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5화
215화
“왜 그러느냐. 아진아.”
“잠시 운기조식을 해도 될지요. 폐하.”
“이를 말이냐. 그리 하거라. 그래. 그리 하는 것이 좋겠구나.”
흑주에게 맡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내공을 많이 사용해야 할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미리 준비하자는 생각이었다.
황제가 머무는 내실만큼 안전한 곳을 찾기도 어려웠기에 아진은 마음을 놓고 운기조식을 했는데 그가 눈을 떴을 때 황제는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잔뜩 긴장하고 서 있었다.
아진이 자기를 믿고 운기조식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나름대로 호법을 서려고 그런 것 같아 아진은 웃음이 나오고 고마웠다.
이제 황제와의 사이에는 그런 각별한 정이 생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진은 다시 한번 황제에게 인사했다.
“너무 오래 있다가 오지는 말고 일찍 오너라.”
“예. 폐하.”
이제는 산본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되었고 그 길은 북진무사가 올라오는 길과 방향이 달랐다.
그러나 쉽게 가시지 않는 불안한 마음에 그는 결국 북진무사 일행이 오는 길로 경공을 전개했다.
그리고 아진은 혹시나 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을 목도했다.
지금쯤은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기감을 펼치고 가는 동안 아진은 언젠가 하월의 계략에 의해 산본 표국이 당했던 것과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조급하지는 않았다.
북진무사가 이끄는 호위대가 공격을 받았다면 황상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터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황제를 자기가 모시기로 한 후 북진무사에게 호위대를 해산하라고 했을 것이다.
현장에 도착하자 아진의 눈에 여러 대의 마차와 수많은 사람이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다.
아진은 그대로 바닥으로 내려가 사람들을 향해 달려갔다.
“살아 있는 사람이 있으면 소리를 내보시오! 나는 산본의가의 서도진이오!”
그가 소리치자 여기저기서 몇 사람의 소리가 들려왔다.
아진은 그들을 향해 다가가 마나를 불어넣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느 정도 의식을 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시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살릴 때까지 끝내야 합니다.”
아진은 자기가 해야 할 말만 하고 그때부터는 쓰러진 이들을 살려내기 시작했다.
아진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은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가 아진의 재촉을 받고 이야기를 해 나갔다.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였다.
마차가 관도에서 벗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복면을 쓴 사십여 명이 말을 타고 마차를 먼저 공격했다고 했다.
“그 찢어 죽일 놈들이 감히 황상 폐하를 노렸습니다. 더군다나 적은 안에도 있었습니다. 놈들이 마차로 가지 못하도록 막으려는데 옆에 있던 자들이 갑자기 가슴에 검을 쑤셔 박는 바람에 그대로 쓰러진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그자들은 어디로 갔소?”
그들은 자신 없는 표정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다행히 방향이 엇갈리지는 않았다.
“누구인 것 같았습니까? 사용하는 검술이나 무공에서 특별한 것이 느껴졌다거나. 아니면 무기에 특징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그런 특징은 없었습니다. 마도들도 아니고 그냥 흔한 무인들 같았습니다.”
“혹시 황궁 무공을 익힌 자들 같았습니까? 아니면 강호의 무림인들처럼 느껴졌습니까?”
아진이 구체적으로 물어도 그들의 답은 신통치 않았다.
열심히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해도 여러 가지가 뒤섞이는 바람에 이렇다 할 답이 나오지 않았고 기껏 대답해도 서로 어긋나는 것도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아진에게는 전부 의미가 있었다.
“옆에 빠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저는 이대로 그자들을 쫓을 생각입니다. 혹시 다른 곳으로 끌려가서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알아야 합니다.”
그러자 북진무사가 모두를 모아 놓고 확인한 후에 말했다.
“다른 자들이 마차를 공격하는 동안 우리를 공격한 놈들을 빼고는 전부 있습니다. 그놈들은 다른 놈들이랑 함께 도망쳤으니 여기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북진무사가 아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 했지만 아진은 이미 바닥을 박차고 신형을 날렸다.
* * *
바람은 검에 묻은 피 냄새를 실어다 주었다.
그들이 어디에 있는지 아진은 알 수 있었다.
이대로 가면 일각도 되지 않아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듯했다.
‘꽤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군.’
아진은 놈들의 실체를 조금이라도 알아볼 생각을 하면서 몸을 날렸다.
이제 곧 적들을 마주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피가 끓는 것 같았다.
흑주도 곧 포식을 하게 될 거라는 생각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 듯했다.
마침내 아진은 한 무리의 인마가 어둠 속으로 달려가는 것을 발견했다.
아진은 기척을 숨길 생각을 하지 않은 채 그들에게 다가갔고 그들 중에 아진의 추격을 먼저 알아차린 사람이 그를 향해 검기를 쏘았다.
“웬 놈이냐!”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여기저기에서 공격이 이어졌다.
아진은 힘을 들이지도 않고 검기를 베어냈다.
이어지는 검기의 다발 역시 간단하게 베어내고 속도를 올려 순식간에 그들의 앞으로 벼락같이 달려갔지만 그다음 순간 아진은 놀라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의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 이목구비가 없었던 것이다.
‘……!’
살수 중에 간혹 이런 식으로 자기들의 정체를 감추는 이가 있다고 말을 들은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북진무사 일행 중에 이들의 얼굴에 대해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없었던 것을 보면 일이 수포가 된 것을 알고 돌아오면서 얼굴에 쓰고 있던 것을 뜯어낸 것 같았다.
아진은 한 방 먹은 느낌이었다.
다른 이에게 흔적을 들키지 않으려고 저희의 얼굴까지 뜯어내는 이들이었다.
그런 자들이 자기들의 소속을 들킬 수 있는 무기를 갖고 있거나 특유의 무공을 사용할 것 같지는 않았다.
“비밀은 끝까지 가져가겠다는 생각인 모양이군. 그러면 확실히 죽게 해 주기는 해야겠지?”
아진은 흑주를 띄웠다.
그러자 놈들이 대형을 이루었다.
“죽여라! 놈은 고작 한 놈이다!”
들려오는 소리는 쇳소리처럼 끔찍했다.
목소리를 통해 특정되는 것조차 막으려고 성대도 상하게 한 건가 하는 생각에 아진은 진심으로 질려 버렸다.
그들은 목적을 위해 죽음을 도외시한 듯 아진을 향해 짓쳐들었다.
얼마나 허망하게 죽게 될지 다 알면서도 그러고 있는 듯했다.
아진도 주저하지 않고 그들을 베어냈다.
그의 목으로, 가슴으로, 옆구리로 날아드는 검을 일일이 막아 내고 그 검을 그대로 그어 놈들을 쓰러뜨렸다.
곳곳에서 피 분수가 솟구쳤다.
무위는 절정에서 초절정.
이 정도의 무위에 이만한 숫자로 공격을 감행했으니 북진무사에게도 버거웠을 것이다.
만약 황상이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면 필시 변고를 당했으리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소청이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이들도 북진무사의 호위대를 상대하며 내공이 상당히 소모된 상태였고 그게 아니었다면 모두 쓰러뜨리기까지 시간이 더 걸렸을 듯했다.
흑주는 놈들의 사이사이를 다니며 진기를 말끔히 흡수했다.
그렇게 기이한 광경은 처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끔찍했다.
‘이 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했을까. 신념? 돈? 동료나 가족의 목숨?’
그러나 아무리 상상해 보려고 해도 그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가자. 흑주.”
목숨을 거두기 전 몇 사람에게서 진실을 들어 보려고 했지만 그 시도가 헛되다는 것은 진작 깨달았다.
그랬기에 아진도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황제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할까 했지만 북진무사가 황성에 도착하면 황제도 저절로 알게 될 일이라 아진은 그대로 산본으로 향했다.
* * *
목이 빠지라 기다리고 있던 소청은 아진이 오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왔고 어떻게 됐는지 물었다.
“네 말이 아니었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소청아.”
아진이 얘기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도 모여들었고 그들도 아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은 황상을 노린 사람들이 있었다는 말에 크게 경악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 아진아. 황상께서는 지금 무사하신 것이냐!”
북리의천이 놀란 얼굴로 물었고 아진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이목구비를 훼손한 살수들에 대해서는 나도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기는 하다만 그게 특별한 단체는 아닐 것이다.”
“저도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스승님. 북진무사도 크게 놀랐고 이번 일을 계기로 경비를 더 강화할 것입니다.”
“그래. 좋은 계기가 됐다면 그것도 다행이다. 황상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만 해도 의미가 클 것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하며 안으로 들어가자 제선문주와 역천마의가 뒤늦게 나왔다.
“공자. 어서 오시오. 가지고 온 영초들은 정말 대단하오. 특히나 너구리 머리에서 자랐다는 꽃잎은 여태 그런 효능은 본 적이 없을 만큼 정말 대단했소. 꽃잎이 워낙 적어서 전부 다 합해 봐야 얼마 나오지 않기는 하지만 그래도 좋은 영약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소. 그 섬에서 가져온 영초가 전부 좋아서 같은 성질을 가진 것들을 함께 섞어서 만들려고 하오.”
“문주님만 믿겠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면 석 소저가 서운할 거요.”
그러자 역천마의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약재의 배합에 대해서만큼은 문주님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다른 건 제가 더 잘 하는 게 있으니 기죽지 않고 열심히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산본의가의 분위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좋았다.
마을도 특별히 다를 때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은 없었다.
혈천방과 비룡채의 많은 사람이 황성으로 떠났지만 그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다시 채워졌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아진아. 영약은 누구에게 줄지 생각했느냐.”
나중에 여유가 생겼을 때 다가온 북리의천이 조용히 아진에게 물었고 아진은 그렇지 않아도 그 문제로 그와 상의를 하고 싶었기에 의견을 구했다.
“우리를 도와서 그동안 함께 싸웠던 이들 중 초절정 고수들에게 주어서 절대의 고수로 만드는 것이 전략적으로는 더 유리할 거라고 생각한다만 네 뜻은 어떤지 알고 싶구나.”
아진 역시 그 문제를 오래 고민해 왔고 북리의천이 말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절대의 고수 한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과 초절정 고수 두 사람이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비교가 불가능했고 절대의 고수 한 사람을 두는 것이 훨씬 더 효과가 좋았다.
그렇기에 무가나 문파마다 초고수를 키워내기 위해서 막대한 비용을 감수하면서까지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결정을 못 내리고 있습니다. 스승님. 아직은 생각해 볼 시간을 좀 더 갖고 누구에게 더 필요한지 알아보고 싶습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도 말릴 생각은 없다.”
아진은 선이남이나 남이천과 같은 사람들을 떠올렸다.
지금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않지만 자기가 무공을 전수하고 조금 봐주는 것으로 인해서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
그런 이들이 있다면 우선 그들에게 먼저 영약을 주고 키우고 싶었기에 영약이 다 만들어진다면 그들의 의사를 먼저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의맹이나 무림맹의 초절정 고수보다 그는 산본무관의 수련생들에게 더 마음이 갔다.
그들은 수시로 아진에게 지도대련을 받아와서 아진은 그들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었고 그들 중에는 내공의 문제만 해결이 된다는 비약적으로 성장할 사람들이 있었다.
결국 아진의 생각은 그쪽으로 기울어 갔다.
‘일단은 영약이 성공적으로 만들어진 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 미루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