 빠뜨렸다.
위도의 자세가 엉성하다고 생각하며 방심하고 달려가 전력으로 검을 휘두른 사람이 기함하고 검을 떨어뜨린 채 제 팔을 잡고 주저앉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