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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18화 (218/470)
  • 제218화

    218화

    작금의 북궁세가는 벼랑 끝에 내몰렸다는 말이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만전의 빚을 갚고 예치금도 채워 두겠습니다. 형님이 말씀하신 그 금액입니다.”

    “……!”

    북궁천영은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한 것이냐!”

    그때는 더럭 겁까지 났다.

    “세가를 위한 일입니다. 제가 어떤 희생을 했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형님도 희생해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황금 사만오천 관에.”

    하월은 일부러 뜸을 들였다.

    “북궁세가의 소가주 자리를 파십시오.”

    “…….”

    북궁천영은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네가. 드디어 미쳐 버린 것이구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르고 말입니다. 그래도 그 말로 대답을 회피하려고는 하지 마십시오. 답을 들어야겠습니다. 그게 아니면 내일 만전에 나갈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북궁천영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월은 종잡을 수 없는 놈이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누구를 만나고 온 건지는 모르지만 뭔가 방법을 찾았는지도 모른다.

    ‘소가주 자리를 넘기라고?’

    웃기는 말이었다.

    주워다 키웠더니 어디서 주제도 모르고!

    당장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북궁천영은 꾹 참았다.

    우선 그러겠다고 약속을 해 주고 나서 내일 일이 어떻게 되는지 봐도 될 것이다.

    “알았다.”

    북궁천영이 그렇게 순순히 허락하는 것을 보며 하월도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있었다.

    내일 가봐서 상황을 보고 결정을 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리라.

    처음에는 말을 들어 주는 척하다가 나중에 가서 없던 일로 돌리려고 하는 수작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월은 북궁천영에게 순순히 속아주는 척했다.

    “혈판장이라도 써 주련?”

    북궁천영은 조롱하는 의미를 명백히 담아 말했다.

    “그렇게 해 준다면야 좋겠지요.”

    “좋다. 해 주마. 못 해 줄 것도 없지.”

    북궁천영은 네놈이 얼마나 건방을 떠는지 보자는 듯 끝까지 하월을 노려보며 혈판장을 만들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형님. 불민한 아우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부디 평안한 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밉살맞게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을 보며 북궁천영은 도대체 그 꿍꿍이가 무엇일까 생각했다.

    * * *

    아침이 밝고 북궁천영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만전으로 가기 위해 채비를 서둘렀다.

    막대한 빚만 떠안고 있던 만전은 정상적인 영업도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날은 달랐다.

    일찍 그곳으로 간 사람들이 손님을 맞기 위해 분주하게 굴었다.

    정말 그 사람이 온다는 건가 하면서도 일단은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단리서언은 오후 늦게 그곳에 나타났다.

    그가 그렇게 늦은 이유는 다른 사람들을 긴장하게 하려고 그런 것 같았다.

    단리서언이 나타날 때까지 그를 기다리던 사람들은 정말 단리서언이 나타나는 걸까 하면서 문이 열리기만을 뚫어지라 지켜보았다.

    하월이 하는 말만 믿고 그 자리에 나와 있는 것에 자조하는 이도 있었다.

    북궁천영은 오래 기다리지 못하고 돌아가야 할 처지여서 도중에 나갔지만 가주와 세가의 무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하월의 곁에서 단리서언을 같이 기다렸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그를 기다렸다고 해도 하월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월은 단리서언이 나타날 때까지 가슴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갑자기 나타난 희망이었다.

    다시 꿈꾸는 것이 불가능해졌을 때 나타나서 꿈을 꾸게 한 사람.

    다시 생명을 준 것이나 다름없는 사람인데 그대로 꿈처럼 사라져버리는 건가 해서 하월은 그 시간을 참는 것이 그렇게 힘들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단리서언은 저녁이 되기 전에 그 자리에 나타났다.

    세가의 무인들은 가주의 명령에 따라 몇 번이나 안팎을 오고 갔다.

    그러다가 밖에 나갔던 이가 급하게 돌아오며 사람이 오고 있다고 다급하게 소리쳤다.

    단리서언은 그 후에 들어왔다.

    함께 온 이들의 기세가 모두 대단했다.

    세 명의 남자와 여자 한 명이었는데 모두가 엄청난 무공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그들에게서 마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가주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절정의 초입이어서 초절정의 중반에 넉넉히 들어선 그들의 마공을 느끼지 못해서였다.

    게다가 단리서언이 한 번 더 그들의 마기를 감췄다.

    그래서 웬만한 사람이라면 마기를 느끼기가 쉽지 않았을 터였다.

    “오셨군요.”

    하월은 벌떡 일어나 단리서언에게 다가가 그의 앞에서 포권을 취했다.

    그러나 단리서언은 하월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그와 함께 온 사람들은 눈만 굴려서 하월을 보았다.

    꼭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었지만 하월은 거기에 대해 조금도 불만이 없었다.

    그들에게 어떤 대우를 당한다고 해도 그동안 북궁세가에서 당해 온 서러움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주가 누구시오.”

    단리서언은 앞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러자 하월이 황급히 그들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단리서언과 일행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는 것을 보며 가주가 그들을 응대했다.

    “전장의 일은 임시로 내가 보고 있소. 나에게 말을 하면 되오.”

    단리서언은 무심한 얼굴을 한 채 곁에 있던 이들을 보았다.

    한 남자가 일어서더니 밖으로 나가 몇 번에 걸쳐 궤짝을 날랐다.

    “안에 있는 것을 직접 확인해 보시오.”

    “…….”

    가주는 궤짝 안을 확인했다.

    궤짝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황금 만 관이었다.

    궤짝의 수만 해도 엄청났다.

    처음에도 놀랐지만 그 놀라움은 여간해서 끝이 나지 않았다.

    황금 만 관이 들어 있는 궤짝을 혼자서 들 수 있다는 사실도 대단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경악한 얼굴로 단리서언 일행을 보았다.

    다른 이들의 얼굴이 그렇게 변해갈수록 하월은 자기가 대단한 일을 하기라도 한 것처럼 흐뭇하게 웃었다.

    “황금 사만오천 관이오. 만전의 빚이 사만 관이라고 들었소. 사만 관으로 빚을 갚고 오천 관은 예치해 두시오. 다른 것에 앞서 우선 빚부터 갚으시오. 시간이 지나면 하루 치의 이자가 더 붙게 될 테니.”

    “…….”

    가주는 이게 다 무슨 일인가 하면서도 그 돈을 정말 받아도 되는 건지 알지 못했다.

    배가 고프다고 독을 집어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가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다 알고 있다는 듯 단리서언이 그를 보았다.

    “나는 하월 공자를 믿고 이 돈을 주는 것이오. 이 돈을 어떻게 쓰든 거기에는 어떤 대가나 조건도 없소. 나는 하월 공자에게 이 돈을 주는 것이고 하월 공자의 뜻에 맞게만 쓰면 아무 상관도 없소.”

    “빌려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주는 거라는 말입니까…….”

    가주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

    “그냥 주는 게 맞소. 나는 하월 공자를 믿소.”

    “…….”

    “그러면…….”

    가주는 단리서언이 그것을 말로만 하지 않고 문서로 작성해 주기를 바랐다.

    단리서언은 그가 뭘 바라는지 안다는 듯이 웃음을 지었다.

    “좋소. 이런 것은 확실하게 하는 것이 좋지.”

    단리서언이 말을 하고 지필묵을 가져오게 해서 그 자리에서 문서를 적어 주었다.

    단리서언은 종종 생각하곤 했다.

    무인에게 이런 문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고.

    문서를 뺏어서 불태워 버리는 것이 정말 어려울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걸까?

    그러나 단리서언은 문서가 사람들의 마음을 얼마나 흐물흐물해지게 만드는지 알고 있었고 기꺼이 그것을 만들어 주었다.

    가주는 감격한 표정으로 그것을 보더니 사람들을 시켜 돈을 갚고 오도록 했다.

    각자 자기들이 맡은 곳을 향해 궤짝을 가지고 갔다.

    궤짝을 들 때, 처음에 단리서언의 일행이 가지고 온 것처럼 자기들도 간단하게 들고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몇 명이 달라붙고도 궤짝을 조금도 움직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른 궤짝을 가져다 조금씩 나눠 담았다.

    단리서언은 경멸하는 시선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내가 이런 것까지 봐야 할 것 같지는 않고. 그럼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

    “정말…… 이대로 가십니까.”

    하월이 아쉽다는 듯이 말했다.

    그는 단리서언이 자기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황상을 쓰러뜨리기 위해 건재하는 전장이 하나 필요해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그런 거라면 단리서언이 직접 만들면 될 터였다.

    자기를 전면에 내세우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거라면 단리서언이 전장을 만들고 거기에 하월을 허수아비처럼 세울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터무니없이 많은 돈을 들여 만전을 회복시켜 주었다.

    ‘만전을 쓰러뜨린 자들에게 겁을 주려고 하는 건가?’

    하월은 오랫동안 생각하고 여전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단리서언은 하월이 하는 말에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곳을 나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단리서언의 기세가 워낙 대단해서 그랬지 다른 이들도 하나하나의 기세가 엄청났다.

    그들이 나가고 나자 사람들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이제야 살았다는 안도감. 그리고 이게 다 무슨 일이냐는 놀라움.

    그런 감정이 대기를 가득 채웠다.

    “하월아. 저분은 누구시냐. 저 은공은 네가 어떻게 아는 분이냐.”

    가주의 목소리는 어느덧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하월은 가증스러운 마음을 뒤로하고 만전의 곳곳을 보았다.

    ‘영업을 시작하라는 거지.’

    하월은 가주의 비위를 맞추고 그의 궁금증을 풀어 주는 대신 만전의 돈으로 영업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전장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습니까.”

    가주가 한 말은 간단히 무시해 버린 채 하월이 묻자 그 곁에 있던 이가 하월에게 대답을 해 주었다.

    “전장은 산본전장이 우세합니다. 막대한 대금을 바탕으로 돈을 빌려줄 때는 연 1할대의 낮은 이율로 돈을 빌려주고 돈을 맡기면 연 3할의 이자를 쳐 준다고 합니다. 이자가 높다 보니 너도나도 돈을 맡겨서 산본전장에 있는 돈이 상당할 것입니다.”

    하월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산본전장이 가지고 있는 돈이 전부 얼마쯤 될 것 같습니까.”

    “그게 얼마나 되는지는 모릅니다. 그래도 한 곳에서 융통할 수 있을까 하는 큰돈을 산본전장에서 모두 빌려주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황도에 새로 생긴 기루를 지을 때 루주가 산본전장에서 돈을 빌렸는데 공사를 하는 8개월 동안 황금 삼천 관이 넘게 빌려 썼다는 것 같았습니다.”

    전장의 조건은 이율이다.

    그리고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안전성이다.

    전장에서 돈을 찾아 나가다가 도적에게 뺏기기라도 한다면 그 전장을 이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을 텐데 산본전장만큼 안전이 확실히 보장되는 곳도 없었다.

    전장 앞에 여러 대의 수레와 마차, 말이 준비되어 있었고 전장에 상주하는 무인들이 돈을 빌리러 온 사람들을 직접 데려다 주곤 했는데 큰돈을 옮기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을 아주 좋아했다.

    전장의 무인들이 나서주지 않는다면 자기들이 사람을 구해와야 하는데 전장의 무인들이 직접 그 일을 해 주니 그 자체로도 돈이 굳는 거였다.

    더군다나 산본전장의 무인들은 다른 상인들이 구할 수 있는 사람들과 무위의 수준 자체가 달랐다.

    황도에 무인이 들어오는 것은 철저히 관리가 되고 있지만 전장의 무사는 표사처럼 한층 완화된 조건이 적용되었다.

    무인은 무인이지만 무인에게 적용하는 것을 꼭 전부 적용하지는 않겠다는 불문율 같은 것이 지켜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만 보더라도 산본전장이 황상의 비호를 받는다는 말이 꽤 설득력을 얻었다.

    황금 오천 관이 생겼다지만 그것으로 전장 영업을 공격적으로 해 나가는 것은 무리였다.

    단리서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보다 더 빌려주는 건 무리였나?’

    하월은 아쉬워하면서 그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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