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212화
위도도 위도지만 아진 일행이 풍기는 분위기가 워낙 범상치 않아서 아무도 그에게 함부로 하지 못했다.
“어디로 가면 되오?”
위도가 아진에게 물었다.
“나는 이곳의 지리를 잘 알지 못하니 당신이 안내하시오.”
“알았소. 마침 적당한 곳이 있소. 지금 바로 갈 거요?”
“그러면 될 것 같소만.”
아진이 말하자 위도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도는 황제보다 소청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아진은 혹시 위도에게 아이가 있었을까 생각했다.
그것을 직접 묻는 것은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 될 것 같아서 묻지는 못했지만 그런 생각이 깊이 들었다.
가는 동안 황제가 자연스럽게 소청의 손을 잡았다.
아진은 황제에게 이런 상황이 낯설 거라고 생각했다.
인근에 그의 호위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가면 수많은 병사를 동원할 수 있고 금의위사의 호위도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아진과 소청만 믿어야 했다.
소청은 의젓하게 황제와 옆에서 보조를 맞춰 주었다.
위도는 황제가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으슥한 골목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자주 싸우던 곳이오?”
“자주 끌려오던 곳이지.”
아진의 말에 위도가 웃으며 말했다.
“여기 놈들은 왜 그렇게 시비를 못 걸어서 안달인지 모르겠소. 나는 그냥 평화롭게 살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디서 왔냐고 해서 사실을 말해 준 것뿐인데 내가 한 말을 믿지도 않고 그때부터 나를 놀렸소. 면전에서 그런 놀림을 받고 누가 가만히 있겠소? 그래서 싸웠는데 내가 생각보다 굉장히 강하지 뭐요?”
위도는 웃지도 않은 채 말했다.
“그런데 그걸 나만 안다는 게 정말 억울하오. 나랑 싸우고 돌아간 놈들은 자기들이 나에게 졌다는 걸 알았을 텐데 그 이야기를 하지 않았소.”
그는 이야기를 하다가 아진을 보았다.
“시작하겠소?”
아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으면 하오. 섬에 가야 하니까 말이오. 당신을 다치게 하고 싶지도 않고.”
아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면 비무를 하지 말고 그냥 내공 대결을 해 보시면 어때요?”
그때 소청이 말했고 위도는 차라리 그게 낫겠다는 듯이 아진을 보았다.
“좋습니다. 그러면 내가 검을 뽑는 걸 당신이 막아보시오.”
아진의 말에 위도는 흔쾌히 수락했다.
아진은 급히 서두르지 않은 채 검을 뽑으려 했다.
그러자 위도가 스윽 다가와 손가락으로 검파를 눌렀다.
그는 당연히 자기가 아진의 검을 누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 했는데 손가락 하나로 누르다가 아진의 힘이 생각보다 강한 것을 알고 놀란 듯 아예 손바닥으로 누르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얼굴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손과 어깨, 얼굴이 부들부들 떨리더니 팽팽한 기 싸움이 벌어졌는데 소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사실에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느덧 흑주도 나와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고 땀을 뻘뻘 흘리던 위도가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흑주를 보고 깜짝 놀라 손을 떼버렸다.
그 바람에 아진의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왔고 하마터면 위도를 벨 뻔했다가 간신히 멈췄다.
“이, 이게 뭐요? 이건 뭔데 둥둥…….”
위도는 말을 하다 말고 흑주를 보았다.
신기한 듯했다.
흑주야말로 위도가 신기했는지 그의 주위를 돌면서 빤히 관찰하는 것처럼 굴었다.
위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그 간단한 내공 대결을 통해 어느 정도 답이 나왔다고 봐도 좋을 듯했다.
그동안 아진이 전력으로 대했을 때 아진에게 땀을 흐르게 한 사람이 없었는데 위도는 거의 막상막하의 실력으로 아진을 몰아붙였던 것이다.
흑주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공이 대단하구려. 내공만큼은 나도 누구 못지않다고 자부했는데.”
위도가 말했고 아진도 그를 인정했다.
“그럼 객잔으로 돌아가서 각자 운기조식을 하고 나서 조금 쉬다가 섬으로 출발하면 어떻겠습니까?”
아진이 말하자 위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섬에 가는 건 당신뿐인 것이 맞지요?”
위도는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했는지 아진에게 물었다.
“모두 갑니다.”
“모두라면…… 이 아이도 말입니까?”
위도의 말에 아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객잔으로 향했다.
“심법도 그곳에서 배웠습니까?”
아진이 묻자 위도가 당연하지 않겠냐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는 심법만 해도 정말 많소. 나는 심법이 그렇게 많은 것도 몰랐고 무공이랑 심법이 영향이 있는 것도 몰랐소.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시작을 해야 했는데, 어디에는 십성의 구결이 있고 어디에는 사성의 구결이 있고 하는 식이었소. 어떤 걸 어디에서 가져다 써야 하는 건지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하나하나 다 깨우쳐야 했소.”
그는 지금도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대단하구나.”
황제가 말하자 위도가 그를 바라보았다.
지금 자기에게 반말을 한 거냐고 물으려는 표정이었는데 황제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리고 위도에게 사실을 말해도 되지 않겠냐는 듯이 아진을 바라보았다.
-이분은 황제 폐하시오. 지금은 잠행 중이시오.
아진이 전음으로 말하자 위도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그 말이 쉽게 믿기지는 않지만 서도진이라는 인물에 대해 워낙 들은 게 많다 보니 그가 하는 말이면 믿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위도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하는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는 말을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예…….”
위도는 여전히 그 상황이 적응되지 않는 듯했는데 그래도 일단은 입을 다문 채 일행을 따라갔다.
객잔의 점소이는 떠난 게 아니었냐는 듯이 그들을 다시 맞았고 네 사람은 방으로 들어갔다.
아진과 위도가 운기조식을 하는 동안 소청이 그들을 지켜 주고 황제가 그 모습을 구경했는데 아진은 위도가 자기 앞에서 운기조식에 들어간 것을 보고 자기를 믿기로 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소청을 믿고 하는 것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의 앞에서 운기조식을 한다는 것은 큰 위험부담이 따르는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운기조식이 끝나고 나서 아진이 그 사실을 말하자 위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소리요? 정말 그렇다는 말이오? 그런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러자 황제가 혀를 찼다.
“큰일이군. 큰일이다. 그런 건 너무 기본적이고 간단한 것이니 굳이 적어 놓지 않았겠지. 스승 없이 바위에 적힌 구결만 가지고 무공을 배우면 이렇게 되는 건가 보군.”
아진은 괜히 혼자서 내적 친밀감을 쌓아 올리다가 그것이 식어 버리는 것을 느꼈다.
그래도 그 후로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은 채 섬으로 향했다.
위도는 섬으로 가기 위한 최단거리를 알고 있었고 조금이라도 섬과 가까운 곳으로 그들을 데려갔다.
“여기입니다. 이제부터는 멈출 수 없는 거요. 바다에 빠지면 죽기 살기로 헤엄을 쳐야 하는 거고 말이오. 그 섬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눈에 보이는 섬까지는 헤엄쳐 가야 하오. 아니면 죽으니까 말이오.”
그 말에 아진은 소청을 바라보았다.
소청은 긴장되는 얼굴로 아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흑주 역시 긴장이 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라. 아무 일도 생기지 않게 해 줄 테니까.”
그러면서 아진이 황제를 업자 위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폐하를…… 꼭 그 섬에 모시고 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오?”
위도가 말하자 황제는 급격히 기분이 상해서 그를 노려보았다.
“나에게는 아주 의미가 큰일이다. 괜한 소리 하지 말아라!”
황제는 혹시 그 말을 듣고 아진의 마음이 흔들릴까 걱정이 돼서 말했다.
“나는…… 모르겠군요. 어쨌거나 힘을 내 보도록 하시오. 도울 수 있으면 나도 돕겠소.”
“고맙습니다.”
“그럼 내가 먼저 갈 테니 나만 따라오시오.”
위도가 먼저 경공을 펼쳤다.
그가 펼친 것은 일보월하였다.
아진은 일보월하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그것을 펼치는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굉장한데 뭔가 이상하게 어설픈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뭔가 해서 아진은 몇 번이나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면서 그게 스승 없이 혼자 깨우쳐서 생긴 문제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혼자서 저 정도로 습득을 했다는 것도 대단하다고 여기며 아진은 부지런히 그 뒤를 따랐다.
처음에 거침없이 쭉쭉 나가던 위도는 어느 순간부터 확실히 속도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그러는 듯했는데 그래도 그사이에 주파한 거리가 상당해서 아주 위험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주위에 듬성듬성 섬이 보여서 만약 바다에 떨어진다고 해도 헤엄을 쳐서 섬으로 갈 수 있을 듯했다.
위도는 자기가 선두에 서서 이끄는 것은 더 이상 무리라고 생각한 듯 아진을 돌아보고 까마득히 멀리 보이는 섬 하나를 가리켰다.
아진은 그게 문제의 섬인가 보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소청을 돌아보았다.
소청은 아직 여유가 넘치는 모습이었다.
혼자인 데다 흑주까지 달고 있어서 걱정할 것이 전혀 없어 보였던 것이다.
소청도 위도가 가리킨 곳을 본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아진과 소청은 그때부터 조금 더 속도를 냈다.
힘이 남아 있을 때 좀 더 섬 가까이 가자는 생각이었는데 아직은 단전에서 무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진에게 업혀 있던 황제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숨도 쉬지 않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로 얌전했다.
업혀 가는 주제에 힘까지 들게 하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아 아진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처음에 걱정을 많이 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생각한 것에 비해 섬까지 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웬만한 사람은 시도할 수 없을 것 같고 만약 북진무사가 함께 왔다면 삼 분의 일도 오지 못하고 바다에 처박혔을 것 같기는 했는데 린린 정도면 넉넉히 올 것 같고 북리의천과 마두들은 흑주의 도움을 받는다는 가정하에 접근이 가능할 듯했다.
아진이 먼저 섬에 내려섰고 그 후에 소청이 내려서자 그때부터 흑주가 맹렬히 날아가 위도를 데려왔다.
위도는 막 포기를 하고 바다에 뛰어들려고 하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흑주가 날아오는 것을 보고 어리둥절해하며 흑주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흑주가 명문혈에 붙어서 내공을 불어넣어 주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진과 소청은 이미 위도를 바라볼 정신도 없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스승님!”
소청이 아진의 옆으로 와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저것 좀 보세요. 저거 다 너구리 맞죠?”
“그러게 말이다.”
너구리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있는 것 같았는데 운기조식을 할 때 머리에 꽃이 피어나는 환영이 보인다는 삼화취정의 경지가 너구리들에게 보이는 듯했다.
아진은 지금 자기가 잘못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해서 소청을 몇 번이나 보았다.
그러나 소청 역시 똑같은 걸 보고 있는 듯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정말 귀여워요. 세상에. 저게 다 너구리예요? 그런데 너구리 머리 위에 핀 게 영초인 거예요. 스승님?”
“나도 모르겠다. 나도 정말 모르겠다.”
황제는 두 손을 마주 붙인 채 입을 벌리고 너구리들을 보고 있었다.
“이런 걸 보는 게 흔한 건 아니지. 아진아?”
“그럼요. 폐하.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위도가 그들 옆에 내려와서 흑주의 놀라움에 대해 감탄을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