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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 의선되다-216화 (216/470)
  • 제216화

    216화

    황상이 탔어야 할 마차가 공격을 당했다.

    천우신조로 직접 공격을 당하는 것은 피했지만 황상의 마차가 공격을 당했다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다.

    ‘누가 그런 걸까. 동창? 아니면 구문제독이나 북궁세가? 구문제독이나 북궁세가는 이미 그런 일을 할 힘을 잃었을 텐데? 그러면 동창인가?’

    아진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져 가고 있었다.

    * * *

    황제가 황궁을 비운 동안, 북궁세가의 심처에서 갇힌 듯 지내던 하월에게 어느 날 사람이 찾아왔다.

    가주와 북궁천영은 당장이라도 하월을 잡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가 일으킨 손해가 너무 커서 하월을 담보로 어떻게든 손해를 만회해야 한다는 생각에 참고 있었다.

    심지어 북궁천영은 하월을 황후의 태감으로 들여보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잘만 하면 환관들의 분위기를 알아올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며 진지한 계획인 것처럼 말을 할 때마다 하월은 소름이 끼쳐 벌벌 떨었다.

    태감이 무엇인가.

    하월은 고작 그깟 한 가지 실수를 했다고 자신의 남성을 제거해 버리려는 북궁천영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제가 북궁마영에게 저지른 일에 비하자면 그건 양호한 편에 속했지만 하월은 원래 그렇게 따져가며 생각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마음을 잘 먹도록 해라. 너만 하면 황후 폐하의 심기를 잘 살필 것이고 금방 태감 중에 위로 올라갈 것이다. 그 일을 나쁘게만 생각할 것은 아니다. 네깟 놈이 그걸 가지고 뭘 하려고 하느냐. 네놈이 북궁세가를 이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고. 그런 놈에게 그것이 뭐가 그리 중하다는 말이냐.”

    북궁천영의 폭언은 그 후로도 한동안 계속됐다.

    “여러 말 할 필요 없다. 그 잘난 머리를 굴려서 만전의 빚을 모두 해결하고 황금 오천 관을 예치해 두어라. 그러지 못하면 황후 폐하의 태감이 되는 것이다. 황후 폐하의 태감도 아무나 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나나 되니까 특별히 힘을 써 주겠다는 것이다.”

    북궁천영은 아예 날짜까지 못을 박아두었다.

    만전의 빚을 해결하려면 황금 사만 관이 넘는 돈이 필요했다.

    황금 사만 관이라는 단위는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 버리자 더 이상 생각이 따라가질 못하는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하월의 처소에 와서 소식을 전한 하인은 귀찮은 일을 맡았다는 듯 경멸 어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공자님을 보겠다는 자가 있습니다.”

    “누구라 하더냐.”

    “그걸 제가 어찌 압니까? 본데없이 자란 것인지 배워 먹은 것이 없는지 제 놈의 신분은 밝히지도 않고 공자님을 찾더이다.”

    “…….”

    하월은 하인조차 자신을 그렇게 대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괜한 짓을 했다가 대공자님께 야단맞지 말고 돌려보내고 오십시오. 몇 번이나 말을 했는데도 귓구멍에 뭘 박아 넣었는지 얘기를 들어야 말이지요. 공자님 야단맞는 거야 아무것도 아닌데 집안이 시끄러워지면 저희까지 피곤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제가 뿌린 씨앗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 채 반드시 저놈을 바닥에 기게 만들어 주겠다고 벼르며 하월은 밖으로 나갔다.

    북궁세가의 상황이 악화해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장원은 여전히 거대하고 웅장했다.

    그 안에만 있으면 가문에 어떤 위기가 닥쳤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월이 걸어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세가 무인들은 찢어발길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염치가 없어도 유분수지.”

    “나라면 자결을 했을 거야.”

    그를 본 무인들이 돌아서며 말했다.

    그래도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어디인가 했다.

    경내를 지나 문에 이르자 한 남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하월은 그를 보았지만 하월이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인피면구를 썼을 가능성도 있었기에 체격이나 다른 특징을 유심히 보았지만 떠오르는 이가 없었다.

    창백해 보이는 얼굴에 붓으로 그린 것 같은 눈과 입술이 유려한 선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진짜 얼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때문이 아니라 이 시기에 북궁세가에 맨얼굴을 하고 와서 자신을 찾는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아서였다.

    “누구십니까?”

    “공자와 나눌 얘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공자에게 할 제의가 있습니다.”

    “제의요?”

    하월은 상대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지금부터는 판단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 번의 실수가 너무나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와 버려서 이번에는 절대 실수를 하면 안 되었다.

    하월은 세가의 무사들이 가까이에 서서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앞의 남자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 같았는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조용한 곳에 가서 얘기를 나눴으면 하는데.”

    “본가를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그 사정이 나에게도 해당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가도록 그냥 두지 않을 거라는 말입니다.”

    “그냥 두지 않으면. 죽이기라도 할 거라는 말입니까? 세가의 귀한 공자님을?”

    하월은 피식 웃었다.

    지금 그들이 세가의 그 귀한 공자님을 향해 어떤 계획을 갖고 있는지 안다면 아마 기함할 거였다.

    “앞에 마차가 있습니다. 저기에 타면 좋은 기루로 안내하겠습니다. 거기라면 다른 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다른 이의 시선을 걱정하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게.”

    하월이 다시 말했지만 그는 이미 마차를 향해서 걸어가고 있었다.

    하월은 뒤를 돌아보았다.

    세가의 무인들은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때를 대비해 그를 주의해 지켜보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나.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월은 마차를 보았다.

    어차피 돌아간다고 해도 남은 삶은 빛이 보이지 않는 구렁텅이였다.

    ‘내게 내민 마지막 손길은 아닐까?’

    마차의 문은 열려 있었다.

    그대로 가 버리면 어쩌나 해서 걱정이 됐다.

    ‘제안이라고 했지? 내가 조건을 제시하면 되잖아? 만전의 빚을 갚아줄 수 있다고 할지도 모르잖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는 생각이 바로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하월은 어느새 마차를 향해 걷고 있었다.

    처음에는 걸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달렸다.

    갑자기 무인들이 쫓아와 붙들고 가 버릴 것 같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달렸다.

    뒤에서 정말 무인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신법을 쓴다면 충분히 그를 쉽게 붙잡을 수 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것은 하월에게 두려움을 극대화하려는 거였을 터다.

    하월에게는 그것이 기회였다.

    잡히지 않고 마차에 탈 수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이 남아 있는 동안 그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어느새 그의 몸은 마차에 거의 다다랐다.

    세가 무인들의 신형이 그의 뒤에 나타나고 하월의 어깨를 붙잡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으아아악!”

    하월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 손이 그렇게 순순히 떨어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일어났다.

    하월이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앞에는 문 앞에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이 서 있었다.

    창백해 보이는 하얀 얼굴에 한 줄기 웃음이 차갑게 지어지는 것이 꼭 먹이를 포획한 뱀 같았다.

    그는 하월을 똑바로 보면서 연신 손을 놀렸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있던 철전이 날아가고 그때마다 뒤에서 달려오던 세가의 무인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잡아라! 삼공자를 데려가려고 한다! 당장 저놈과 삼공자를 붙잡아라!”

    뒤에서 한 무리의 무인들이 달려 나오며 소리치자 눈앞의 창백한 남자가 경멸스럽다는 눈으로 하월을 보았다.

    “뭐야. 잡아두면 가치가 좀 있을 줄 알았더니 왜 공자를 대하는 놈들 태도가 저따위지? 생각을 좀 해 봐야 하려나?”

    “데려가십시오. 거래는 일단 해 봐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월은 그렇게 말하고, 열려 있는 마차 문을 향해 달려갔다.

    “잡아라! 삼공자가 도망친다!!”

    그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려왔지만 어느 정도 커지다가 그대로 멈췄다.

    하월은 마차에 타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고작 철전 하나에 목숨이 날아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철전 하나에 목숨 하나.

    빗맞는 일도 없었다.

    도대체 뭘 하는 작자이기에 북궁세가의 무인들을 그렇게 간단히 제압해 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하면서 하월은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가 곧 마차에 올랐다.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마차가 출발한 것을 보면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거나 전음이라도 나눈 듯했다.

    “크크큭. 나는 또 북궁세가가 얼마나 고귀한가 했는데 너무 심했는데?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겨우 그걸 가지고 황후의 태감을 만들어 버린다니. 놀랐겠네. 만전 빚? 황금 사만 관? 대체 무슨 짓을 했으면 빚이 그렇게 생겨나는 거지?”

    남자는 신기하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월은 보이지 않는 곳에 함께 탄 사람이 그에게 전음을 보내며 자기에 대한 얘기를 알려주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하월은 눈앞의 남자가 그런 것까지 알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북궁천영에게 그 말을 들을 때는 그럭저럭 참을 만했는데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듣고 있자니 얼굴이 숯덩이가 된 것 같았다.

    “오오. 그래? 북궁세가 망나니를 해치워 버린 게 네놈 짓인가? 양자가 친자를 죽였어?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버린 격이네?”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어댔다.

    하월의 얼굴에서는 점차 핏기가 사라졌다.

    도대체 누구기에 그런 사실까지 아는 것인가 했다.

    “재미있어. 특이한 놈인데? 황상이 북궁세가를 버리기로 했고 구문제독 역시 마찬가지라면 누구와 손을 잡았다는 것인가. 역시 금의위인가? 아직 황상이 고생을 덜 해 본 모양이야. 그렇게 팔팔하게 날뛰는 것을 보면.”

    “……!”

    세상에 누가 있어 황상을 향해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월은 자기가 정상적인 사람과 같이 있는 건 확실히 아니라고 생각했다.

    미친 게 틀림없었던 것이다.

    가다가 그는 창문을 열고 앞을 향해 소리쳤다.

    “서둘러라. 왜 이렇게 늦는 거지? 거치는 것이 있으면 피하지 말고 밟고 지나가라.”

    “예. 지존!”

    거침없는 소리였다.

    ‘지존……!’

    세상에서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하월은 알고 있었다.

    “이제야 본좌가 누구인지 안 것 같구나. 이렇게 멍청한 머리로 지금까지 살아왔다니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군. 가여워서 눈물이 앞을 가릴 지경이다.”

    그는 마음껏 하월을 조롱했다.

    그러나 하월은 더 이상 화가 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천마신교의 교주가 누구인가.

    그자가 어떻게 이곳에 나타났다는 말인가.

    황성은 황제가 머무는 곳이기에 무림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된다.

    미리 허락을 받은 게 아니라면 함부로 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마는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허락도 받지 않고 나를 만나려고 그냥 온 거라고?’

    “그래. 맞다. 너도 이해가 안 되겠지. 나도 그렇다. 나도 왜 내가 너 같은 것을 만나러 온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좀 더 정확히 파악하고 왔으면 좋았을 것을. 내가 너무 성급했던 거지.”

    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전음으로 아는 게 아니었어. 이 자는 그냥 내 생각을 읽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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