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210화
“함부로 돌아볼 일이 아니구나. 면사를 안 쓴 것은 다 이유가 있었어. 저 사람들은 처음부터 걱정할 게 전혀 없어서 그런 거야.”
황제의 말에 소청이 깔깔대고 웃었다.
“그런데 싸움이 붙으면 어떻게 하지? 나는 들키면 안 되는데. 그래도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잖아?”
“그때는 소청이랑 여기에 계십시오.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주문했던 소면과 만두가 나오자 황제가 아쉬운 듯 아진을 보았다.
“정말 이거만 먹는 건가?”
“예. 소설을 보셨으면 단골로 나오는 게 이거잖습니까. 여기에 죽엽청 한 병이면 되죠.”
“이것까지 체험해 보고 싶지는 않은데. 섬에 가면 잘 먹지도 못할 테고.”
황제의 말에 아진이 웃으며 다른 음식들을 거하게 시켜 주었다.
그러면서 음식들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전에 소면을 조금씩 먹고 있는데 갑자기 안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처음에는 별다른 관심이 가지 않았는데 객잔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를 아는 것처럼 숙덕거렸다.
“저 인간은 죽지도 않는 모양이야? 전에는 다른 사람이랑 시비가 붙어서 죽도록 얻어터지던데.”
하얗고 거친 머리를 아무렇게나 풀어헤친 남자는 이미 다른 곳에서 한 잔을 걸치고 온 것처럼 눈이 풀려 있었다.
걸음걸이도 정상은 아니었는데 그는 몇 번이나 비틀거리면서 넘어질 듯하더니 탁자 하나를 잡고 앉았다.
“이봐. 주인장! 술 가져와. 술!”
순간 아진의 머리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우연히 소청과 눈이 마주쳤는데 소청도 그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스승님. 저분이 그분 아닐까요? 그 섬에서 배도 없이 왔다고 했다는 그분요.”
아진은 자기도 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이상해서 우선은 지켜만 보고 있었다.
워낙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영약이 파처럼 나는 섬이 있다는데 왜 그런 정보를 가진 사람을 소 닭 보듯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이 인간은 왜 여기로 기어 들어오는 거야? 당신한테 팔 술 없으니까 당장 나가!”
점소이가 사납게 소리를 지르더니 다가와서 팔을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나가지 않으려고 버티는 남자를 억지로라도 끌어내려는 듯 힘을 주었고 남자는 버티기가 쉽지 않은 듯 결국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장사하는 업장에 와서 저게 뭐 하는 짓인지. 술을 처마셨으면 잠이나 퍼 잘 것이지. 왜 다른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지 원.”
점소이에게 험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누구 하나 남자를 도우려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아진은 그에게 섬에 대한 얘기를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점소이에게 다가갔다.
“이 사람이 마실 것은 내가 계산하겠소.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이 많이 취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폐가 되는 것 같으니 방을 하나 잡고 그곳에서 마시게 하면 어떨까 하는데 혹시 가능하겠습니까?”
점소이는 그렇게까지 하겠다면 안 될 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남자가 완강히 거절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네놈이 뭔데 나를 가라, 마라야? 내가 누구한테 폐를 끼쳤다고 그러는 거지? 나는 지금껏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친 적이 없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아왔단 말이야!”
당당하게 소리친 그는 다시 의자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허공에 삿대질을 하면서 누구에게인지 모를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하는 것으로 보아 지금까지 점소이의 고충이 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시오. 나는 당신을 도우려고 이러는 거요. 여기에 있어 봤자 당신에게 이로울 게 아무것도 없지 않소?”
“왜 없어? 여기에 있으면 사람들을 구경할 수도 있고 얼마나 좋은데. 그놈의 섬에 있을 때는 온종일 있어도 사람 하나 볼 수가 없었는데. 나를 거기에 떨구어 놓으면 내가 못 나올 줄 알았나 보지? 흥. 어림도 없는 일이지.”
점소이는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그를 다시 일으켰다.
“당장 나가요! 그리고 앞으로 이곳에는 얼씬도 하지 말아요. 우리도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다고요! 그분들에게 말해서 당신을 혼내달라고 할 거예요!”
점소이가 그러는 동안 객잔 주인은 나오지 않았다.
그도 이 일이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 알아서 일찌감치 포기해 버린 것 같았다.
결국 아진은 수혈을 짚어 그를 재우고 방으로 데려가기로 했다.
일단 소리를 부리는 것만 잠잠해지게 하면 그나마 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였다.
그리고 수혈을 짚으려고 하던 아진은 남자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 속도로 손을 쳐내는 바람에 깜짝 놀라 그를 보았다.
그의 눈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광분에 휩싸여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너! 뭐지? 뭐 하는 놈인데!”
그는 오히려 아진의 손목을 붙잡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서 비틀거리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내공의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이 정도라면 육갑자, 아니 팔갑자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아진을 그렇게까지 놀라게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당신…….”
아진은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내공이 전부가 아니었다.
분명 그에게서 자신의 것과 비슷한 마나가 느껴지고 있었던 것이다.
잠시 그렇게 아진과 남자의 시선에서 불꽃이 튀듯 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더니 점소이를 보았다.
“방으로 가서 마시면 되는 건가?”
“…….”
점소이는 남자가 갑자기 정신이 멀쩡해진 것처럼 말도 제대로 하고 휘청거리지도 않자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하는 것 같았다.
“그렇…… 기는 한데…….”
아진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은자 두 냥을 건넸다.
“여기에 맞춰서 안주를 봐서 방으로 올리도록 하시오. 나도 방으로 가겠소.”
“예.”
점소이는 은자 두 냥을 받고 화들짝 좋아하며 주방으로 가려고 하더니 특별히 원하는 술이나 안주가 있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 상황에서도 먹고 싶은 안주를 줄줄이 읊었다.
그동안 객잔을 다니면서 먹고 싶었으면서도 돈이 없어 먹지 못 했던 것들 같았다.
결국 아진은 은자 여섯 개를 더 내놔야 했다.
계산을 마치고 아진은 방으로 올라가기로 하며 소청을 바라보았다.
황제가 함께 올라가서 듣기에는 위험할 수도 있을 내용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소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이곳에서 황제를 지키겠다는 것 같았기에 아진은 남자를 재촉했다.
“올라가시오.”
남자 역시 아진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았던 듯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일행이 있던 것 아니오?”
“기다릴 거요.”
“같이 가는 게 낫지 않소? 여기에는 질 나쁜 자들이 자주 나타나는데.”
“내 제자면 충분하오.”
“제자? 나이 든 제자를 얻은 모양이군.”
그는 설마하니 소청이 제자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듯 말했다.
점소이가 주방에서 나오더니 그대로 두 사람을 따라왔다.
어느 방으로 가야 할지 알지 못하니 방을 알려 주려고 그런 것 같았다.
아진은 복도 끝에 있는 방을 부탁했다.
어차피 기막을 두르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발길이 조금이라도 덜 닿는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서였다.
섬에 가기 위해 내공을 회복하려고 객잔에 들어왔던 것인데 일이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와 같은 마나를 가진 사람을 만난 이상 그를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남자가 먼저 의자에 걸터앉았고 아진도 그 건너편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았다.
“어떻게 된 일이오? 왜 당신에게 그런 것이 있소?”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나야말로 묻고 싶은 말이오.”
서로가 서로에게 궁금한 것이 있었지만 먼저 털어놓고 싶지는 않아서 탐색전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국 아진이 먼저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건 마나라고 불리는 건데.”
“…….”
그의 몸이 움찔하는 것을 아진은 놓치지 않았다.
“혹시…… 다른 곳에서 왔소?”
아진이 재차 묻자 그의 눈동자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당신도 그렇소? 당신 혹시. 헌터였소?”
아진은 이 자 역시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하면서도 깜짝 놀라서 그를 바라보았다.
“상태창이 나타난 겁니까?”
그는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도 이미 겪은 일이지만 다른 사람도 그 일을 당했다고 하자 도무지 믿기지 않는 듯했다.
“언제 여기로 온 겁니까?”
아진이 묻자 그가 햇수를 헤아려 보려 하는 것 같았다.
“10년은 훨씬 넘었고 15년은 지났는지 잘 모르겠소.”
“…….”
아진은 그의 운명이 정말 기구하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산본의가에서 눈을 뜬 것이 정말 운이 좋은 거였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다른 사람이 이런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바였다.
“혹시…… 눈을 떴을 때 그 섬에 있었던 겁니까?”
“맞소.”
그는 그때부터 말할 마음이 생겼는지 쉬지도 않고 이야기를 해댔다.
“나는 원래 S급 탱커였소. 조 위도. 크크큭. 그 이름을 다시 말하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군.”
아진은 그야말로 놀라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조 위도.
모든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던 그를 보며 헌터가 되기를 꿈꿨었는데 눈앞에 그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는 어떻게 됐는지 관심도 없었고 듣지도 못했는데 그를 이곳에서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서도진이라고 합니다.”
“서도진? 혹시 대한민국에서 나타난 그 희한한 스탯의……?”
“…….”
아진은 설마하니 조 위도까지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여기에서는 이름이 뭡니까?”
“위도.”
“뭐. 나도 서도진입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을 떴는데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걸 알았소. 그곳이 섬이라는 걸 알아차린 건 상당히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는데 꽤 커서였소. 그런데 그렇게 넓은 섬에 사람이 나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았지.”
“…….”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먹고 사는 건 문제가 없었소. 먹을 게 지천에 깔려 있었으니까.”
“그게 영약이었던 겁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먹는데 고통은 따르지 않았습니까?”
“이상하다 하기는 했었죠. 뭘 하나를 먹기만 하면 속에 들어가서 부글부글 끓는 것 같고 뜨거워서 말이오.”
“탱커의 능력이 이곳에서도 나타났겠군요.”
그러자 그가 놀란 얼굴로 아진을 보았다.
“그렇지. 당신! 딜러이자 힐러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전 세계 유일의 힐러. 혹시 그 능력이 이곳에서도…… 아. 잠깐만. 혹시 당신이 산본의가의 그……?”
그는 아무렇게나 흩어진 조각을 모아서 정보를 이어붙이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에서 들은 것이 적지 않은데 그것을 이제야 전부 짜맞출 수 있게 된 것이다.